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민주산악회 없었다면 대통령 당선 어려웠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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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민주산악회 없었다면 대통령 당선 어려웠을 것”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0.08.30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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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제14대 대통령선거와 YS의 당선

1992년 12월 18일로 공고된 제14대 대통령선거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해 봄부터 11월 중순까지 민주산악회 중앙간부 및 전국 각 지부의 간부 연수로 전국을 누비며 연수에 열중하느라 내 지부인 광명시 지부는 심상구 수석 부지부장과 간부들이 움직여왔다.

나는 연수에서 돌아오면서 잠시도 쉴 틈 없이 한 달 정도 남은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광명시는 민자당 광명시 지구당위원장인 김병용 위원장이 공당의 선거운동을 담당하고 사조직인 민주산악회의 선거운동을 지부장인 내가 관장하며 선거운동을 하게 되었다.

당시 민자당은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독재정치로 일관했던 박정희에서부터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온 32년여 년의 긴 세월동안 군부세력에 길들여진 오랜 여당세력이 75%, 그들의 반대편에서 일관되게 반독재·군정종식을 외치면서 그들과 투쟁해온 민주화세력의 중추세력인 통일민주당 세력이 불과 25%의 지분으로 억지로 합당을 해서 이루어졌다.
 
이처럼 정치철학과 신념이 전혀 다른 오월동주라고나 할까. 얼기설기 모양만 갖춘 여당이었기 때문에 선거운동에도 다수인 75% 당원들의 열기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고, 통일민주당 세력인 민주산악회가 비록 사조직일 수밖에 없지만 공조직인 민자당을 앞질러 극렬한 선거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민주산악회는 거의 민자당의 지구당수와 조직에 맞먹을 만큼 전국 행정구역에 268개의 지부가 있어 선거유세장마다 민자당의 깃발보다도 민주산악회 깃발이 더 많을 만큼 유세장의 열기와 분위기를 압도해 나갔다. 그러다 보니 공조직인 민자당 조직과 산악회 조직이 선거운동 경쟁을 하다가 서로 마찰을 을으키는 일이 종종 벌어져서 중앙당에서 이를 문제삼는 당 간부들이 더러 있었다.

물론 대통령선거 자금의 대부분을 지구당위원장이 관리하여 지구당은 넉넉한 선거자금을 썼지만, 민주산악회는 중앙본부에서 약간의 조달을 받고 회원들이 각자 주머니를 털어 오직 열과 성으로 기어이 민주화를 이룩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선거운동을 전개했으므로 효과 면에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10년을 휠씬 넘긴 요즈음 김영삼 전 대통령께서도 옛날을 회고하면서 정말 그때 민주산악회가 없었다면 대통령 당선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새삼 민주산악회에 대한 무한한 고마움을 말씀하신다.

나는 민병권 사장이 제공한 금산빌딩 4층의 넓은 사무실에 10층에서 2층까지 크고 길게 민주산악회 현수막을 내걸고 민주산악회 3000여명의 회원들과 함께 한 덩어리가 되어 민친 듯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선거운동에 열중했다. 그래서 대통령선거가 끝난 후 광명경찰서에서 불법선거운동을 조사한다고 나와 여러 간부들이 교대로 불려 들어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92년 12월19일 새벽!

드디어 32년을 불고가사하고 갖은 박해와 불이익을 감내해 가면서 반독재, 군정종식을 외치면서 민주화를 요구하며 싸워온 보람을 드디어 우리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도저히 들어볼 수 없을 것 같던 김영삼 대통령 당선! 우리 광명시 민주산악회 3000여명의 회원들은 김영삼 대통령 만세를 목청껏 외치면서 얼싸안고 울었다.

1992년 12월 22일 오후 6시.

민주산악회 광명시 지부는 한복예식장 지하에서 김영삼 대통령 당선 축하의 밤 연회를 가졌다. 장소관계로 핵심 산악회원 300∼4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아내 경옥과 여성간부, 여성회원들이 김밥 등 여러 가지 음식물을 직접 만들어서 적은 예산으로 푸짐한 상을 파여 참으로 성대한 당선 축하연이 되었다.

광명시에서 사회단체를 이끌고 있는 여러분들의 유지들까지 초대해 축사와 격려사까지 하여 한껏 축제분위기를 만들고 산악회원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왕년의 스타 문미봉 여사까지 참석하여 흥을 돋아주었다.
 
청천벽력 같은 민주산악회의 해체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된 지 5일이 되던 1992년 12월 24일이었다. 산악회 본부간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최형우 회장이 침통한 표정으로 사무실에 들어와서 “지금 김영삼 상임고문께서 불러 다녀오는 길인데, 오늘 날짜로 민주산악회 간판을 내리라는 하명을 받고 왔으니 섭섭하지만 오늘부로 민주산악회 간판을 내리겠다”고 선언했다.

