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가려진 시간>, 믿어지지 않는 믿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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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가려진 시간>, 믿어지지 않는 믿음의 이야기
  • 김기범 영화 기자
  • 승인 2016.11.02 16: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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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범의 시네 리플릿>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보내는 메시지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기범 영화 기자) 

▲ 영화 <가려진 시간> 포스터 ⓒ쇼박스

살다 보면 누구나 가끔 그런 공상을 할 때가 있다. 

사후세계처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이 존재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부터, 심지어는 외부의 절대적인 신적 존재에 의해 우리의 삶이 감시당하거나 재단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등이다. 

여기에 더해져 처해 있는 현재 순간을 부정하거나, 그 이후의 시간들이 영원히 멈춰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은 망상에 가까울지언정 나이가 들수록 신산하고 처절한 현실로부터 탈출하고 싶을 때마다 늘 직면하는 바람들이다. 

더구나 가족이나 친구 같은 사랑하는 이들이 곁에 없이 외로움과 사투해야 하는 순간순간이 켜켜이 쌓여가는 특정인들에게는 그 시간을 저마다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탈피하고 싶은 현실과 차라리 순응하고 싶은 비현실의 경계선상으로 내몰릴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 적나라하게 실체가 벗겨지고 있는 우리의 일각이 외면하고 싶은 충동의 민낯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는 이 가을에 선보이는 <가려진 시간> 은 주연 배우들이 지닌 비주얼의 조합으로만 탄생시킨 단순한 감성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 속에 잊고 살았던 주변의 소중함과 사랑을 정지된 시간으로 비춰 보는 한 편의 영상 서정시다. 

황순원의 <소나기> 가 보여준 아이들의 애틋하고 순수한 동화처럼 시작하는 영화의 배경인 화노도는 화려한 도시와 수풀이 우거진 촌락이 공존하는, 대한민국에는 존재할 수 없는 가상의 섬이지만 한편으로는 순정과 패닉이 더불어 상존하는 우리 사회의 상징이기도 하다. 

시간이 멈춰진, 아니 정확히는 현실 속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겐 특정 시간이 철저히 가려진 그 섬은 시간을 잃은 누군가에겐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는 또 다른 처절한 현실의 무대이기도 하다. 

<숲> 과 <잉투기> 를 통해 익히 독립영화계에서 미장센에 남다른 재능을 인정받았던 엄태화 감독은 자신의 첫 상업영화에서 정지화면에 비주얼이 살아 있는 상상력을 마음껏 불어 넣으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연출하는데 특유의 주특기를 적극 활용한다. 

자극적이거나 급한 파동 속에서 움직이는 이야기와는 유리된, 자칫 지루하게도 느껴질 수 있지만 보는 이의 감정을 한두 박자 늦춰주는 세밀한 연출과 서사의 전개는 마치 영화가 내세우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처럼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의 경계에 있는 듯하다. 

관객이 납득할 만한 스토리 보다는 화면의 정적인 판타지에 대놓고 주안점을 둔 <가려진 시간> 속에 펼쳐지는 강동원과 신은수의 조합은 영화의 흐름에 더 이상 없을 최상의 시너지를 부여한다. 

시쳇말로‘비주얼 깡패’라 불리는 강동원의 그림 같은 외모가 없었다면 빈약해졌을 스토리는 영화가 내내 내세우는 판타지의 유일한 주인을 극명하게 지적하지만, 동시에 특정 배우의 이미지에 그만큼 기대야만 하는 서사의 아쉬운 한계도 드러낸다. 

강동원의 슬픈 눈빛만 따라가며 천착하는 카메라 렌즈의 소모는 연기의 스펙트럼을 한창 넓혀야 하는 배우 개인에게도 그다지 환영받을 바는 못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이미 예정된 길을 걷는 강동원과 나이차를 뛰어넘는 합을 맞추는 신은수의 신선한 발견이다. 

나이에 비해 조숙해 보이는 이 신예의 마스크와 절제된 감성 연기는 현재 한국영화의 대세로 떠오르고 있는 여타 아역 출신 여배우들의 후계 구도가 금세 뒤바뀔 조짐을 엿보이게 한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내가 남긴 의붓딸에 대한 보이지 않는 헌신과 사랑으로, 자칫 비현실적인 비주얼에만 기댈 수 있는 축을 현실적으로 오롯이 잡아주는 인간미를 자아낸 김희원 또한 이 영화의 주제를 지켜냈다는 점에서 절대 가려져서는 안 된다. 

영화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한 장치로 투입된 정지화면은 팀 버튼이 <빅 피쉬> 에서 12년 전에 이미 구현해내어 식상해 보일수도 있지만, 그 시각특수효과는 분명 한국영화의 괄목이다. 

미장센과 판타지에 의존하는 다소 더딘 이야기는 난해하고 비현실적인 개연성의 의구심을 불러 일으켜 세대와 성별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실제로 이성적으로 믿을 수 없는 일들이 횡행하고 있는, 아니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없어지듯 믿음과 불신의 경계조차 사라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지금 이 공기를 느낀다면 소중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희생할 줄 아는 이의 메시지를 받아들여 보는 것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 

굳이 일찌감치 찾아온 겨울 때문이 아니더라도, 가뜩이나 몸과 마음이 얼어버린 현재 이 순간을 두어 시간이나마 가려보고 싶다면 지친 우리들에게 영화의 화노도는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가을의 감성을 제공해 줄 것이다. 

혹시 누가 아는가? 

우리가 믿고 살았던 이 시간과 공간이 진실이 아니라, 누군가의 다른 저편에서는 매 순간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을지. 

어차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 늘 믿을만한 이성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11월 16일 개봉한다. 12세 이상 관람가. 

★★★☆

·영화 저널리스트
·한양대학교 연구원 및 연구교수 역임
·한양대학교, 서원대학교 등 강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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