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구의 정치적 장래는 내가 책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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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구의 정치적 장래는 내가 책임진다"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09.06.29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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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고흥문 씨와의 새로운 출발

 
고흥문계로의 새로운 시작

#1. 유진산 총재 서거 후에 신민당에는 군웅활거시대가 열렸다. 중앙당 요원이나 중앙 상무위원들은 당의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서로 자기와 함께하자고 이리 당기고 저리 밀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는 그야말로 백가쟁명의 춘추전국시대였다.

나는 그동안 철저한 진산계였기 때문에 견지동과 고흥문, 김영삼 진영에서 서로 자기 쪽에 오기를 바랐다. 특히 김영삼 진영의 김동영 의원이 적극적으로 요청했다.

“노병구 씨는 중앙당 사무처에도 있었지만 고흥문 씨와의 인연 때문에 그쪽으로 가지 않을까 보는데, 솔직히 얘기해서 고흥문이 무슨 정치가고? 김영삼 씨하고 같이해야 당도 장래가 있고 노병구 씨도 장래가 있는 기라. 딴소리 말고 요번에 김영삼 의원 진영으로 우리 손잡고 한번 해봅시다.”

하지만 그동안 사무처에서, 또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맺은 인연을 묵살하고 다른 곳으로 갈 수는 없었다. 고흥문 의원은 “노병구의 정치적 장래는 내가 책임진다. 내 진영에 와서 내 조직을 맡아 새로 시작해 보자”고 매일 나를 찾아왔다.
 

 


 
나는 지난날의 인연으로 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남대문 가까이에 있는 그랜드호텔의 고흥문 의원 개인사무실에 매일 들렀다.
그때 고흥문 진영에는 이중재·채문식·김현기·이진연·이택희 다섯 분의 현역 국회의원이 있었고, 원외는 채규희·최영환 등이 있었다. 새로 진산계에 있던 함기환·박심서·이형호·김세웅·김형중·김상환 씨가 가담했고, 나와 함께 장승훈·최영수 씨가 가담해 진영이 짜여졌다.

1974년 8월 22일, 새 당수를 뽑는 전당대회가 공고되었다. 고흥문 의원도 총재후보로 등록하고 조직원을 총동원해 전국 대의원의 포섭에 나섰다. 전국 모든 지역에 조직에 조직원을 파견했는데, 경기도에 보낼 사람이 마땅치 않자 고심 끝에 고흥문 의원이 내게 말했다.

“경기도가 지구당수도 대의원수도 많은데, 정작 경기도를 맡길 사람이 없으니 자네가 서울이지만 경기도를 맡아 수고하고, 활동하는 중에 상무위원이나 대의원 중 쓸 만한 사람이 있거든 우리 진영에 가담시켜 맡기도록 하세.”

그래서 그날부터 경기도 내 각 지구당을 방문하고 대의원들의 집으로 일일이 찾아가 고흥문을 알리고 지지를 부탁했다. 찌는 듯 무더운 여름날, 수박이나 작은 선물을 들고 버스를 타고 걸으면서 경기도 내 각지에 흩어져 사는 대의원들을 일일이 방문해 인사를 하고 고흥문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했다.

화성에 갔을 때 전에 중앙당 총무국 서무부장을 지낸 유용근 동지를 만났다. 나는 당연히 화성지구당에서 중앙당 파견 대의원으로 선정되었어야 할 사람이 대의원도 안 된 것을 보고 고흥문 계보에 와서 나와 함께 일하자고 권했다.
 
그리고 돌아와서 고흥문 의원에게 “중앙당 서무부장을 지낸 유용근 동지를 경기도 조직요원으로 했으면 어떻겠느냐”고 말씀드리고 승낙을 받아 고흥문 진영에 정무회의 선출 케이스 대의원으로 선정하게 하고 가담시켰다.

