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2월 9일자로 1973년 2월 27일에 제9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한다는 공고가 붙었다. 공천장을 받아 선거관리위원회의에 입후보 등록을 마치고, 선거사무장에는 흑석동에 살면서 평생을 민주화운동에 몸 바쳐 고집스럽게 어려운 야당생활을 하고 있던 영등포 갑 지구당 부위원장 상덕식 씨를 위촉했다. 그리고 사무실 간사로는 민주당 시절부터 지구당 간사일을 맡고 있던 김동우 씨를, 여성부장에는 주종례 씨를 위촉하고 선거운동에 들어갔다.
 
 

 
선거운동을 시작하자 중앙당에서 원외 출신 후보에게만 주는 10만원을 지원받고, 원근의 일가친척 친지들에게서 성금과 물품이 적잖이 답지했다. 장오룡 누님은 유진산 총재님이 나에게 쓰라고 주신 만큼의 많은 돈을 선뜻 내놓으면서 더 많은 돈을 주지 못하는 것을 대단히 미안해했다. 누님은 자신이 기업을 하는 사람이라서 여당 쪽에 알려지면 곤란하니 우리 둘만 알기로 하고 선거운동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하고 안타까워했다.

왜정 시절 중국 상해에서 주먹 하나로 이름을 날리고 해방 후 귀국해 김두한, 이정재 두 사람이 형님으로 모셨던 시라소니 선생도 내 선거사무실을 찾아와 나를 격려하고 내 선거운동을 자처하고 나섰다.
시라소니 선생은 유진산 총재의 비서 겸 경호를 맡았던 이형호 씨가 형님으로 모시던 분으로 나와 이형호 씨가 친하다는 말을 듣고 나를 돕기 위해서 찾아왔는데, 그때는 착실한 크리스찬이 되어 교회에서 집사직을 맡고 있다고 들었다.
그때 나를 도왔던 분들의 이름을 거의 다 잊어버렸는데 아는 분 몇 분의 성함을 여기 적는다.

제재옥, 권오륜, 박건용, 오중환, 장수익.
정견발표회도 없어지고 그 넓은 지역에 합동연설회만 네 번인가 밖에 없어 주로 악수로 선거운동을 했는데, 나와 함께 다니면서 운동기간 중 내 빈자리를 잘 메워준 장승훈 부장이 시종 열심히 해주었다.

유신선거법은 선거운동원증을 가지고 있는 제한된 몇 사람만 선거운동을 할 수 있게 규정하고 있지만, 운동원증을 가지고 있더라고 운동의 제한규정이 너무 혹독했고, 거기에다가 경찰과 공무원, 기관원 등이 따라붙어 선거사무장조차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선거사무장에게도 오는 사람 접대나 하며 사무실이나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반면 공화당후보의 선거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국가권력의 무한한 보호 아래 무슨 짓이든 무법천지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선거가 유신선거였다.

그러니 실질적인 선거운동은 나와 처 경옥이 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에 사무실에 들러 그날의 일정을 살피고 장승훈 동지와 함께 거리로 나가 지나가는 사람 아무에게나 악수를 청하며 “제가 신민당 공천을 받고 국회의원에 출마한 노병구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면서 하루종일 쉴 새 없이 걸어 다녔다. 경옥도 신길동교회에 다니는 홍복 권사님과 최일순 이모와 함께 거리로 나가 아무나 붙잡고 “이번에 국회의원에 출마한 노병구의 아내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하면서 운동을 하고 다녔다.

어느 날, 하루종일 거리를 헤매다가 밤늦게 사무실로 돌아와 놀라운 보고를 들었다.
“방금 들어온 소식인데, 사모님께서 봉천시장에서 노량진경찰서 수사과장에게 연행되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보고를 받고 즉시 노량진경찰서 서장실로 직행했다.

“여보시오, 서장. 내 아내가 수사과장에게 연행되어 왔다는데 무슨일로 연행을 했습니까?”
서장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알아보겠다고 하고 수사과에 전화를 건 뒤 말했다.
“사모님께서 선거운동원증이 없이 선거운동을 해서 모셔다가 조사중인데, 곧 모시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서장님, 어떻게 운동을 했는데 선거법 몇 조에 위반되었단 말입니까?”
“사모님께서 운동원증 없이 봉천시장을 돌며 불특정 다수인에게 ‘노병구의 아내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여보 서장, 당신 같으면 당신이 출마를 했는데 부인이 그 정도의 말도 안 하고 다닌다면 그걸 마누라라고 데리고 사시겠소? 극히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행위를 억지로 법에 걸어 탄압하지 마시오. 수사과장 좀 오라고 하시오 내가 따져봐야겠소. 이것은 명백한 경찰의 선거 탄압이오.”
“후보님, 지금 수사과장은 자리에 없습니다. 제가 잘 말하겠습니다. 지금 사모님을 모시고 가십시오.”
그래서 아무 일도 안 되는 것으로 경옥과 함께 다른 두 분을 모시고 돌아왔다.
 

