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상극모순구조, 상생평화구조로 바꿔야"
"분단광복 아닌 통일광복이 하늘이 주신 소명"
▲ 한반도평화회의 김선적의장이 통일 광복에 대한 소신을 밝히고 있다.<환타임스=김철수기자> ©시사오늘 | |
“한반도에 65년 전부터 설치된 세계 패권세력의 상극모순구조를 환단신대의 천법인 상생평화구조로 상승전환 시켜야 합니다.”
한반도평화회의 김선적 의장의 ‘평화론’이다.
올해 한반도평화회의 출범 20주년을 맞아 13일 <환타임스 초대석>에 자리한 김 의장은 인터뷰 내내 ‘한반도 평화’, 나아가 ‘인류 평화’에 흔들림 없는 집념을 표출했다.
김 의장은 ‘남북으로 갈린 한반도 분단’의 근본 원인을 자유세력권과 공산세력권의 패권다툼으로 요약했다.
개인의 이기적 ‘자유’를 내세우는 미국 중심의 자유세력권과 사회의 독점적 ‘평등’을 내세우는 구(舊)소련 중심의 공산세력권이 각기 자기 세력의 전초기지로 삼기 위해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했다는 것.
따라서 ‘한반도 통일과 평화’를 위한 해법도 자연히 이들 양 세력의 상극모순구조를 제거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김 의장이 그리는 한반도평화의 궁극적 그림인 ‘상생평화구조’는 ‘평화의 영역’이 한반도를 뛰어넘어 전 세계로 향한다는 점에서 각별한 무게감을 지닌다.
김 의장은 “한반도는 현재 인류세계 모순구조의 집약된 축소판”이라고 전제, “한반도의 이 모순구조가 분쟁논리로 연장되는 것은 제 2의 동족상잔은 물론 온 인류를 파멸로 밀어 넣는 제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이 같은 연장선상에서 그는 “한반도에 상생평화구조가 들어서는 것이 제 3차 세계대전의 구조적 모순을 미연에 해결하고 인류평화를 이루는 대도(大道)”라고 단언했다.
인류 평화를 이룰 수 있는 한민족의 역량에 주목
그는 이와 관련, ‘인류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우리 한민족의 ‘역량’에 주목한다.
우리 민족은 뿌리 얼이자 사상인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를 1만년이상 지켜오고 있는 ‘평화민족’이라는 독보적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것.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사상은 세계 어떤 민족에게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평화사상’이다.
그런 만큼 우리 민족은 인류사에 점철돼 온 전쟁의 모순 구조를 평화의 화합구조로 탈바꿈시키는 ‘세계 평화의 천군(天軍)’으로서의 DNA가 있다는 얘기다.
그가 ‘상생평화구조’를 환인(桓因)부터 환웅(桓雄), 단군(檀君)으로 이어지는 ‘환단(桓檀)시대의 천법(天法)’으로 역설하는 것도 같은 맥락.
여기에다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분단의 체험’도 결과적으로 인류평화를 이루는 우리 민족의 역량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 김 의장의 믿음이다.
“세계 모순의 축소판인 한반도의 문제는 글로벌시대 세계평화의 과제로서, 그 해결책도 극명하게 이 땅 위에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의(天意)는 한반도를 우주중심 만세낙토(萬世樂土)로 삼고 한민족을 평화세계 창건의 중심축으로 삼으셨다"고 포효하는 김 의장은 어떤 연유로 ‘평화’에 몰입하고, 그 구체적 해법을 ‘환단시대’에서 찾을까?
“내 한 평생 나라를 찾는 일에 이 한 몸을 바치자”... 유서를 남기고...
그 답은 ‘김선적의 어린 시절’에 녹아 있다.
지난 2005년 6월 15일 세상에 선보인 김 의장의 저서 ‘대천명(大天命)’에는 일제 말기와 직후의 해방정국 때 그가 겪었고 목도했던 상황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아버지·어머니.
불효자 선적이 이 글을 남겨 놓고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을 부디 용서하십시오.
