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20 금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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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代 散策] 김봉조, “YS의 정치철학, 소중한 가치”
“1975년 전당대회, 신도환 음모 밝혀”
“2009년 YS-DJ 화해 민주동지회가 주도”
“2012년 대선, YS의 박근혜 지지는 사실”
2017년 02월 25일 (토) 글 김봉조 민주동지회장 / 정리 김병묵 기자 sisaon@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봉조 민주동지회장 / 정리 김병묵 기자)

 김영삼(YS) 전 대통령에겐 분신(分身) 김덕룡, 우(右)형우 이전에 ‘김봉조’가 있었다. 나는 두 사람보다 먼저 YS의 가신으로 들어간 1세대로, 그의 민주화운동과 정치활동 내내 곁을 지켰다. 동지였으며 그림자였고, 좌절과 성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다. 함께 웃고 울었던 영욕의 세월이 떠오른다.

하지만 시간은 무상하다. YS도 떠났고, 오랜 동지들도 나이가 많이 들었다. 내가 민주동지회장을 맡은 지도 어느새 7년이 됐다. 새로운 시대의 발소리가 들리는 지금, 이를 맞이하기 위해 지난 시대의 정리가 필요하다며 2월 22일 기자가 나를 찾아왔기에 옛 이야기를 몇 마디 적어 놓는다.

   
▲ 김봉조 민주동지회장은 YS가신 1세대로, YS의 좌절과 성공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YS 광남빌딩 비서실 책임자가 나

19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과 국민투표법안이 국회에서 변칙 통과됐다. 이에 YS는 ‘40대 기수론’을 꺼내들고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다. 이듬해 열린 신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YS와 김대중(DJ) 전 대통령, 이철승 전 헌정회장이 맞붙었는데 예상을 뒤엎고 DJ가 당선됐다. 1차투표에선 YS가 1위였지만, 과반을 넘지 못하며 결선투표로 갔는데 DJ의 역전승으로 끝났다. 김봉조 회장 이야기의 시작은 그때였다.

YS와의 만남은 1965년이다. 그 해 대학을 졸업하고 당시 원내총무였던 YS의 비서 정태수가 문제가 생겨서 내가 비서관으로 들어갔다. 남자들 한 서너명, 여자들 한두 명으로 구성된 비서실이 총무실도 겸했다. 그렇게 보좌를 시작했다. 그 당시 DJ와 원내총무 경선을 한 4차례 정도 했는데, DJ는 한 번도 YS를 못 이겼다.

그래서 쭉 원내총무실에 있었는데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삼선개헌을 시도했다. 1969년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YS가 강한 톤으로 박정희를 향해서 ‘3선 개헌 하지 말아라. 박 대통령 자신도 불행해지고, 나라도 불행해진다’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3선개헌 저지 발언을 하고 나서 이틀 후에 만약을 대비해서 초상 틀을 짰다. 그 이유가 그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형욱이 고흥문과 골프를 치다가 ‘김영삼이 배에는 철판을 깔았나?’라는 소리를 했다는 거다.

YS는 이것 때문에 초산테러도 당했다. 그날 돌아오는데 상도동 골목길에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데, 보니까 큰 사람이 작은 사람한테 맞고 있는 거다. 그래서 이게 뭔가 하고 시선을 빼앗긴 사이 덜컥덜컥 소리가 나서 보니까 차 문을 열려는 시도였다. YS는 그런데 자동차의 창문을 열어도 조금만 열고, 문을 꼭 잠그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YS가 운전수였던 김영수에게 ‘영수야, 빨리가!’라고 소리쳐서 앞으로 차가 빠르게 나아갔다. 내가 그 자동차를 봤는데 다 녹아서 칠이 벗겨졌더라. 그러니 사람이 뒤집어썼으면 그냥 그대로 죽는 거였다.

