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1992년 대통령 후보 전당대회에서 66.3%로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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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1992년 대통령 후보 전당대회에서 66.3%로 1위”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0.08.16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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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민자당 대통령후보 지명 전당대회

그날의 담판으로 대통령직선제와 민자당의 대선후보는 당내 경선으로 뽑는다는데 까지는 합의했으나 처음부터 25%의 지분만으로 합당한 우리로서는 절대열세인 한계를 넘어 승리한다는 것은 기적을 바라는 것이었다.
 
합당 당시에도 불가능이라는 생각으로 김영삼 총재를 따라온 우리들은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여기저기서 기득권 세력들이 기회만 오면 그들 나름대로 김영삼 대표최고위원과 민주계를 소외시키려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1992년 5월 19일,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역사적인 집권당의 대통령후보 지명 전당대회가 개최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집권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를 자유 경선으로 선출하는 감격스러운 자리였는데, 김영삼 후보에게 도전하는 이종찬 세력도 만만치 않아서 가까운 친구들끼리 몰려 앉아 투표도 하고 또 투표용지를 모아 개표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일각이 여삼추라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로구나’하고 초조히 개표결과를 기다렸다.

숨죽이며 기다리는데 전당대회 의장이 개표결과를 발표했다. 6666명이 투표에 참여한 가운데 김영삼 후보가 4418표를 득표해서 총 투표자수의 66.3%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들은 기적을 낳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산술적 계산으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패배의식에 젖어 마지못해 따라간 우리들에게 승리의 영광을 안겨준 김영삼 후보의 혜안과 인내 그리고 그 끈질긴 정치력에 혀를 내두르며 감사했다. 참으로 눈물겨운 감격의 순간은 내가 눈을 감아도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교과서에서나 배운 민주주의를 이 땅에 꼭 심고야 말겠다고 군사독재와 싸워온 지 벌써 30년, 나도 아내 경옥도 지치고 가족들은 은근이 이제 정치를 그만두고 가족의 생계만이라도 제대로 챙겼으면 하고 기대하고 있을 무렵, 김영삼 후보가 승리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갖게 되었다.

김영삼 후보는 후보 수락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민주적이고 정직한 지도자가 가장 강력한 지도자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저는 도덕적인 정치와 깨끗한 정치를 몸소 실천해 나가겠습니다. ·····‘윗물맑기운동’, ‘민주주의의 완성’, ‘선진경제의 실현’, ‘민족통일의 성취’라는 국가목표를 향해 매진하겠습니다.” 그리고 민주자유당의 후보를 수락한다는 말로 연설을 마쳤다.
 
민주산악회의 조직개편

3당 합당으로 통일민주당 광명시 지구당도 민주자유당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당원은 김병용 위원장이 관장하고 지구당도 없어졌다. 그러나 민주산악회 광명시 지부는 변함없이 지속되어 전 통일민주당 지구당 당원들은 민주산악회의 이름으로 더욱 결속을 다지며 다가올 14대 대통령선거에 대비하기 위해 조직 확대에 열을 올렸다.

1991년 말경, 중앙에서는 새로운 대비를 위해 그동안 민주산악회를 이끌어온 김명윤 회장에 이어 최형우 의원이 회장을 맡고  김덕룡 의원이 상임부회장, 그리고 박태권 의원이 본부장을 맡았으며, 나는 연수원장을 맡아 전국 각 시도협의회와 전국 지부의 간부연수계획을 수립하여 눈코 틀 새 없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지난달 신민당 등 야당을 할 때 훈련원장직은 서열만 고위직이었지 실상은 별 볼일 없는 직책이었기 때문에 최형우 회장과 김덕룡 상임부회장이 나를 따로 불러 특별히 민주산악회 연수원장을 맡으라고 통고할 때 나는 그저 명함용 직책을 맡긴다고 생각하여 씁쓸하게 받아들였다.
 
