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술한 제도, 무능한 정부
정쟁국회, 국민안전 방치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이병도 주필)
한국은 언제까지 국민생활 '안전 후진국'으로 낙후돼 있을 것인가. 3년전 온 국민을 충격과 고통에 빠뜨렸던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대한민국 改造'라는 요구까지 비등할 정도의 강력한 국가사회적 처방이 요구됐건만, 상황은 아직 하나도 개선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가 바로 그렇다. 그 발단과 경위, 대응체제와 관련 규정등 모두에서 허술함을 여지없이 노출시키고야 말았다. 안전불감증의 '종합판박이', '전형적인 人災'란 비판들이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재사망률 1위란 치욕과 오명의 국가로 여전히 기록되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와 정치권은 사후약방문과 정쟁에만 몰두할 뿐, 수시로 터지는 참사로 다수의 국민들이 희생되는 이 불안한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에는 아무런 진전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우리 사회는 얼마나 더 큰 희생을 치러야 제대로 정신을 차릴 것인지, 곳곳에 구멍이 뚤려 빚어진 이번 '제천 참사'의 전모와 구조적 문제점을 진단한다.
부실한 건물과 구조 차질
우선, 사고 경위상의 위험요소 부터 살펴보자. 이번 '제천 참사'는 방재(防災) 관리에서부터 소방점검과 구조 작업에 이르기까지 민·관(民官)의 총체적 부실이 키운 人災임이 확연해 지고 있다. 곳곳에 뿌리박혀 있는 안전불감증이 부른 대형 참사였으며, ‘안전 한국’은 여전히 공허한 구호일 뿐임을 거듭 확인시켰다.
제 기능을 못한 비상구, 불법주차로 막힌 소방도로, 스프링클러나 경고 벨 미작동 등 대형 화재 참사 때마다 지적돼 온 문제들이 고스란히 반복됐다. 모두 29명이 숨지고, 36명이 부상당한 이번 참사는 건물주의 안일한 안전의식은 물론, 소방 당국의 초기 진압 실기, 허술한 관련 법 제도와 소방 인력ㆍ장비 부족 등 모두가 피해를 키운 중요한 요인이 됐다. 이것은 한국 안전 불감증 대형사고 때마다 되풀이 돼온 고질병 이었다. 화재를 수사 중인 충북지방청 수사본부가 건물주 이모(53)씨와 관리인 김모(50)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하지만, 이로써 해결될 성격이 결코 아니다. 문제는 곳곳에 복합적으로 자리한다.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2층 여성 사우나에서는 사고순간 탕 내에서 비상벨을 들을 수도 없었고, 출입문을 찾기도 어려웠으며 비상구는 아예 선반들로 막혀 있었다는 소식이다. 화재 당시 건물 구조를 제대로 알고 대피를 안내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지적도 나왔다. 대형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건물구조와 관리상태의 부실을 1차적으로 보여줬다.
더욱 어이없는 것은 현장에 출동한 소방구조대원들 조차 이런 건물 구조를 몰랐다는 사실이다. 화재가 발생한 스포츠센터 건물 한 귀퉁이에는 재난 때 대피할 수 있는 비상 출입문과 계단이 있었기에, 3층 남자 사우나 이용객들은 불이 난 지 7분 만에 이발사의 안내를 받아 이 비상 통로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현장에 도착한 소방대원 4명은 건물에 매달린 사람이 뛰어내릴 에어매트를 까느라 시간을 허비, 이 통로를 찾아 들어가는데 40분이나 걸렸다는 얘기다. 그사이 2층 여성 사우나에 있던 20명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누군가 단 한 명만이라도 먼저 비상 통로 위치부터 파악할 생각을 했더라면, 이런 어이없는 떼죽음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명 피해가 커진 원인은 여러 가지다. 풀무 역할을 한 필로티 구조와 가연성 외장재, 폐쇄된 비상구, 스프링클러 미작동 등이 두루 포함된다. 무엇보다 불법주차 차량들 때문에 소방차의 접근이 늦어져 구조에 차질이 빚어졌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국내 건물 대형사고의 고질적 문제인 소방차 진입로 확보여부가 이번에도 재연, 초동 진화를 실패케 한 것이다.
소방차가 처음 도착한 건 신고 후 7분이 지나서지만, 구조작업은 불법 주차들로 인한 소방차 진입 지연으로 도착 후 30분가량 돼서야 시작됐다. 즉, 본격적인 구조작업이 40분쯤이나 지체된 셈이다. 지하 1층~지상 9층에 연면적 3813㎡인 스포츠센터는 폭 6m의 좁은 진입로 양쪽에 있던 불법 주차 차량 때문에 굴절사다리차가 500m를 우회하며 '초기진화 골든타임' 30분을 허비해야만 했다. 화재가 난 건물은 제천에서 가장 큰 스포츠센터로 9층 건물에 주차공간이 21대에 불과해 평소에도 불법주차와 교통난이 심각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초기 진압의 ‘골든타임’을 불법주차 차량으로 허비하면서 피해가 급속도로 확산된 것이다.