그런데 삼선개헌의 정족수를 채우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것이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계였다. 원내에 JP계가 약 17명 정도 됐는데, 이들을 따로 따로 만나서 설득하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 미리 두 세 명 씩 약속을 잡고, YS가 오기 전에 미리 선발대로 가서 곧 온다고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나였다. 삼선개헌을 거의 저지할 수 있겠다 하는 느낌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공화당 쪽에서 반대하는 인사가 예춘호, 김달수 등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 합쳐보니 열 너댓 명이 되더라. 그런데 결국은 박정희의 위압에 JP가 무릎을 꿇어버리면서 3선개헌이 통과됐다.

그러자 YS는 장기집권하는 박정희와 싸워야 되겠다며 원내총무를 그만뒀다. 그러고 무교동에 있는 광남빌딩 사무실을 하나 얻었다. 그 비서실 책임자가 나였다. 그런데 어느 날 금녕김씨 종친회에 갔더니 회장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나를 보고 ‘김 비서관, 수고가 많소. 내 방에 한번 오시오’라고 했다. 당시 김재규는 보안사령관이고, 박정희 정권의 사냥개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안 갈 수도 없고 해서 갔더니 별 말없이 차를 마시며 ‘고생이 많소. 김 총무(YS)가 우리나라에 큰일을 할 거요. 내가 당신 들으라고 하는 소리도 아니고. 내 느낌이 있습니다. 자신 있게 잘 모시고. 김 총무 정치하는데 뒷받침 많이 하소’라고 했다. 나중에 YS에게 보고하니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정치인에게 이런 격려와 덕담은 엄청난 힘이 된다.

나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사심이나 감정적으로 죽인 게 아니라, 나름 역사 앞에 정의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 자세히 밝혀질 거라고 본다. 같은 시기 YS는 그 무교동 사무실에서 40대 기수론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 박정희와 대적해 싸우려면 나이 많은 사람은 어려웠다.

   
YS는 삼선개헌이 되자 원내총무직을 내더진고 무교동에 사무실을 얻어 박정희와 맞섰다고 김봉조 민주동지회장은 회상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원래 김동영·김봉조·최형우 ‘트리오’

1970년 대통령 후보 경선 준비를 할 당시엔 좌동영 우형우가 아니라 나와 김동영, 두 사람이었다. 최형우가 약 1년 후에 뒤늦게 들어오면서 트리오가 된거다. YS 측근으로서 전국 조직을 컨트롤하고 표를 관리하는 총 책임을 내가 다 지고 있었다. 신민당 경선을 앞두고 당수였던 유진산이 ‘투쟁력을 봐서 김영삼이가 낫다’며 YS를 밀었기 때문에 우린 축제분위기였다.

진산계 조직관리는 신동준이 했는데 그래서 우리는 참 친했다. 경선 전날 저녁에 김동영과 내가 견지동에 있는 진산 사무실로 가 보니 신동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지지자 명단과 지방에서 올라온 당원 여비지급 등을 점검해 보니 얼추 맞더라. 그런데 다음날 1차 투표에서 과반수에 21푠가가 모자란 거다. 그래서 2차 투표에 들어갔는데, 이철승 표가 몽땅 DJ에게 갈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가 났을 때 김동영과 나는 단상에 다리가 붙어버렸다.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 때 YS의 당당함에 놀랐다. 우리는 얼어서 몸도 움직이지 않는데 좌석에서 올라오더니 ‘여러분 오늘 이 전당대회는 우리의 승리입니다. 박정희를 이기기 위해서 여러분의 그 함성으로 DJ를 지지한 겁니다. 김대중의 승리는 이 김영삼의 승리요, 바로 여러분의 승리입니다’라고 말하는 거다. 우린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런데 그 한마디가, 단결과 국민에게 주는 메시지가 신선했다. YS가 큰 그릇이구나 하는 걸 많은 이들이 느끼게 하고, 박수와 엄청난 함성으로 당원들을 하나로 묶어줬다. YS가 박정희를 이기기 위한 자기의 정치소신, 그걸 그대로 실천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모든 투쟁의 선봉장은 박정희의 맞수인 YS였지, DJ는 아니었다. DJ는 그런 측면에선 자신의 정치소신과 투쟁이 확고하지 않았다.