1974년 8월 22일, 신민당 전당대회는 김영삼·고흥문·김의택·이철승·정해영 다섯 분이 후보등록을 마치고 1차 투표에서 김영삼·김의택·정해영·고흥문·이철승 순으로 득표를 해서 사전에 약속한 대로 고흥문 후보는 후보직을 사퇴하고 김영삼 후보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2차 투표에 들어가 김영삼·김의택·정해영 순으로 표가 나와 3차 투표를 다음 날 하자는 안을 놓고 옥신각신하다가 김의택 후보의 사퇴로 김영삼 후보가 야당사상 최연소 총재로 선출되었다. 드디어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건 김영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뒤 중앙당 당직을 임명하는데, 주로 김영삼 계보와 고흥문 계보가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국장은 현역의원으로서 총무국장에 황명수 의원, 조직국장에 김동영 의원, 선전국장에 문부식 의원이 되었고, 총무 부국장에 노병구, 조직 부국장에 서석재, 선전 부국장에 하승용 씨가 임명되었다. 나는 중앙당 활동을 열심히 했다.
 
내 돈 없이 땅을 사고 15만원으로 집을 지어 150만원을 벌다

#2. 신림동에서 집을 지을때 동양방송(TBC) 뉴스를 담당했던 정치부기자 구박 씨가 이웃 독산동에 살고 있었는데, 가끔 내가 집 짓는 현장을 오가며 들렀다. 집 짓는 데 관심이 크기에 땅을 사서 한번 집을 지어보라고 권했더니, 좋은 땅을 알아봐달라고 해서 “마침 지금 남부 경찰서 건너에 좋은 땅이 나와 있으니 사라”고 권했다.

그래서 구박 씨가 몇 번을 오가며 흥정을 했는데 가격차이로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도 욕심이 났지만 경옥도 그 땅을 사서 상가를 지으면 약국을 하기에도 좋겠다고 ‘돈만 있으면 우리가 살 텐데...’ 하고 아쉬워했다.

나는 다음 날 아침 이중재 의원댁을 방문해 국회 재무위원인 이 의원에게 “돈이 꼭 필요한데 은행에서 대출을 좀 받아주십시오.”하고 간청했다.

“담보가 있어야 하는데?”
“얼마 전에 집을 지어 집이 있습니다.”
“그걸 누구 명의로 지었지?”
“제 아름으로 지었지요.”

이 의원은 야당생활로 고생하는 동지가 자기 명의의 담보물을 들고 올 때만 대출을 알선해주는데, 누구 소개나 하는 것은 그 동지에게도 별로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자신도 무슨 브로커처럼 인식되는 것이 싫다면서 좋게 거절한다고 했다.

“알았어.”

이 의원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어디엔가 전화가 건 뒤 은행에 누구를 찾아가보라고 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만난 뒤 며칠 내에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그 땅을 살 수 있었다. 66평의 대지를 평당 6만 3천원씩 주기로 하고 계약을 치렀다.

중도금 줄 때가 다가올 무렵, 어느 복덕방에서 그 땅을 내가 산 값보다 5천원씩 더 줄 테니 등기도 넘기지 말고 그냥 팔라는 것이었다.

다음 날, 복덕방 아저씨는 또 와서 5천을 더 줄 테니 팔라고 했다.
나는 바로 중도금을 치르고 찾아올 때마다 5천원씩 올려준다는 것을 여름부터 가을까지 두었다가 11만 5천원씩 받고 몇 달 만에 거의 원금의 배를 남기고 팔았다.

새집을 완성하고 시간 여유가 있을 때 중앙당에 나갔다가 고흥문 씨 개인사무실에서 동지들과 지내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모두 야당생활에 지쳐서 어렵게 사는 동지들이어서 고흥문 씨나 거기 출입하는 현역의원들이 동지들에게 점심도 사고 때로는 용돈도 주었다.
 
