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자유한국당이 반등 모멘텀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한국갤럽>이 8일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 한국당 정당지지율은 전주 대비 1%포인트 하락한 11%로 나타났다. 추석 이후 여야 5당 지지율을 보면, 더불어민주당은 40% 중후반, 한국당은 10% 초반, 국민의당·바른정당·정의당은 한 자릿수에서 고착화되는 흐름이다.
정치권에서는 한국당의 지지율 정체(停滯)를 설명하기 위한 다각(多角)적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의 후폭풍은 물론, 이슈를 주도하기 어려운 야당(野黨)으로서의 한계, 대통령 후보급 리더의 부재(不在) 등 여러 문제가 거론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전략적 오판(誤判)이야말로 한국당 위기의 본질이라고 꼬집는다.
종북 몰이, 전략적 오판의 상징
“새 정부 출범 이후 주사파라는 말이 금기사항이 됐지만, 전대협 주사파들이 청와대를 장악하고 대통령 의사결정을 그분들이 거의 주도하지 않느냐. 이런 이야기를 하면 공안통치 시절 색깔론이라고 거꾸로 공격하는데, 그러면 왜 당당하게 ‘나 주사파였지만 언제 전향했다’는 말을 하지 못하나. 언제 전향했다고 선언한 적도 없으면서 색깔론이라고 역공한다.”
지난 5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전날인 4일에는 정용기 원내수석부대변인이 논평을 통해 “대통령이 권한을 남용해 종북·용공인사를 특별사면하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차원에서 좌시하지 않겠다”고 했다.
지난달 6일에도 전희경 의원은 국정감사에 나온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 앞에서 “주사파 전대협·운동권이 장악한 청와대 인사들의 면면답다. 북한식 사회주의에 대해 입장 정리가 안 되신 분들이 청와대 내에서 일하니까 인사사고가 발생하고, 정작 중요한 안보·경제는 하나도 못 챙긴 것”이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문재인 정부와 ‘종북’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일관된 흐름이 읽힌다.
전문가들은 이 대목에서 한국당의 전략적 오류를 포착해낸다. 지난해 10월, 정치권에는 때 아닌 ‘북풍(北風)’이 불었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자신의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에서 2007년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에서 기권 결정을 하기 전 북한의 의견을 물었고,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대통령이 그 과정에 관여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북풍이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한국갤럽> 지지율 추이를 보면, 송 전 장관 회고록 논란과는 관계없이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은 꾸준히 상승했다. 오히려 이즈음 민주당 지지율은 새누리당(現 자유한국당)을 넘어섰다. 송 전 장관 회고록으로 한국당이 ‘문재인=종북’이라는 연상 작용에 불을 붙였지만, 유권자들은 당시 상황을 ‘종북 프레임’으로 해석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민주당의 대처 능력도 달라졌다.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저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 “상대편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치려면 상대편의 언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썼다. 레이코프의 이론에 따르면, 한국당이 ‘문재인은 종북이다’라고 주장할 때 ‘문재인은 종북이 아니다’라고 반박할 경우 유권자들의 뇌리에는 ‘문재인’과 ‘종북’이라는 이미지만 남는다.
2012년 제18대 대선 과정에서 벌어진 ‘서해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파동’은 레이코프의 이론이 그대로 적용된 사례였다. 민주당은 한국당의 ‘NLL 포기’ 주장에 대해 ‘NLL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맞섰고, 문재인 캠프는 NLL의 늪으로 끌려들어갔다.
“문재인 후보가 NLL 문제에 대해서는 깨끗이 해명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고 들었다. 물론 선거 전략상으로는 그게 패착(敗着)이었지만….” 문재인 캠프에서 일했던 한 인사의 말이다.
반면 제19대 대선에서는 달랐다. 문재인 캠프는 한국당이 들고 나온 종북 프레임에 휘말리지 않고 ‘가짜 안보’ 프레임으로 역공을 가해 성공을 거뒀다. 이런 전략은 제19대 대선 이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여러 번의 선거를 통해 우리도 색깔론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앞선 관계자는 이렇게 덧붙였다. 민주당도, 유권자도 더 이상 한국당의 종북 프레임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한국당의 고민 보여주는 종북 프레임
그렇다면 한국당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월 한국당이 개최한 국회의원·당협위원장 연석회의에서는 “언제까지 종북 프레임으로 60대 이상 할머니, 할아버지만 붙들고 있어야 하나”라는 자조(自嘲)가 심심찮게 나왔다.