박정희 입장에서는 YS보다 DJ가 더 편했다. 영남 대 호남 대결로 가는 게 편했기 때문이다. DJ는 영남에 지지기반이 많지 않지만, 야세가 강한 호남은 박정희보다는 더 YS를 지지할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당시에 심정적으로나 노선적으로 박정희가 나중에 ‘호남인이여 단결하라’이런 걸로 지역감정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또한 진산계의 이재영 같은 경우 원래 YS를 지지키로 했었다. 그런데 이재영 동생이 대림산업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박정희 정권은 대림을 곱게 사업할 수 없게 하겠다고 협박을 했다. YS가 너무 믿었기에 찾아가 항의를 했더니 이재영이 ‘불가항력이었다. 미안하다’라고 답했다.

“김봉조가 허튼소리 할 사람은 아닙니다”

1975년엔 신한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YS외에 다른 사람을 총재로 세우기 위해 접촉했다. 고흥문을 회유하려 했으나 거절당하자 김의택을 밀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그러나 김봉조에 의해 신도환의 부정행각이 폭로당하며, 김의택은 사퇴하고 YS가 총재가 됐다. 그 해에 YS는 박정희와 영수회담을 했으며, 이후 김옥선 전 의원이 국회에서 ‘박정희는 독재자다’라는 발언으로 의원직을 사퇴하는 ‘김옥선 파동’도 일어났다. 이듬해 1976년 신민당은 수습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이철승을 선출했다.

1975년 신민당 전당대회는 선명성 경쟁이었다. YS, 고흥문, 김의택, 정해영 이렇게 나왔는데 내가 아이디어를 냈다. YS가 고흥문과 친하니까 1차에서 한 표라도 많으면 밀어주기로 합의를 했다. YS와 고흥문 둘 다와 친한 김형일 의원을 시켜서 협상 주도를 맡겼다. 고흥문은 자금력이 있기 때문에 자신 있었을 거다.

그런데 대회장에서 문제가 생겼다. 신도환이 사무총장이었는데, 대회장인 국립극장을 오후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거다. 그런데 나는 이미 이게 2차로 갈 것이란 걸 예측하고, 국립극장 관장실 게시판 칠판을 봤는데 이틀 동안 신민당 전당대회만 써 있었다. 다른 일정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사용계약서도 확인하고, 사진으로 찍어두고 있는데 신도환과 정보부 3과장이 관장실에서 나오는 걸 목도했다. 그 과장 이름은 잘 모르지만 귀 한쪽이 이상하게 생겨서 내가 기억하고 있었다. 그 모습도 증거로 사진을 찍었다. 사진기를 믿을만한 당원에게 단단히 맡겨 뒀는데, 아니나 다를까 신도환이 전당대회 연기를 말하는 거다.

그래서 내가 뛰어올라가서 ‘당원여러분, 신도환 사무총장께서 국립극장을 오후에 다른 일정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여긴 중앙정보부가 개입돼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난리가 났다. 청년 당원 몇 명이 나를 잡으려고 올라오고, 몇몇 당원들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올라왔다. 우리는 이날 무조건 2차 투표에 들어가야 했다. 밤에 박정희가 돈으로 공작을 하면 끝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런데 여기서 또 YS는 시원하게 내일로 연기하자고 그러더라. 사실 기가 막혔다. 그런데 다음날 김의택이 사퇴를 해버리더라. 그렇게 최연소 야당 총재가 만들어졌다. 후에 들은 얘기인데 신도환이 이기택, 신상우 등에게 아까 단상에 올라와서 외치던 게 누구냐고 물었었다. 그러니 신상우가 ‘김봉조입니다. YS의 최측근인데 허튼소리를 할 사람은 아닙니다’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신도환이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까 사진을 찍힌 것도 연장선이라 추측했던 것 같다. 그래서 결국은 김의택이 불출마하기로 했다.