부모님의 곁에서 제가 생을 보낸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남의 나라에 의해 목숨을 부지해 움직이고 있는 망국노의 신세이오니 어찌 효자라 하겠습니까? 용서해 주십시오. 나라를 되찾을 방법을 찾아서 기약 없이 떠나오니 저를 단념하시고 찾지 말아 주십시오...“
1943년, 17세의 어린 아들 김선적이 남긴 유서의 한 대목이다.
그때 그는 “조국을 찾자. 내 한 평생 나라를 찾는 일에 이 한 몸을 바치자”고 결심하고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한 길로 세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한 가지는 우리 민족에게 전해 내려왔다는 진리를 꿰뚫을 수 있는 신통력을 배워 발휘하는 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일본의 군사전략을 알아내어 민중봉기를 일으키는 것, 나머지 한가지는 중국 상해에 있다는 임시정부에 가서 독립운동 대열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중 첫 번째 길을 택하기로 하고 부모님께 유서를 남긴 것이다.
곧바로 집을 떠난 그는 스승을 찾아 금강산을 거쳐 계룡산 갑사를 찾아가 주지 스님께 “공부하러 왔습니다”하고 배움을 청했으나, 스님이 “미안하다”며 ‘수상한 자는 즉각 신고하자’라고 써 붙인 일본 경찰서의 표어를 가리키는 상황까지 겪은 끝에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
숙명처럼 평화를 일생의 화두로 들게 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 김선적의장은 어린 시절부터 숙명처럼 평화를 일생의 화두로 들게 했다고 말했다.<환타임스=김철수기자> ©시사오늘 | |
아직은 어리다고 할 나이에 결행한 그의 ‘1차 시도’는 그렇게 무위로 돌아갔지만, 그에게는 숙명처럼 ‘평화’를 일생의 화두로 들게 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집에 돌아온 뒤 뜻을 같이 하며 서로의 장래를 의논하던 형뻘 되는 동지로부터 상해 임시정부 요인 한 사람이 신분을 숨기고 서울 정릉에 있는 매국노 이완용의 전첩 집 뒷방에 숨어 지내고 있다는 기밀을 알게 된 것이다.
김선적은 그 말을 듣자마자 그 집으로 달려가 의분을 토해냈다.
“아무리 숨어 계실 데가 없더라도 이렇지. 이 집에 왜 계십니까? 제 집도 같은 정릉이고 계실만한 방도 따로 있으니 저를 따라서 당장 이 집을 떠나 제 집에 가시지요.”
그 선비는 ‘어린 김선적’의 제의에 선뜻 응하지 않았다.
“고맙네. 그런데 내가 어떻게 학생 말만 듣고 따라 갈 수 있겠나?”
그 때 나이 18세였던 김선적은 “아! 어린 내 모습을 보고 미덥지 않아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집으로 줄달음쳐 부모님께 “제가 다시는 집에서 떠나지 않게 하려면 한문공부를 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한 뒤 부모님과 함께 다시 그 선비를 찾아가 두분 내외를 집으로 모시기에 이르렀다.
그 선비는 바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성제 이시영 선생의 맏아들 이규봉 선생이었다.
이시영 선생 부자와의 인연... 독립에서 민족 →통일 →평화로 고민 진화
그때부터 김선적은 이규봉 선생으로부터 맹자에 관한 가르침을 받으면서 ‘독립’에 대한 고민을 본격화하게 됐다.
이어 2년 후 광복이 되면서 환국한 이시영 선생이 낙원동에 자리 잡은 자택의 안방을 본인이 쓰고 건넌방을 김선적에게 쓰도록 하면서 ‘어린 김선적’의 고민은 민족의 통일로 한 단계 진화하게 됐다.
당시 이시영 선생은 종일 자택을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느라 분주했지만, 거의 매일 밤이 되면 김선적에게 한민족의 역사와 혼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던 ‘민족 역사의 스승’이었다.
