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YS와 DJ가 그립다.”
故 김영삼 전 대통령과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혼란스러운 최근의 정치권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떠올리는 이름이다. 비전도, 일관성도 없는 국정 운영에 지친 국민들은 확고한 철학을 갖고 민주화를 이룩한 양김(金)의 리더십을 그리워하고 있다. 때마침 지난 29일 국민대학교 북악정치포럼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관을 지낸 국민의당 최경환 의원이 ‘김대중 대통령의 리더십’을 주제로 강연해 눈길을 끌었다.
“DJ의 위기관리 비법은 원칙 포기하지 않는 것”
최 의원은 민주화 투쟁 당시 DJ가 생명에 위협을 받았던 사건을 소개하며 강의의 문을 열었다.
“1973년에 납치사건이 있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게 진 뒤 DJ가 일본에 가 있었는데, 그때 중앙정보부가 살해 공작을 한 사건이다. 중앙정보부가 일본에서 DJ를 납치, 배에 싣고 오다가 현해탄에 빠뜨리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1980년에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혐의였다. 그야말로 최대 위기 아니었나. 이런 위기를 빠져나온 DJ의 위기관리 비법은 특별한 게 없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자기 원칙을 포기하지 않았던 거다. DJ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깊은 성찰을 했고, 분명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많은 정치인들이 빨갱이니 뭐니 해서 거리에서 많이 죽었다. DJ도 그런 위기를 수없이 겪었다. 그런데도 DJ는 ‘내 정치적 소명을 위해 죽겠다’고 말하곤 했다. 정치인은 생사관이 있어야 한다. DJ에게는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내가 이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죽겠다’하는 그런 신념이 있었다.”
“1980년에 사형선고를 받고 난 뒤에는 전두환의 심복이었던 ‘쓰리허(허화평·허삼수·허문도)가 설득 작업을 했다. 자신들과 같이 하면 살려주겠다고. 그러면서 신문 한 뭉텅이를 던져줬다. 수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죽어간 기사였다. 그런 상황에서 DJ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여기서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자기를 던져버렸다. 역사와 국민 속에서 살겠다는 그 철학이야말로 위기관리의 태도가 아닌가 싶다.”
이어서 그는 민주화 이후에도 수많은 위기에 빠졌던 DJ가 정책과 국정 운영을 통해 위기를 극복한 사례를 나열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DJ는 위기를 많이 맞았다. 6월 항쟁 이후 정치적 매듭으로서 대선이 치러졌는데, YS와의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결국 노태우가 대통령이 됐다. 당시 YS와 DJ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거기서 주저앉지 않고 평화민주당이라는 당에서 성공을 거뒀다. 제1야당이 돼 여소야대를 만들었고, 국민이 원했던 5공 비리 청문회나 5·18 청문회 등을 이뤄내면서 위기를 벗어났다. 실제로 그 당시 이뤄진 게 참 많다. 유산을 상속할 때 아들이 딸보다 많이 갖게 돼있던 가족법도 이때 바뀌었고, 지방자치제도 이때부터 시행됐다. 국정 성과를 바탕으로 어려움을 극복한 것이다.”
“DJ 리더십의 백미는 IMF 극복”
최 의원은 IMF 외환 위기라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DJ가 어떤 방식으로 사회·경제적 위기를 이겨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이 당시 보여준 모습이야말로 DJ 리더십의 백미라고 평가했다.
“1992년 대선에서 YS에게 패한 DJ는 정계에서 은퇴했다가 다시 복귀, 1997년에 결국 대통령이 됐다. 이 당시 DJ가 보여준 리더십은 그 분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탁월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먼저 상황인식 능력이 뛰어났다. 네 번째 도전 만에 대통령이 됐는데, 나라가 사회·경제적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때 DJ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내가 권력은 잡았지만 사회 혁명, 경제 폭동이 일어날 것 같다’는 위기의식. 실제로 당시에는 하루에도 실업자가 7~8만 명씩 쏟아져 나왔고, 서울역 앞에 노숙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야말로 비상 사태였다. 그래서 DJ는 과감하게 구조 개혁을 했다.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를 깨고 재벌, 은행 등을 다 정리했다. 정리해고·탄력근로제 등 신자유주의 하에서 비정규직 근원으로 비난받는 제도들도 국가위기 극복을 위해 과감하게 도입했다. 한국전쟁에 버금가는 국난을 그렇게 해결했던 거다.”
또한 그는 제1차 연평해전 때의 일화를 들려주며 DJ가 어떤 방식으로 안보 위기에 대처했는지를 밝혔다. 그러면서 세월호 참사 때 박근혜 대통령의 대응을 강하게 비판했다.
“DJ 재임 중 1차 연평해전이 일어났다. 서해상에서 우리 군함들과 북한 군함들이 충돌했다. 분단 상황에서는 조그만 충돌도 전면적으로 확전될 가능성이 있다. 제일 염려하는 게 그것이다. 당시 DJ는 보고를 받고 곧바로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첫째, 도발을 저지하고 둘째, 저쪽이 공격하면 가차 없이 응징하라. 셋째, 확전되지 않도록 하라. 밤에 일어나서 그런 지시를 내렸던 거다. 반면 박근혜 대통령은 어땠나. 세월호 사건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정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모든 인력과 장비를 동원해서 구하라’고 지시했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국민 성장한 만큼 정치인들도 정직하고 투명해져야”
마지막으로 최 의원은 정직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강의를 끝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이후 우리 사회가 얻은 가장 큰 자산은 시민의 자율성과 책임의식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왜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자율성과 시민의식이 크게 높아졌는가. 이유가 있다. 민주주의 때문이다. DJ는 장관들과 논쟁을 하면서 ‘마음대로 놀게 만들어 줘. 필요하면 정부에서 돈도 대주면서 마음대로 놀게 만들어 줘’라고 말했다. 당시 기성세대들은 우려가 많았다. ‘마음대로 놀게 해주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거다. 하지만 그런 정책이 시민들의 자율성과 창의력을 높였다.”
“그때 민주주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들어와서 촛불로 저항하고 있는 거다. 이미 자율성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세대는 억압적인 방식으로 절대 꺾을 수 없다. 우리나라는 그만큼 성숙해 있다. 가령 학교 앞에 탱크를 세워놓고 계엄령을 선포한다고 해도 시민들이 가만히 놔두겠나. 동네 아이들부터 나서서 돌을 던질 거다. 이렇게 나라가 어지러워도 군인들이 나올 생각을 안 하지 않나. 이렇게 국민들이 성장한 상황에서 예전처럼 자꾸 속이려고만 하면 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 국민 수준이 성장한 만큼 정치인들도 정직해지고 투명해져야 한다.”
“1945년에 나온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보면 ‘한 사람의 국민을 일시적으로 속일 수는 있지만 모든 국민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고 나온다. 더욱이 지금 같은 지식정보사회에서는 국민을 속이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정치인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리더십의 기본이다.”
좌우명 : 인생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