 
“이게 무슨 사건이라고 소환장을 보낸단 말인가”

그런데 선거가 끝나고 3~4개월 후에 검찰청 영등포지원에서 소환장이 날아왔다. 나는 박한상 의원에게 사건을 맡겼는데, 소환장에 적힌 사건내용을 보고 “이게 무슨 사건이라고 소환장을 보내고 재판을 한단 말인가? 재판을 하면 그래도 법원은 아직 양심이 좀 남아 있어서 틀림없이 무죄가 될 테니 걱정 말고 나한테 맡기게.” 했다.

검찰 심문이나 법원의 재판정 심문에서도 사건내용은 “노병구의 아내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하는 똑같은 내용인데, 판사는 운동원증 없이 한 선거운동이라고 판정해서 경옥에게 6개원 징역에 1년 집행유예를 선고했고, 홍복동 권사에게도 운동원증 없이 불법선거운동을 하는 사람을 수행한 것이 죄가 된다고 똑같이 6개월 징역에 1년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판결 후 박한상 변호사와 나는 말도 안 되는 판결이라고 고등법원에 상고를 했다. 그러나 고등법원에도 양심은 없고 유신정권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무법권력만이 난무할 뿐이었다.
2심에서도 1심과 똑같은 판결을 받은 나는 대법원까지 상고를 하자고 했는데, 박한상 변호사는 정치관계에 관한 한 대법원도 양심은 없고 모든 법관이 정보부의 꼭두각시라는 것이 이 사건으로 드러났으니 더 이상 힘 낭비를 하지 말자고 해서 그만두었다.

많은 사람들이 음으로 양으로 나의 당선을 위해 수고했지만, 그중에서도 봉천동에서 홀로 아이들을 키우며 반듯하게 사시던 여성부장 주종례 여사는 보따리에 생필품을 이고 이집 저집을 샅샅이 다니면서 물건도 팔고 내 선거운동을 했다. 개표할 때 보니 그 투표구에서 다른 투표구에 비해 월등히 많은 표가 쏟아져 나와서 한 사람의 열성적 운동원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주 여사에게 늘 감사하며 살고 있다.

18일간의 선거운동이 끝나고 개표를 시작했는데, 우리 쪽 개표감시자로는 도봉구에서 한나라당 공천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했고 그 지역 위원장으로 있는 백영기 씨가 들어갔다. 투표함을 개함할 때마다 사전에 공화당후보에게 투표를 한 2~3백 장씩의 묶음표가 책다발 처럼 뭉치로 쏟아져 나왔다. 투표함이 개함될 때마다 “또 나왔다!” 하는 백영기의 절규가 개표장을 압도했다.

개표는 중단되었다. 거기에도 양심은 없었다. 현직판사가 선거관리 위원장인데, 민주주의를 도둑맞는 그 현장에서 도둑을 잡을 생각은 애당초 없고 “그 뭉치만 따로 두고 나머지 표만 계산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나와 백영기는 싸웠다. 몇 시간이나 개표를 중단시키고 문제를 삼았지만, 다른 후보 측과 개표종사원 또 그 안에 모든 사람들이 유신정권의 위압에 눌려서 아무 소리 못하고 선거관리위원회의 말대로 빨리 개표를 끝냈으면 하는 태도였다.

언론도 잠을 잤다. 그 개표장에는 언론 기자들도 있었을 텐데 모두 끌 먹은 벙어리였다. 김수한 의원도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선거를 주관하는 선거관리위원회와 언론이 양심의 소리를 못 내고 유신권력에 늘려 그들이 하는 대로 앞 다투어 충성하려고 얼굴에 철판을 깔고 대드는 데는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아무도 편드는 사람은 없었다. 유진산 총재가 사전에 말씀하신 대로 어차피 당선이 어려운 선거였는데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고 해서 유신정권이 달라질 수도 없으니 “이쯤 해서 묶음표가 나온 투표구 선거관리위원회를 문책하라는 내용을 선거관리기록부에 남기고 개표를 진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선배 몇 분의 권고를 받아들여 개표를 진행했다. 그후에도 여러 투표함에서 묶음표가 쏟아져 나왔다.

9대 유신 총선거는 이름만 자유선거였을 뿐 유신정권의 각본에 따른 형식적인 선거였다. 법이 살아 있다면 당연히 선거무효 선고를 받고 재선거를 해야 마땅한 선거였다.
최소한의 돈으로 치른 선거였지만 넉넉지 못한 내 경제력으로는 기둥뿌리가 빠지는 선거였다. 결과는 김수한 의원이 1위를 하고, 전 보건사회부 장관 출신인 정희섭 씨가 2위로 당선되었다. 투사로 이름이 쟁쟁했던 김선태 전장관이 3위, 그리고 내가 김선태 씨와 별차이 없이 4위를 해서 2만여 표를 얻었고, 그 밖에도 두 사람이 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