“나는 이시영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 역사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즉 식민사관 대신 한민족의 정사(正史)를 구체적으로 접할 수 있었으며 또한 단군께서 올바르게 내리신 말씀이 와전되어 잘못 알려진 것도 바르게 알려주셨다”는 것이 그의 회고다.
특히 김선적이 후일 대종교 종무원장으로 ‘통일광복운동’에 투신한 것도 이시영 선생의 영향이었다.
일제치하에서 임시정부가 지속적으로 존립할 수 있도록 국내와 만주 일대 30만명에 이르는 대종교인들이 임시정부를 후원한 사실, 이들이 대종교 원로원장이던 이시영 선생과 그 형인 이회영 형제가 지원한 독립운동자금으로 ‘신흥군관학교’를 세워 항일독립군 장교를 양성한 사실 등을 이시영 선생을 통해 알게 됐기 때문.
김선적이 연희대학교(현 연세대학교)를 간 것도 이시영 선생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이 같이 남다른 학생시절을 보낸 그가 독립과 민족 그리고 통일의 단계를 거쳐 궁극적으로 평화에 몰입하고, 그 해법을 ‘환단시대’에서 찾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겠다.
분단광복이 아닌 통일광복으로 가야 한다... 흔들림 없는 발걸음
▲ 1992년 통일광복의 민족지도자 김선적의 족적이 비장하게 새겨지기 시작했다. <환타임스=김철수 기자> ©시사오늘 | |
그는 그 후 1965년 발족한 7대종교협의회의 사무처장을 맡은 것을 기점으로 ‘통일운동’에 전면적으로 투신했다.
‘평화’와 ‘민족’을 양축으로 삼은 통일 이론서 ‘통일론’을 저술한 것도 그 시기다.
1987년 ‘일체민주당’을 창당, 총재를 맡아 그 해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에 전격적으로 출마한 것은 세간의 시각으로는 ‘엉뚱한 짓’이었을지 몰라도 그로선 “환단시대의 천법인 상생평화구조로 한반도가 전환돼야 한다는 깨우침을 전 국민과 공유”하려는 ‘고민의 산물’이었다.
통일에 대한 그의 지론은 ‘분단광복’이 아닌 ‘통일광복’으로 함축된다.
우리 민족이 일제치하에서 벗어났지만 남북으로 분단된 현 상태는 광복이 아니며, 남북이 통일됐을 때 진정한 광복이라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분단광복은 이분법으로 모순 대립하고 있는 세계가 그 양극의 축소판으로 한반도를 전초기지로 삼은 것을 뜻한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그 양극의 이념과 체제를 극복하고 제 3의 이념체제인 자유와 평등을 기초로 세계 모순을 상생평화로 통합하는 것이 통일광복이란 의미.
이런 흐름에서 김 의장은 1990년 3.1절을 계기로 남한의 7대 종단을 아우르고 각계 지도급 이낫 110명이 참여한 ‘통일광복민족회의’의 발족을 주도했다.
이 지점에서 ‘통일광복의 민족지도자 김선적’의 족적이 비장하게 새겨진다.
1992년 공식 출범한 ‘통일광복민족회의’라는 이름도 직접 지은 그는 이 조직을 바탕삼아 ‘통일을 위한 남북 공통분모’를 형상화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통일광복민족회의를 바탕삼아 첫 남북공동 개천절 행사 추진
그 결과 탄생한 작품이 ‘남북공동 개천절’행사.
“종교가 국민을 통합하지 않고 국민정신을 나눠놓고 있는데다, 민족은 남북으로 갈라져 있으니 이를 하나로 모으려면, 우리 민족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이런 뜻으로 남북 공동의 개천절 행사를 갖자는 그의 제안은 통일광복민족회의의 최대 의제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북한이 평양에 단군릉을 조성하고 개천절을 기념하게 된 ‘역사적 도화선’이다.
김 의장의 이 같은 구상이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은 아니다.
앞서 1988년 대종교 종무원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남북공동 개천절’의 밑그림을 그리고 대종교 차원에서 대북 접촉을 시작했던 것.