과거 새누리당에 몸담았던 한 정치인도 14일 <시사오늘>과 만나 “종북이니 좌파니 하는 말이 더 이상 안 먹힌다는 것은 한국당도 알고 있다. 홍 대표가 그렇게 말한 것은 문재인 정부의 안보를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겨냥하는 것 아니겠나”라고 했다. ‘정말로 문재인 정부를 종북이라고 생각하는 의원들이 있지 않나’라는 질문에는 “진짜 종북이면 언론에 대고 말할 것이 아니라 검찰이나 국정원에 신고를 하겠지”라고 웃어 넘겼다.
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한국당의 종북 프레임 전략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지금 정치권은 민주당과 국민의당이 페어(Pair)를 이루고 한국당이 이에 맞서는 구도다. 한국당은 민주당과 국민의당을 한통속으로 몰아넣어야 하는데, 사실 국민의당은 여러모로 보수적인 데가 있어서 민주당과 잘 묶이지가 않는다. 이번 예산안 통과 때 보면 국민의당은 사실상 보수 입장을 대변했다. 이러니까 한국당이 종북몰이를 할 수밖에 없는 거다. 민주당과 국민의당은 뿌리가 같고, 둘 다 DJ 햇볕정책을 계승한다고 하니까.”
다만 선거용 전략이라는 정의(定義)에도 마뜩찮은 구석이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교수는 같은 날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한국당이 선거 전략으로 종북 프레임을 쓸 만큼 어리석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진보와 종북을 묶어서 생각하는 사람들은 굳이 ‘민주당이 종북이다’라고 하지 않아도 한국당을 찍을 확률이 높다. 중도층을 잡으려면 오히려 종북, 좌파 같은 말은 입에 올리지 않는 쪽이 낫다. 외연을 확장해야 하는 한국당이 집토끼를 잡으려고 종북을 외친다고 보기는 힘든 부분이 있다.”
이 분석이 옳다면, 한국당이 종북 프레임을 고수(固守)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의문에 대한 힌트는 1년 6개월 전 KBS <안녕하십니까 홍지명입니다>에 출연한 홍 대표의 발언에서 얻을 수 있다.
“새누리당은 민주당과는 달라서 이념 집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새누리당은 일종의 이익집단이다. (새누리당은) 보수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정당이라기보다는, 국회의원 한 번 해야 되겠다는 그 이익 개념으로 모인 집단으로 볼 수 있다. 공통된 이익이 없으면 흩어진다.”
기본적으로 정당은 정치적인 주장이 같은 사람들이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만든 집단이다. 그러나 홍 대표 말처럼 한국당이 ‘국회의원 한 번 해야겠다는 이익 개념으로 모인 집단’이라면, ‘공통된 주의(主義)’가 부재한 셈이 된다.
공통된 주의가 없다는 홍 대표의 진단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신간 <정치의 공간>에서 한국 보수정당의 생명력이 다했다며 “한마디로 좋은 시절은 끝났다. 한국이 어떤 모습으로 발전해야 하는가,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를 둘러싼 이념과 가치, 비전으로 다투는 자유경쟁의 시장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충고했다.
하지만 홍 대표의 말대로라면, 한국당에는 ‘자유경쟁의 시장’으로 나가 싸울 때 필요한 ‘이념과 가치’라는 무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경우 한국당이 고를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네거티브(Negative), 즉 근거 없는 ‘흑색선전’밖에 없다.
실제로 앞선 대학교수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친이, 친박, 비박까지 많은 계파가 있었지만, 이들이 일관적이고 공통된 의견을 낸 적이 있나. 그저 ‘보스’가 결정한 대로 따르는 것뿐이다. 이념도 철학도 없다. 정당이면 이념과 철학으로 뭉쳐서 경쟁을 해야 하는데, 한국당에는 경쟁에 필요한 기본적인 무기가 없다는 뜻이다. 이러니까 한국당은 종북몰이에 기댈 수밖에 없는 거다. 쉽게 말하면, 지금 한국당은 종북몰이를 강요당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결국 현재 한국당이 직면한 위기의 본질은 ‘철학의 부재’라는 결론이다.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철학이 없으니 종북몰이에 집착할 수밖에 없고, 종북몰이가 더 이상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면서 정당으로서의 경쟁력도 상실했다는 논리 구조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한국당의 철학’을 세우는 작업부터 해야 한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서도 종북에만 집착하고 있는 한국당은 최장집 명예교수의 조언을 눈여겨봐야 하지 않을까.
“보수가 반공과 종북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정당성으로 서야 한다.”
좌우명 : 인생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