설득당했다기 보다는 판세가 이미 기울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과 달라서 당시에는 공화당의 위세와 중앙정보부의 감시에 기가 죽어가지고 낮에는 투쟁하고 밤에는 거래하는 야당 의원도 많았다. 그런 측면에서 YS는 돈에 대해서 자신이 있다고 할까. 공작자금을 받을 사람은 아니란 걸 모두 알고 있었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영수회담 이후 YS의 당내 입지는 흔들렸다. 영수회담에서 박정희가 창밖의 새 한 마리를 보면서 YS에게 하는 말이, ‘김 총재. 저 새가 얼마나 외롭겠어요. 저도 저 새와 똑같은 심정입니다. 내 오래 대통령 할 생각 없어요’였다. 목소리를 낮추면서 울먹이며 그렇게 말하니, YS가 그 말에서 느끼기를 더 이상 독하게 장기집권 할 그런 사람은 아니구나, 하고 믿어버렸다는 거다.

YS에게 박정희가 ‘다음은 너다’라고 했다거나, 남산을 차를 타고 돌며 ‘DJ는 끝났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동교동계에서 만든 악의에 찬 넘겨짚기다. 그렇게 선명성을 부르짖던 YS가 김옥선 파동을 거치고, 조윤형과 갈라서기까지도 박정희에게 어느 정도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유신으로 상도동에서 서너사람, 동교동에서 7~8 사람이 끌려갔다. 나도 그 때 YS의 핵심측근이라고 해서 끌려가 고초를 당하는데, 때리는 거 보니까 죽겠구나 싶었다. 중앙정보부의 리스트에 YS의 밀명을 수행하는 사람이 김봉조라고 나와 있었으니까, YS의 정치자금을 대라고 정말 심하게 폭행했다. 그래도 야당 총재의 비서관인데 아주 인정사정이 없었다. 그런데 결국 YS에게 돈을 줬다고 끌려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은혜를 받은 것도 고마운데 우리가 그걸 고발하면 안되지 않나. YS 스타일이었다. 험한 세월이었다. 박정희에게 상대되는 사람이 없었다. 바른소리 하는 사람은 그 당시에도 YS 혼자였다.

그래서 1976년 이철승에게 당권을 빼앗겼다. YS가 사사건건 반대를 하니까 박정희는 차라리 중앙정보부를 동원해 이철승을 뒤에서 지원했다. 그래서 집단지도체제가 됐고, 이철승은 중도통합론을 제창하기 시작했다. 여야관계도 두리뭉실 넘어가겠다는 주장인데, 대여협상이 일방적으로 여당 하자는 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정책대결도 없고, 야당은 있으나 마나인거다. 야당이 여당의 어떤 정책에 대해서 사사건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은 안 된다. 하지만 이철승은 여당이 하자는대로 반대 없이 가는 것이 통합이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래서 나랑 서석재, 김태룡 등 한 열명 정도가 야당성회복 투쟁위원회를 만들었다. 우리는 성명서를 냈다. ‘이철승 대표최고위원은 그 투쟁성을 선명하게, 확실하게 하고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대표가 돼야 한다’라고 자꾸 목소리를 내니까 이철승 입장에선 자신을 괴롭힌다고 여겼다.

   
▲ 김봉조 민주동지회장은 8대와 10대 두번의 출마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12대 신민당 돌풍 때 국회에 입성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그래서인지 10대 총선 때 이철승이 내게 공천을 주지 않았다. 공천심사위원이 여섯 명 인데, 이철승계와 YS계가 3대 3이었다. 그러니 이철승이 대표권한으로 내게 공천을 안 줘 버렸다. 그래서 YS가 나오라고도 하지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무소속으로 도전했다. 무소속으로 나가니 허황됐다. 나를 지지하는 당원들도 선거운동을 해줄 수 없었다. 2천여 표 차이로 졌다. 그래서 정치규제가 걸렸던 11대 총선을 지나 12대에 처음 원내에 들어갔다. 