마침내 그의 집요한 의지는 북한 김일성 주석과 그 후계자 김정일 위원장의 동의를 이끌어내며 1994년 평양 단군릉 조성이라는 결실을 맺게 됐다.
통일광복민족회의 의장으로서 중국 심양 등지에서 김 주석과 김 위원장의 비서 등 핵심 측근들을 만나 단군 관련 책 100여권과 일제시대인 1936년 평양의 단군릉을 보수했다는 동아일보 사진및 자료 50여편을 전달하는 등 정성을 다한 결과였다.
김일성 주석 "단군은 살아 있는 역사"... 하지만...
▲ 김선적 의장의 제안을 북한 지도부가 받아들여 1994년 평양에 조성된 단군릉 전경. <사진=평양단군민족통일협의회 자료집> ©시사오늘 | |
여기에서 김 의장이 전한 비화 한 토막.
북측 인사들이 김 의장과 접촉한 내용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김 주석이 평양 단군릉 조성과 남북 공동 개천절 행사를 수락하자, 한 사람이 “단군은 신화 아닙니까?”라고 의문을 제기한데 대해 김 주석이 즉각 “단군은 실제적인 사실이다. 살아 있는 역사다”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또 김 의장이 백두산에서 남북 공동으로 ‘한반도평화선언’을 하자고 제의한 것과 관련, 측근들이 미온적 반응을 보이자 김 주석이 “직승기 타고 올라가면 되지”라며 질책했다고도 한다.
나중에 북측 인사들로부터 이 얘기를 전해 들었다는 김 의장은 “김 주석이 민족 역사에 대해 바른 인식을 가졌던 것 같다”면서 “직승기는 헬리콥터를 뜻한다”고 <환타임스>에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1994년 10월 3일 김 의장 등 남측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북한에서 평양 단군릉 준공식과 함께 해방 이후 첫 개천절 행사를 열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의 북 폭격설이 비등할 정도의 위기 상황이 한반도를 덮으면서 김영삼 정부가 남측 인사들의 북한행을 불허했기 때문.
이로 인해 북측에서 김 주석, 남측에서 안호상 박사가 공동으로 제주를 맡고 김 의장이 고천문을 올리기로 한 북한의 개천절 천제 행사는 당초 예정됐던 날보다 8일이 지연된 끝에 북측 단독의 단군릉 준공식만으로 축소됐다.
“우리 민족으로선 두고두고 참으로 아쉬운 일”이라고 곱씹는 김 의장은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음해인 1995년 4월 14일(음력 3월 15일) 어천절을 맞아 대종교 총전교를 맡고 있던 안호상 박사와 함께 북한으로 향했다.
냉전의 장벽에 부딪히고... 옥고의 수난도 겪고
▲ 평양 단군릉을 찾은 김선적 의장(왼쪽)과 안호상 박사, 북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 류미영 위원장. ©<평양 단군민족통일협의회> 자료집 | |
그러나 이것 역시 정부가 가로막아, 평양 단군릉에서 어천절 제례를 거행하고 남한으로 돌아온 김 의장은 불법입북에 따른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김 의장은 항소심에서 실형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자유의 몸이 되긴 했으나 이후 그에게는 무려 15년 세월에 걸쳐 ‘한국 사회의 부적격자’ 취급을 받는 고난이 이어졌다.
그가 옥고를 겪으면서 통일광복민족회의도 와해의 수순을 밟게 됐고, 이를 막기 위해 이항녕 박사와 김국주 광복회장, 이원범 위원 등 뜻을 함께 하는 민족 지도자 20여명으로 비상 상임위를 꾸리기도 했으나 의장직이 사실상 외부의 힘에 의해 박탈당한 상태에서 현실적으로 역부족이었다.
통일광복민족회의의 맥 이은 한반도평화회의 출범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김 의장이 아니었다.
