너도 내가 돈을 먹었다고 생각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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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내가 돈을 먹었다고 생각하느냐?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09.05.06 14: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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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유진산과 고흥문

#1. 5ㆍ6 파동 후에 지구당 개편대회가 열렸다. 지구당의 모든 당직을 개편하는데 지난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박정훈 씨의 당직 문제가 말썽이 되었다. 유진산 당수는 박정훈 씨를 부위원장으로 임명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갑 지구당 부위원장들과 다른 간부들의 반대가 심해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내가 아침 일찍 총재 댁을 찾았다. 반갑게 맞이하는 총재님께 내가 물었다.
“지구당 당직인선에 문제가 있습니까?”
“병구,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류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내 대답에 총재님은 정색을 했다.
“그러면 너도 세상에서 떠드는 것처럼 내가 돈을 먹었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하지만 총재님께서 돈을 먹었다고 떠드는 그 사람들도 이해가 갑니다. 그 사람들을 무턱대고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사람들을 이해한다면 너도 그 사람들과 똑같이 본다 그런 소리 아니야?”

“총재님,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총재님께서 억울한 소리를 듣고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이 지구당에도 대학을 나오고 정치에 꿈을 가진 사람이 꽤 있습니다. 6ㆍ3 대표를 이야기하시지만, 이 지구당 사람들도 자기 나름대로 민주화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갑자기 동천을 받고 나오긴 했지만, 한 사람씩 일대일로 비교한다면 박정훈 씨가 특별히 우월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문제는 상식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불합리한 공천이었다고 보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 투명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면 사람들은 일단 뒤에 뭔가가 있다고 의혹을 가지게 되고, 가장 말하기 좋고 얼른 먹혀 들어가는 것이 ‘돈 먹었다’라는 말입니다. 박정훈 씨가 일반에게 인정받고 상식화될 때까지, 애석하지만 부위원장 임명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 시사오늘


 
눈을 지긋이 감고 내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총재님이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알았다. 내가 네 말대로 하마. 그러나 어쨌든 결과적으로 내가 멀쩡한 젊은 놈에게 좌절을 안겨준 것 같아서 미안하고 잠이 안 와. 만약 5ㆍ6 파동이 없었다면 박정훈이는 능히 장덕진이를 이기고 당선이 됐을 것이라고 보고 이를 안타깝게 생각해서, 보상은 안 되겠지만 위로도 하고 용기를 주려고 부위원장을 시키려고 했던 거야! 내가 네 말을 듣고 없었던 것으로 할 테니 동지들에게 잘 말해다오.”
역시 진산 선생은 정감 넘치는 거인이었다.
 
제8대 국회의원 총선과 고흥문(高興門) 후보의 찬조연설
 
#2.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일이 공고되었다. 나는 당시 선전국 공보부장이었는데, 사무총장인 고흥문 의원이 사무총장실로 나를 불러 간곡히 부탁했다.
“노 부장은 꼼짝 말고 내가 출마하는 도봉구에 와서 내 정견발표회의 찬조연설을 해줘야겠어. 다른 데 갈 생각 말고 내 선거를 도와줘.”

지역사정으로 보아서는 내 성장구역인 영등포 갑구에서 선거운동을 해야 하는데, 박정훈 후보는 잘 알지도 못하지만 5ㆍ6 파동 문제도 있고 해서 사무총장인 고흥문 의원의 선거운동을 돕기 위해 도봉구 전역을 누비며 약 한 달 동안 하루에 7~8회의 선거연설을 했다.
고흥문 의원의 정견발표회장에는 유권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청중의 열기 또한 뜨거워서 오전부터 밤늦게까지 장소를 옮겨가며 연설을 해도 피곤한 줄 몰랐다.

고흥문 의원은 원래 전국구의원 출신이어서 대중연설의 경험이 적었기 때문에 연설을 많이 하면 목이 쉬어 고통스러워했지만, 나는 시작하는 날부터 선거가 끝날 때까지 목이 쉬지 않아 피곤할 줄 모르고 잘 마쳤다.

고흥문 의원은 다행스럽게도 전국에서 최고득표로 당선되어 본인도 영광이었지만 찬조연설을 한 나도 무척이나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제8대 국회의원 선거로 나는 고흥문 의원과 특별한 인연을 맺어 매우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유신정치의 시작
 
#3. 삼선개헌으로 세 번째 대통령이 된 지 2년밖에 안 된 박정희 대통령이 느닷없이 일본인들이 명치 때 써먹었던 유신이라는 말을 빌려 1972년 10월 17일 비상조치를 발동해 헌정을 중단했다. 그리고 2년도 채 안 된 멀쩡한 국회를 해산하고 선거구를 중선서구제로 바꾸어 한 선거구에서 두 명의 국회의원을 뽑고,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여 유정회라는 이름을 붙여 국회를 구성한다고 발표했다.

겁없이 역사를 반전시킨 유신정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역사적 비극의 시작이었다. 막강한 군사력으로 반대할 만한 사람은 미리 모조리 잡아다가 두드려패고 심하게 고문을 해서 항복을 받아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야당 정치인 중 누구 하면 알 만한 사람들도 "유신만이 살 길"이라는 구호가 적힌 어깨띠를 두르고 다녀야 할 정도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유신을 밀고 나갔다.

당시는 야당의 거물 정치인들이 외국에 많이 나가 있을 때였다. 유진산, 김영삼, 김대중 등 여러분이 외국에 있었는데, 유진산 총재는 나라에 위급이 닥쳤는데 나랏일을 한다는 사람이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 외국에서 피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급거 귀국해 김포공항에서 기관원들에게 연행되었다.

김영삼 의원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라이샤워 교수가 한국의 정변 소식을 듣고 "하버드대학에서 아파트와 생활비까지 담당하도록 조치를 취하겠으니 귀국하지 말라"고 간곡하게 권했지만 이에 응하지 않았다.
 
"대한히 고맙지만 나는 명색이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입니다. 나 혼자의 안전을 위해서 이곳에 남는다는 것은 내 조국과 국민을 팽개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고 곧바로 귀국길에 올라 김포공항에서 헌병들에게 둘러싸여 돌아왔다. 
- 김영삼 회고록 2권 23쪽
김대중 의원도 일본 도쿄에 있었는데,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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