사실 그에 앞서, 나는 1971년에 8대 총선에 출마기회가 주어졌는데 선거를 치러보지도 못하고 낙마했다. 31세 때였으니 도전은 비교적 빨랐다. 그 때 여당인 공화당에서 공천이 꼭 돼야 한다는 김주일 씬가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공천을 못받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공천을 받게 됐다. 그러자 지역 여론이 이 때 놓치면 안 된다고 그래서 서둘러서 출마를 했는데, 그 때 국회의원 비서관도 준공무원이라고, 사표를 늦게 내는 바람에 신원조회에서 공직자 선거법 겸직금지에 걸렸다.

투표용지에 이름은 있는데 기호표를 지워버려서 선거를 못 치러보고 사퇴했다. YS에게 아주 혼이 났던 기억이 새롭다.

이철승에게 당권을 빼앗겼던 YS는 1979년에 총재에 다시 선출된다. 이 당시 이철승과 다시 한 번 치열한 경쟁을 벌였는데, 가택 구금 중이던 DJ가 전당대회 전날 중앙정보부의 감시를 뚫고 YS의 단합대회가 열리는 을지로의 중식집 아서원을 찾아와 YS를 지지하면서 판세가 흔들렸다. 이후 1차에서 패한 이기택 전 민주당 대표가 결선에서 YS를 지지하며 역전승을 거뒀다.

1979년엔 다시 YS가 당권을 찾아왔다. 이 역시도 극적이었다. 박정희의 혹정(酷政)이라 할까. 그게 사회 전반에 피로를 안긴 상황이었다. 근로자들을 비롯해 수많은 국민들에게 퍼져있어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상당했다. 이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1차적으로 당권회복이 절실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이기택이었다. DJ도 돕긴 했지만 이기택은 실질적으로 표를 가지고 있었다. 마포에 있는 당사 밖에 당원들이 천 여 명 이상 운집을 했는데, 엄청난 함성이 들렸다. ‘이기택’‘김영삼’을 연호하는 소리에 아마도 자극을 받았던 것일까. 이기택은 20여분 이상을 고심하다 ‘김영삼!’이라고 외쳤다. 옳은 판단을 한 거다. YS도 이기택에겐 서로 눈만 마주치며 정치적인 정의감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기택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처음부터 YS를 지지하려 했다고 했지만, 그 진위도 알 수 없거니와 당시 현장의 우리들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봉조 니는 뭐 하는데 그래 바쁘노”

1979년 박정희 대통령 피살 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신군부가 들어섰다. 이어 1980년에는 정치활동 규제대상자를 발표하면서 야권 정치인들을 탄압했다. 일부는 정치규제에서 해금돼 민정당과 민한당 등에 합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YS와 민주계는 1981년 민주산악회를 만들어 장외 투쟁을 이어나간다.

간혹 내게 민주산악회를 하지 않았다, 투쟁을 쉬었다 하는 소리가 있는데 모르는 이야기다. 민주산악회가 제일 처음 북한산 등산 갔을 때 사진 보면 내가 있다. 그런데 다른 등산에 자주 못갔던 이유는, 정치규제에 묶였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아내가 약사 아니면 교사 하면서  내조를 했다. 우리 집은 나도 집사람도 법학도니 갈 데가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크는데, 공부도 시켜야 하고. 그래서 친구가 하는 종이회사가 있었다. 박스를 만들어서 수출하는 덴데 그래서 내가 물량을 따기 위해서, 소위 ‘오더’를 얻기 위해서, 호구지책을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었다.

그러다가 민산 산행에 가면 나보고 ‘니는 모하는데 바쁘노?’하고 물어본다. 그래서 속으로 ‘그래 나 바쁘다. 내가 박스공장 한다고 해서 니들이 알 리도 없고’라고 말할 뿐이었다. 집사람이 우스갯소리를 하더라. 야당 정치인 할 때는 집을 잘 안 돌보는데, 전두환이 규제로 묶어놓으니까 집을 잘 돌본다는 거다. ‘전두환이가 고마운 사람이다’라는 농담도 들었다.