2006년 8월 통일광복민족회의의 맥을 이은 ‘한반도평화회의’를 출범시키고 비상시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의장으로 추대돼 “한반도에 설치되어진 세계 전쟁상극구조를 평화상생구조로 탈바꿈하게 함으로써 한반도를 세계평화 창출의 요람의 땅으로 삼는다”는 ‘한반도 평화선언’을 세상에 천명하고 나선 것이다.
김 의장은 지난 2007년 남한에서 열린 ‘단기 4030년 개천절 민족공동행사’의 명예대회장으로 추대되는 등 민간 차원에선 일찌감치 ‘통일광복운동의 선구자’란 평가를 받았지만, 올해 실로 오랜만에 정부 개천절 기념식에 초청받아 본인의 표현처럼 “해금”된 시점을 맞았다.
더불어 김 의장은 올해 음력 10월 3일 개천절에 맞춰 ‘조국통일·평화조성 45주년 대국민 보고대회’를 갖고 ‘통일광복’의 의지를 재천명할 예정이다.
그가 통일론을 저술하고 마니산에 올라 대광명을 접한 1965년부터 45년간 계속돼 온 통일광복과 한반도의 세계평화기지화를 향한 실천 행적을 전국민과 공유하는 뜻이 담겼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20대의 건강함 자랑... 도인(道人)의 풍모
▲ 김선적 의장은 민족선도 수행으로 84세의 고령에도 20대 젊음 못지 않는 건강을 자랑한다. ©김철수 | |
1926년생인 김 의장은 올해 만 84세의 고령.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하는 것도, 듣는 것도 20대 젊음 못지않는 건강함을 자랑한다.
더욱이 같은 연령대로선 보기 드문 180센티미터의 큰 키에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웃음과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모습에선 ‘도인(道人)’의 풍모가 나타난다.
그래서일까?
아무나 쉽게 감당 못할 숱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노익장’을 과시할 수 있는 것이!
그렇다면 건강비법은 무엇일까?
김 의장은 답은 “매일 아침 눈뜨자마자 1시간, 저녁 식사 전 1시간동안 18살 때 접한 대광명의 그 자리에 나를 계속 놓아두는 명상을 한다”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면 김 의장의 그 시절은 유서를 써놓고 스승을 찾아 헤매기도 하고, 이시영 선생의 맏아들을 이완용의 전첩 집에서 빼내오기도 하고... 등등 남다른 인생행로를 걷던 때.
그가 얘기하는 ‘대광명’은 18세 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는 상태에서 몸이 지구 대기권 위로 둥둥 떠올라 단전에서 빛이 나오더니 나도 너도 없는 우주가 하나의 큰 빛으로 융합한 일종의 ‘신비 체험’이다.
“너무나도 행복했다”는 김 의장은 그 후에도 1952년 6.26전쟁 와중에 부친이 인민군에 납치당한 직후 고향인 충남 중원의 집에서 6주간에 걸친 단식, 1965년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50일간의 기도 등을 통해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체험들을 했다고 전했다.
이에 앞서 북한산 백운대에 올랐던 13세 때 처음으로 절대 우주의 기운을 온 몸으로 만나 세 번 절하며 감격해 했다는 그는 특히 마니산에서의 체험과 관련, “45째 되는 날 깨닫고 5일 동안 웃음이 끊이지 않을 만큼 희열이 넘치고 한없이 즐거웠다”고 회고했다.
“남북모순도 해결 못하는데 세계모순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늘을 향한 절규
그 때 단에 올라가서 “남북모순도 해결 못하는데 세계모순을 어떻게 해결하는가”라며 “나를 데려가든지, 나에게 힘을 주든지 해 달라”고 절규한 그는 30여분을 통곡하고 일어나서 하늘을 보니 빛의 원통이 내려와 환하게 온 몸을 그 안에 담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순간 깨달음이 온 것이 “환하게 만나니 참되고, 참으로 만나니 환하다”라는 진리.