우리 모두는 이게 무슨 소리냐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는데, 최형우 회장은 “민주산악회는 사조직이고 우리의 1차 목표인 상임고문의 대통령 당선과 민주화 세력의 정권창출에 만족해야 하며, 이후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의 국정운영에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하야 불가피한 조치임을 이해해 달라”고 설득에 나섰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월계수회 국정폐해를 생각하고, 200여만 명에 달하는 민주산악회 회원들의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월권행위 등을 비롯한 각종 폐단을 미리 막으려는 것이 대통령 당선자의 깊은 뜻이 담긴 조치라고 힘주어 역설했다.

맑은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김영삼 상임고문의 대통령 당선으로 한껏 고무되어 산악회 회원들이 모이는 곳마다 축제분위기였고 그동안의 무용담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중앙, 지부할 것 없이 축하행사를 준비하던 때였으니 그 놀라움과 배신감이 오죽했겠는가! 길게는 30여년을 김영삼 상임고문을 따라 군사독재와 싸우느라고 얼마 안 되는 가산마저 지부운영을 위하여 털어놓으며 천신만고 끝에 얻은 승리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수고했다는 위로의 말,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간판을 내리고 문을 닫으라니 아무리 올바른 국정운영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 해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는 간판을 내리고 사무실을 폐쇄했다. 적어도 대통령 취임을 하고 민주산악회 간부들과 지부장들 만이라고 청와대로 불러 칼국수라도 한 그릇씩 먹이면서 국정운영을 위한 불가피성을 설명한 뒤 이해를 구하고 간판을 내렸어야 마땅한 도리인데, 이를 팽개쳐 버린 것이다. 나는 그래도 당선된 지 사흘 만에 당선축하연을 열어 그동안 수고한 회원들을 위로도 하고 감사의 말도 했으니 그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광명시 보궐선거와 손학규 씨의 공천

1993년 2월 2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광장에서 대망의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나도 초대장을 받고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했다. 암담하던 시절 감히 꿈꾸지도 못했던 기적을 눈앞에 보면서 나는 만감이 서려 눈시울을 적셨고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사를 경청하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며칠 후 윤항렬 의원의 급서로 공석이 된 광명시 국회의원 보궐선거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번 선거에는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통일민주당 공천으로 입후보도 했고 통일민주당 광명시 지구당위원장과 민주산악회 광명시 지부장을 역임하면서 오랫동안 지역기반을 쌓았고, 민주산악회 연수원장을 역임하며 전국에 있는 간부의 연수에 심혈을 쏟아 맡은 바 소임을 다한 노병구 연수원장이 당연히 민자당의 공천을 받을 것이라고, 노병구에게 기회가 왔다고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또 광명시 내에서도 보나마나 노병구가 공천될 것이라고 아무도 경쟁을 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최형우 회장을 비롯한 모든 간부들도 이번에는 노 원장을 공천해야 한다는데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한번은 국회에 일이 있어 들렀더니 당시 국회의장으로 있던 황낙주 의장이 나를 보고 쫓아와 반갑게 맞이하며 최형우 회장에게 말을 들었다고 하면서 꼭 당선되어 국회에 들어와서 함께 일하자고 진심 어린 축하의 말을 했다.

그런데 공천발표 날짜가 다가오면서 이상한 소문과 함께 최형우 회장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왠지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느끼고는, 어느 날 아침 일찍 구기동 최형우 회장 댁을 방문했다.

나는 최형우 회장에게 요즘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냐고 물었고, 최 회장은 분명한 대답을 회피하면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회장님, 이래도 되는 겁니까? 문민정부가 이제 막 출발하는 마다에 지금껏 공생하며 달려온 사람을 제치고 누구를 공천한단 말입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공천을 못주는 분명한 이유를 말씀해주십시오. 적어도 민주산악회 최 회장님께서 제 공천을 책임지셔야 합니다.”

“내가 왜 책임을 져야 합니까? 공천을 내 마음대로 하는 거요? 왜 나한테 그래요?” 성질 급한 최형우 회장은 나중에는 욕지거리까지 하면서 모른다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회장이 모르면 누가 아는 겁니까? 이 문제는 회장님께서 대통령 각하에게 전후사정을 사실대로 말씀드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나도 일생을 바쳤습니다. 이제 공천을 주면 당선이 확실한데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나는 갑니다. 알아서 하십이오.”

그렇게 말하고 나오려는데 최형우 회장의 사모님 원 여사가 나를 붙잡았다. “노 원장님, 이렇게 가시면 됩니까? 들어가셔서 조반을 잡수시고 가십시오. 아침상을 봐놨습니다.” 그렇게 원 여사님의 권고로 최형우 회장과 마주 앉아 아침식사를 하는데, 한참 동안 최 회장과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사만 하는 무거운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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