규제 얘기를 안할 수 없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몇 사람을 규제로 묶지 않고 회유를 했다. YS 직계가 정치에 참여를 하면, 정치를 군부만 하는게 아니고 과거 야당의 민주화 세력도 같이 하고 있다는 선전효과가 있었다. 대변인 출신으로 YS 비서실장을 지낸 박권흠 같은 경우는 민정당으로, 서석재는 민한당으로 갔다. 그래서 문정수가 반말로 비난하고 그랬었다. 나도 박권흠에게 한마디 했다. ‘YS 비서실장이라고 그러면서 그럴 수 있느냐’라고 말했다. 박권흠은 ‘김 위원장, 내가 호구지책으로 갑니다. 취직한다 생각해주오’라고 했다. 박권흠이 후에 ‘그래도 나중에 YS가 민정당과 합치지 않았냐’는 이야기를 하지만 그건 궤변이다.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크게 후보군은 노태우, YS, DJ, JP로 나뉜다. 민주화 세력이지만 단일화에 실패한 YS와 DJ는 결국 각각 출마했고, 2위와 3위에 그치면서 결국 노태우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끝난다. 그러나 YS는 1990년 노태우, JP와 3당 합당에 나섰고 1992년 대선에서 당선되며 문민정부를 열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많은 이들이 YS와 DJ, 양김 단일화 실패를 궁금해 한다. 당시 신민당사가 서울역 뒤에 있었다. YS가 총재고, DJ가 고문으로 있었는데, 군부를 종식시키기 위해선 양김이 단일화를 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그 당사에서 몇 시간이 가더라도 끝장 토론을 하자고 했다. 점심을 설렁탕을 시켜놓고. 오전 10시 부턴가 모두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몇 시간이 지나 다 자기 생각을 말하고 나니 DJ 차례가 됐다. 사실상 단일화 여부가 달려있는 상황에서 DJ가 단상에 올라서 입을 열었다.

‘군부와 싸우고 아스팔트 길에서 최루탄을 마시며, 끌려가고 옥살이를 했던 건 김영삼 총재 아니냐. 나도 외국에서 투쟁했지만 국내 현장에서 제일 고생했던 사람이 YS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라고 까지 말을 마쳤다. 그런데 DJ 비서가 갑자기 쪽지를 한 장 건넸다. 쪽지를 받아 읽은 DJ가 ‘함석헌 씨가 운명 직전인데, 자신을 보고 싶어 하니 을지로 백병원으로 빨리 가 봐야 겠다’라고 말하기에 우리는 다들 큰일이 났다고 빨리 가보라고 하면서 보냈다. 그런데 이는 거짓말이었다. 함석헌은 그 당시 비서와 집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그 자리를 모면하려는 것이었고, 처음부터 DJ는 독자 출마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 김봉조 민주동지회장은 1987년 대선 때 DJ는 아예 독자출마로 생각을 굳혔다는 증언을 내놨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3당합당, 정국혼란 막으려 시작

3당 합당은 맨 처음에는 정국혼란을 진정시키려는 발상에서 시작됐다.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내가 간사였는데,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었다. 여소야대정국인데다 당은 4개나 있으니, 각자 자기들 기반 지역에만 예산을 끌어가려고 떼를 쓰고 싸움이 멈추질 않았다. 협상도 없고 진전도 없고 공회전만 계속되는데다, 또 광화문 거리는 데모로 연일 불바다였다. 그래서 당장의 정국을 안정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다. 대선은 당장 있는 것이 아니고 2년 후인가, 3년 후에 있으니 그 때를 기다려선 늦다.