더욱이 최형우 회장은 본부의 직책과 지부장직을 분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서 본부의 직책을 맡는 사람은 그가 맡고 있던 지부장직을 내놓고 다른 사람으로 선임한다고 해서 거의 강제로 바꿔나갔다.

정치하는 사람은 자기가 맡고 있는 지역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는 것을 정치적으로 죽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중앙의 직책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꼭 이겨야 하는 14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맡겨진 업무에만 충실해야 된다는 명제 앞에 중앙에서 직책을 맡은 사람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최형우 회장이 민주산악회 광명시 지부장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겠다는 말을 하면서 경상도 출신으로 학원을 하며 정치에 꿈을 품고 있는 C씨를 소개받아 그를 광명시 지부장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연수원장은 정당에서는 훈련원장으로 사실상 실권도 없고 한직인데, 이것을 받고 참으로 오랫동안 경옥과 내가 심혈을 기울여 키워온 광명시 지부를 내놓으라니 참으로 억울하고 반발심도 컸다.

하지만 모처럼 여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 받은 김영삼 후보의 당선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최형우 회장에게 어느 것이든 최 회장이 세운 방침을 따르겠다고 말하고 별로 할 일도 없는 본부사무실에 매일 출근했다. 하루는 최 회장과 김덕룡 상임부장에게서 우선 본부의 간부연수계획을 세워 보고하라는 지시가 왔다 1992년 봄이었다.

나는 연수원 부원장과 국장, 부차장들을 불러 우선 1회에 150여명에서 200명 정도의 인원을 1박2일 일정으로 수련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라고 지시했다. 하룻밤을 함께 자면서 학습도 하고 캠프파이어 같은 단합대회까지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수련장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승용차 2대를 몰고 며칠을 다녀서 춘천의 지인용 지부장이 소개하고 알려준, 배를 타고 소양댐을 건너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오봉산수련원에서 우선 1차 연수를 하기로 하고 준비에 착수했다.

우선 연수대상인 피교육자의 범위를 정하고 강의종목과 그에 맞는 교수를 모시는 일도 쉽지 않았다. 몇 날 며칠을 집에도 가지 못하고 분주하게 다녔다. 연수원 직제는 3명의 부원장과 3개의 국(행정국, 연수국, 교수국)이 있고 각국에는 3개의 부가 있으며 각부에는 차장 2명씩이 있었다. 연수원에는 원장을 포함해서 총38명이 배치되었다.

처음에는 연수원은 일이 많은 것도 아닌데 무슨 인원을 이렇게 많이 하느냐는 말들이 있었고 나 역시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신민당 등 야당 시절 훈련원은 1년에 한두 번 국회의원과 원외 위원장 합동으로 1박2일이나 2박3일 정도 연수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춘천 소양댐 오봉산수련원 간부연수

여러 날을 소비해 소양댐 건너 오봉산수련원을 1차 중앙간부와 광역시도 협의회장을 합쳐 300명이 넘는 인원을 반으로 나누어 150명씩 1, 2차로 실시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피교육자 선정과 교과과정을 정하여 보고하고 실시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피교육자 선발은 조직본부(본부장: 박정태)에 의뢰해서 하도록 하고 교과과정은 피교육자가 용산역 광장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해 10시 30분에 오봉산수련원에 도착, 11시까지 배정된 숙소에서 미리 지급한 민주산악회 마크가 묻어 있는 티셔츠를 입고 강당에 모여 11시 정각에 입소식을 했다.
 
1992년 7월29일, 마침내 춘천 오봉산수련원에서 민주산악회 중앙간부 및 시도 협의회장들의 연수를 하기로 결정되었다. 우리가 기다리던 29일이 되었다. 약300명의 중앙간부 중 제1진 150여명이 29일 아침 일찍 전세버스 편으로 용산역 광장을 출발해 예정된 시간에 오봉산수련원에 도착했다. 이들은 각기 방 배정을 받고 민주산악회 마크가 부착된 티셔츠로 갈아입고 강당에 모여 감격스러운 입소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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