김 의장은 이와 관련, ‘환하게’를 1로, ‘만나니’를 2로, ‘참되고’를 3으로 느꼈다며 이를 우리 민족 최고의 경전인 ‘천부경(天符經)’의 ‘일시무시 일석삼극무진본(一始無始 一析三極無盡本)’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또 ‘환하게 만나니 참되고’의 1 →2 →3 수순을 연역법인 하도(河圖)와 같은, ‘참으로 만나니 환하다’의 3 →2 →1의 수순을 귀납법인 낙서(洛書)와 같은 우주자연의 섭리로 믿고있다.
더불어 이를 ‘없는데서 있는데로’, ‘있는데서 없는데로’같이 ‘무극(無極)에서 태극(太極)’으로, ‘태극에서 무극으로’ 순환하는 의미를 실었다.
이와 맞물려 ‘암 그렇고 말고’의 충청도 고향 사투리인 ‘암만’이란 말을 늘 가슴에 담고 있다.
환하게, 너무나 환하게, 나와 온 세상이 하나로 공명(共鳴)하는 기운을 품고 있다는 느낌에서다.
더불어 우리 민족의 선조 환인, 환웅의 ‘환(桓)’이란 글자를 끔찍이도 좋아한다.
김 의장이 무한영원한 시간으로서의 이제와 무변광대한 공간으로서의 여기가 어우러진 시공을 전체로 확대해 그 가운데에 스스로를 고요히 놓아두는 심경으로 일상의 삶을 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반도평화와 인류평화를 위해 헌신하라” .... 하늘의 소명으로 부여잡다
이런 각별한 개인적 민족선도(仙道)체험과 깨우침들이 “한반도평화와 인류평화를 위해 헌신하라”는 것을 하늘이 준 소명으로 부여잡게 한 토양인 셈.
김 의장은 자신의 건강함에 대해서도 “나 자신을 하늘에 바쳐서 하늘의 기운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같은 숙명적 내지는 선천적 특성을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원리를 담은 ‘정역(正易)’의 창시자 김일부 선생과 1백년 간격으로 생년월일이 같은데서 동감하기도 한다.
김 의장은 이화여대를 나와 숙명 여중·고 교장을 지낸 정순희 여사(80세)와의 사이에 경미·영미·정미·정은의 네 딸과 막내 아들 준순씨를 두고 있다.
문득 본인의 인생이 선천적이라면, 그 피를 이어 받은 직계 자손들도 ‘하늘의 소명’을 승계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이에 대한 김 의장의 답은 단순 명쾌했다.
“국가적, 세계적 문제에 대한 해결은 자손이라는 차원으로 접근할 사안이 아닙니다. 동지들이 함께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문현답이 돼 버린 격.
▲ 김선적 의장은 우리 국민에게 "성통광명"을 간곡히 당부했다. <환타임스=김철수기자> ©시사오늘 | |
"참사람의 법고를 동방에 달아 세계에 울리거라 낙원의 복음"
김 의장은 또 동지(同志)의 의미에 대해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평화사상과 더불어 환인·환웅·환웅의 뿌리 가르침인 성통광명(性通光明)을 향해 스스로를 다스리는 모든 이라고 부연했다.
성통광명이란 자신의 본성을 깨우쳐 우주의 진리인 광명을 이룬다는 것으로, 자신과 우주가 하나가 돼 영육이 우주와 소통하는 경지를 뜻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국민에게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청하자, 김 의장은 지난 2005년 "나는 환인(桓因)의 화신으로 태어났으며 환국(桓國)의 정도(正道)를 오늘에 구현하는 소명을 지니고 있음을 천명한다"며 발표한 한민족과 인류에 고함으로 답을 대신했다.
“참사람의 법고를 동방에 달아 세계에 울리거라 낙원의 복음
이욕의 암흑을 비치는 광명 정의와 융화의 참고향일세
역사의 추수가 열매 맺는 날 천지도 하날세나 세계와 같이
세계여 노래하라 자유의 향락 천지도 춤추도다 우리와 같이
자연이 환호속에 깃들이며 무궁토록 이루는 정령의 한울
정성의 자유인이 중심이 되어 조화는 구른다 한사랑으로!”
원본 기사 보기:환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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