그래서 내가 YS에게 새벽에 가서 ‘나라 예산을 다뤄보니, 통일민주당은 부산개발만 하려고 달려들고, 평화민주당은 호남고속도로네 하는 것만 고집하고, 공화당은 공화당대로 고집을 피우니 이대로는 안된다. 아무래도 도저히 합의가 어려운 평민당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당이 정부 예산안을 좀 수정해서 통과시켜야 겠다’라고 말했다. 그런 제의를 토대로, 나는 YS에게, 조부영은 JP에게 승낙을 받아왔다. DJ에게는 신상식이 아무리해도 타협이 안 되니 3당이 합의한 대로 예산안을 통과시키겠다는 통보만 했다. DJ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고 한다. 3당 합당은 맨 처음엔 이렇게 정책적인 부분에서 시작된 것이다.

문민정부 출범 후 경남지사 문제로 YS와 나와 싸웠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김혁규 경남지사라고 있다. 1995년에 첫 지방선거가 치러졌는데 김혁규가 1994년에 와서 당시 경남도당위원장이던 내게 물었다. ‘형님 내년에 나옵니까’라기에 내가 ‘내가 왜 지사를 나가’라고 답했더니, ‘그럼 형님 저 쫌 만들어주이소’라고 이야기하더라. 당시 중앙정치에 있다가 지방도백에 가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선거를 도와줬다. 김혁규는 경남지사에 당선됐고. YS와 나 사이에 이 과정에서 마찰이 일어나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당시 다른 YS 측근 몇몇이 내가 대통령 말을 안 들었다는 식으로 몰아갔다. 나를 경남지사로, 차남 김현철을 거제에 안배했다는 이야기였는데, 실제로 YS가 그런 내용을 내게 이야기했으면 거절 못했을 거다. 전혀 그런 이야기가 오간 적도 없으며, 그건 나를 깎아내린 것에 불과하다.

1997년 대선에서는 YS의 민주계가 분열하면서 이회창이 후보가 됐다. 민주계 인사였던 이인제 전 경기도지사가 이탈하며 3자구도가 됐고, 결국 DJ가 당선되면서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1997년 대선을 앞둔 민주계의 분열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자면, YS같은 구심력 있는 민주계 인사가 없었다. 당시 나는 마사회장으로 가 있었기 때문에 정치의 핵심에선 한 발 물러서 있었는데, 내 주장은 YS 정치철학을 계승,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을 내 놔야 한다는 거였다. 몇 시간 며칠이 걸리더라도 그런 사람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이회창은 아니었던 거다. YS가 감사원장, 총리, 당 대표까지 시켜줬지만 YS 정신을 계승하지 못해 낙선했다.

개인적으로는 이수성이 오히려 그럴 수 있지 않았나 싶었다. 결정적으로 대선에선 민주계의 분열도 있었지만 JP와 YS가 헤어져서는 안 되는 거였다. 당시 최형우와 김현철 등이 JP를 쫓아내다시피 한 건데, 결국 이게 DJP연합이 돼서 돌아와 정권을 뺏기지 않았나. 개인적으로는 김현철은 정치할 자격도 있고, 충분히 능력도 있다고 본다. 한 번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긴 하다.

1997년 대선이 다가오는데 내가 YS를 만나러 가서 ‘이번 선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했더니, 잠깐 생각하던 YS가 ‘김 의원, 정권이란 건 이렇게 좌로 우로 왔다갔다하는 것도 괜찮지 않아? 이것도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가는 거 아이야(아니야)?’라고 답했다. 이미 여론 향배가 이회창에겐 불리한 것을 아는 것 같았다. YS는 마지막까지 중립을 지켰다고 봐야 한다.

   
▲ 1997년 대선 때 YS는 마지막까지 중립을 지켰다고 김 회장은 말했다. 또한 당시 민주계 분열보다는 YS 같은 구심점 있는 인사가 없어 정권재창출이 실패했다고 전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YS-DJ 화해의 가교 역할

오랜 시간 대립을 이어온 YS와 DJ의 화해는 2009년 DJ 서거를 앞두고서 이뤄졌다. 입원한 DJ를 찾은 YS가 악수를 했고, 문병 후 기자들의 질문에 ‘화해한 것으로 봐야한다’고 답하면서 공식적으로 두 사람의 화해가 이뤄졌다.