또 동지들의 집에 긴급환자가 생기거나 어떤 돌발적인 일이 생기면 고흥문 씨가 도움을 주었다. 나는 아내가 약국을 해서 생활에 어려움은 그다지 없었으므로 사업상 대출 같은 도움을 청하는 것 외에는 그분들에게 되도록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면서 사무실에 드나들었다.

유진산 총재 때 그분의 경호도 하며 보좌관으로 있었던 이형호 씨는 남달리 나와의 인연도 오래되었고 또 친했다. 우리는 함께 고흥문 계보로 와서 자주 만나 가정사까지 이야기하고 서로 집에도 자주 들러 가족들끼리도 친하게 지내는 터였다.

나는 이형호 동지에게 나와 같이 집을 짓자고 제안했다. 이형호 씨 부인이 이형호 씨가 경험이 없으니 노병구 씨가 도와준다면 해보자고 해서 땅을 보러 다녔다. 남향에다 평수도 똑같고 4미터 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는 두 필지 땅을 찾아 이형호 씨에게 먼저 고르게 하고 나머지는 내가 하겠다고 제안하여 사기로 했다.

그때 나는 통장에 15만원밖에 없었는데, 마침 땅주인이 국민은행 봉천동 지점장이어서 내가 지으려는 땅을 담보로 대출을 해주고 땅값의 일부를 받고 사용승낙서를 써주면 집을 지어서 전세를 놓든지 팔아서 대금을 다 치르기로 하고 이형호 씨와 함께 계약을 했다. 공사를 시작해야 하는데 이형호 씨가 용기를 못 내고 차일피일 미루어 돈 없이 단기간에 집을 지어야 했던 나는 할 수 없이 혼자 공사를 시작했다.

나는 돈은 없었지만 그동안 두 번의 집을 지으면서 목재소와 건축자재상 그리고 내 일을 하던 분들이 앞다투어 일제히 달라붙어 대가는 집을 다 지은 뒤 받기로 하고 열심히 해서 예정된 날짜에 공사를 끝냈다.

당시 장삿속으로 집을 짓던 사람들은 보통 기와집을 지을 때 양회를 건평 한 평당 열여섯 포에서 열일곱 포를 써야 정상인데 열한 포에서 열두 포로 마무리했다. 또 콘크리트용 철근도 10~12센티미터의 간격을 두어야 하는데 보통 18센티미터나 심하면 30센티미터까지 간격을 두어 자재에서 더 많은 이익을 남기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익을 덜 먹어도 부실공사를 용납하지 않았다. 일하는 사람들이 다른 현장의 예를 들며 “무엇 하러 그렇게 많은 자재를 씁니까? 어차피 집을 다 짓고 나면 보는 사람들이 그것을 알기나 합니까? 하고 조언들을 하면, “적어도 이집은 100년은 가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되겠는가? 자원도 없는 나라인데 헐고 또 짓고 그래서는 안되지.” 하며 내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공사를 진행해서 예정된 날짜에 공사를 끝내게 되었다.

일하는 사람들이 나에게는 그렇게 건의를 하면서도 다른 데 가서는 내가 지은 집이 제대로  지은 집이라고 말을 퍼뜨려 집이 다 완성되어 갈 무렵 사자는 사람이 나와서 빨리 팔기 위해 비교적 싼값에 팔았는데도 그동안의 생활비와 공사에 들어간 경비를 모두 제하고도 약 30여 일 만에 150만원을 남겼다. 공사가 끝난 뒤 나는 165만원의 통장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이런 과정에서 돈을 버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자신감을 체득했다. 정직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일하면 자연히 신용이 생기고, 신용을 한번 얻으면 그 신용이 자본이 되어 도와주는 사람이 생기고, 과욕을 부리지 않고 일이건 사업이건 합리적으로 하면 반드시 성공한다고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얼마를 받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주어진 일에 얼마나 열성적으로 일하느냐에 따라 대가는 돌아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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