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박근홍 기자)
국내 재계 순위 1위 삼성그룹의 총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으로 최근 재벌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정치권과 시민사회계를 중심으로 높아지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요체는 비선 실세와 거대 자본가들의 정경유착이고, 이를 혁파하기 위해서는 재벌 대기업에 칼을 대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 등 여야의 유력 대선주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앞 다퉈 재벌개혁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는 실정이다.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들도 이 부회장의 구속을 '재벌개혁의 신호탄'으로 규정하면서 기득권을 향한 비판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개혁 대상이 될 대기업들은 강하게 반발하는 눈치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최근 야권이 재벌개혁을 명분으로 발의한 공정거래법·상법 개정안에 대해 '교각살우(矯角殺牛, 쇠뿔 바로잡으려다 소 죽인다)'라는 거친 표현까지 써 가며 우려를 내비치기도 했다. 재벌개혁이 경제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재계의 이 같은 반응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를 기시감(데자뷔)이 느껴진다. 20여 년 전 YS(故 김영삼 전 대통령)가 재벌개혁을 추진했을 때도 대기업들은 '경제가 어렵다'는 볼멘소리를 늘어놨었다.
당시 문민정부의 재벌개혁 깃발을 높이 들었던 인사는 지난달 13일 별세한 故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였다. 그는 "애국심이 있다면 안으로 들어와서 직접 개혁을 해 봐. 밖에서는 변화와 개혁을 못 해"라는 YS의 부름을 받아 1994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을 역임했다.
박 교수는 2015년 12월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재벌개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재벌개혁은 아직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 부분이야. 기업 회계투명성 제고, 문어발식 경영·순환출자 금지, 은행대출 출자전환, 외부이사제 도입 등 기업지배구조 개혁 작업을 물밑에서 준비하고 있었어. 그런데 중간에 정보가 밖으로 새버린 거야.
개혁정보를 입수한 재벌들이 어떻게 했겠어. 언론을 통해서 압박을 가하더라고. 아직도 생생히 기억해. 1995년 9월 한 경제지가 사설에서 '정신 나간 世推委(세추위, 세계화추진위원회)'라는 제하의 글을 실으면서 "경제가 매우 어려운데 지금 어떻게 재벌개혁을 생각하느냐 정신이 있느냐"는 식으로 주장하는 거야.
그 사설이 나간 이후부터 여러 경로를 통해서 재벌개혁을 포기하라는 압박이 들어왔어. 당시에 나는 재벌개혁뿐만 아니라 사법개혁, 교육개혁 등을 동시에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압박에 적절히 대처할 수가 없었지. 안 되겠다 싶어서 김인호 공정거래위원장한테 부탁해서 재벌개혁 과제를 넘겼어.
결국 재벌개혁은 처음 구상했던 것보다 좁은 형태의 개혁으로 끝난 거야. 재벌개혁은 우리나라 기업과 재벌을 위한 장기적인 개혁이었는데…. 당시 사회 분위기는 이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지. 참 아쉬워"
박 교수의 아쉬움은 결과적으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더 큰 아쉬움을 남겼다. 만약 YS와 박 교수의 재벌개혁이 예정대로 진행돼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었다면 작금의 뿌리 깊은 재벌들의 민낯은 분명 드러나지 않았으리라.
<시사오늘>은 지난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온 나라를 뒤흔들 무렵, 한 토론회에서 박 교수를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당시 박 교수는 재벌개혁에 대해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YS가 말이야,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그랬지. 재벌개혁도 마찬가지야. 새벽과 같은 것이지."
故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를 그리며 창밖을 바라보니 하늘에서 쓸쓸하게 비가 내린다. 그가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났던 날에도 전국 곳곳에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박 교수의 아쉬움이 참 그리운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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