민주동지회를 하면서는 2009년 여름에 서강대학교 강정인 교수가 신촌 거구장에서 ‘YS와 DJ가 이 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해 놓고 둘이 서로 등진다는 것은 국력소모’라고 말했다. 대단한 이야기였다. 다음날 상도동에 가서 강정인 교수의 이야기를 하면서 ‘두 어른이 이나라 민주화, 현대화에 큰 공을 세워놓고, 둘이 등을 지고 있으니 나라의 화합과 소통의 분위기가 잘 생성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야기를 들은 YS가 날 가만 보더니. 말은 옳은 말인데 실행하려니 여전히 내키지 않는 게 있어 보였다. YS는 1987년 단일화 하차 때도 사심보다 대의가 더 컸고, DJ에게 연정도 계속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DJ가 시쳇말로 ‘등친다’고 할까. 정치적 배신을 자꾸 하니까 YS의 마음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서 DJ가 일주일에 두 번씩 하던 투석을 하다 병원에 입원했다. 그래서 DJ 서거 전에 찾아간 게 두 사람 화해의 첫 신호였다. DJ 서거 후에는 장례식장도 YS가 제일 먼저 갔었다. 둘이 등을 돌려가지고, 서로 상대를 비하하고만 있어서는 안 되겠구나 했던 것이다. 그렇게 역사적인 화해가 이뤄졌다. 민주동지회가 아니면 이런 역할을 할 곳이 없다.

박근혜, 당선후 제일먼저 YS에게 감사 전화

YS와 민주동지회가 지난 대선의 박근혜 대통령지지 전말도 이 참에 분명하게 밝히려 한다. 대선 한 달 전 쯤 김무성, 박관용, 김덕룡, 나 이렇게 네 사람이 두 시간 넘게 저녁을 먹으면서 이번 대통령 선거를 어떻게 할 것인지, YS에게 건의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나눴다. 김덕룡만 부정적이고, 나머지 세 사람은 박근혜 외엔 대안이 없다는 의견이었다. 그래서 내가 다음날 아침에 상도동에 들어가서 YS에게 설명을 했다. ‘비록 박근혜 아버지 박정희가 우리의 정적(政敵)이었지만, 연좌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중도 보수세력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도 딱히 없으니 그렇게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YS도 듣고 ‘그렇제. 내가 기자들 한번 다 모아놓고 이야기 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당시 YS가 건강이 좋지 않아서 정신도 좀 흐리고, 기자회견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3일 정도가 지나도 소식이 없기에 물어보니 ‘김 의원 니가 해라’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새누리당 중앙당사로 가서 발표를 했다. YS가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았는데 우리 민주동지회가 맘대로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건 호도다.

만약 그랬다면 YS가 그 이후로도 2년 넘게 더 살았는데 나를 가만 뒀겠나. 박근혜가 당선 후 가장 먼저 감사하다고 전화한 분도 YS였다. 하지만 이 순간에 박근혜를 지지했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박근혜는 탄핵을 당하고 있는데,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이건 역사고 국민의 심판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역시 ‘내가 그 사람을 믿었는데 속았다’ 이런 말은 할 필요도 없다. 변명과 무능의 극치일 뿐이고, 그래서 심판받는 것이다.

YS 정치철학 이어져야

YS의 정치철학은 자유민주주의, 투철한 안보관, 시장경제였다. YS는 권력 의지는 있었을지언정 사심은 없었다. 마지막에 선대부터 내려오던 유산 전부에, 집까지 사회에 환원해버리지 않았나. 그리고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는 동교동계 사람들도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다. 지금 YS의 문하생들은 김무성, 정병국 등이 남았다. 야당에선 김영춘 정도다. 다음 대선에선 최근 너무 잊혀지는 것 같은 YS의 정치철학을 어떤 후보든 간에 이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병묵 기자 sisaon@sisaon.co.kr이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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