이는 제도상의 허점과도 연관된다. 도로 모퉁이나 소방 관련 시설주변을 별도로 표시해 주정차 위반 시 범칙금과 과태료를 2배로 부과하자는 내용의 도로교통법 개정안은 이미 지난 3월 국회에 발의된 바 있다. 그러나 지난 9월에야 소관 상임위인 행정안전위원회에 상정됐고, 그나마 다른 쟁점법안에 밀려 아직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지난해 11월에도 일정 규모 이상의 공동주택에 소방차 전용 주차구역을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소방기본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이 법안 또한 1년 넘도록 계류 중이다. 화재진압에 불법주차 차량이 방해가 될 경우 소방관이 차를 부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한 미국 영국 등 선진국에 비하면 극히 미약한 안전 수준인데도, 한국 국회는 국민안전을 담보키 위한 이들 법안의 처리를 지연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현재 화재진압을 위해 불법차량을 훼손할 경우 현장 소방관이 그 보상 책임을 져야 하는 제도로 돼 있다. 실제 2015년부터 올 6월까지 소방관이 소방 활동 중에 발생한 피해를 자기 돈으로 물어준 사례가 20건에 이르고 있다는 소식이다.
겉도는 소방점검 실태
사고가 나기 전, 사전 소방 안전점검의 허술함도 큰 문제점을 남겼다. 대형건물주는 소방시설관리법에 따라 매년 한 차례씩 소방 안전 점검을 실시해 결과를 소방서에 제출하도록 돼있다.
부실 안전점검은 기본적으로 소방시설관리법의 허점에 기인한다. 현행 소방안전 점검은 건물주가 민간 전문 점검업체에 맡기거나, 자격증을 가진 직원을 통해 직접 하면 된다. 사실상 ‘셀프 점검’이다. 이런 점검 구조에서는 민간업체나 직원은 건물주의 눈치를 보면서 적당히 넘어가기 일쑤다. 이번 사고 건물의 경우도 외벽이 불에 잘 타는 스티로폼 소재였는데도, 소방 점검서에는 ‘내화건축물’로 표기해도 그냥 넘어간 것으로 밝혀졌다.
시정까지의 과정도 더디기만 하다. 점검 결과가 소방서에 전달되고, 소방서가 현장 확인에 나서기까지 최소 한 달은 걸린다고 한다. 이번에도 3주 전 점검에서 1층 스프링클러와 경보 벨, 화재감지기 등의 불량이 지적됐지만, 시정을 기다리는 사이 참사가 벌어졌다.
이번 사고 건물의 점검 역시 부실의 관행을 여실히 보여줬다. 소방점검을 맡았던 민간 안전업체 J사는 지난달 30일 하루 동안 스포츠센터 전 층을 돌며 안전점검을 했다. 사고가 나기 불과 3주 전이었다. 점검에는 J사 직원 3명이 참여했고 경보와 피난, 소화 등 5개 부문에서 30개 항목 67곳을 수리 대상으로 판정했다. 한마디로, 이 건물의 소방 설비가 총체적으로 부실했다는 뜻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점검과정은 허술하기만 했다. 대량 참사를 빚은 2층에는 점검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자 점검 요원들이 여자 사우나라는 이유로 그냥 넘어간 것이다. 더욱이 2층 비상구로 이어지는 공간에 불법 적치물이 쌓여 있었는데 이런 문제도 확인하지 않았다. 비상구 앞을 목욕용품 보관 선반이 가린 상황을 사전에 미리 파악 못한 것이다. 결국 이것이 대형사고의 결정적 원인이 되고 말았다. 화재가 나자 2층에서는 비상구를 찾지 못해 고장으로 열리지 않는 자동출입문에 몰려 있다 20명이 숨지는 변이 나고 만 것이다. 손님이 없는 시간대를 이용해 검사해야 했지만, 2층을 생략하고 점검이 이뤄진 것이 큰 문제를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검사 실태도 그렇게 부실했다.
한국사회에서 다중 이용 시설의 소방 점검이 이렇게 건너뛰기 식으로 이뤄지는 것은 거의 관행일 정도다. 소방 점검에서 불법이 적발돼도 매년 수십만원 이행강제금을 내고 버티는 곳이 한둘이 아니라는 전문이다. 이번 화재 건물은 스프링클러가 고장 났는데도 방치했고, 비상구엔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었으며, 불법 용도 변경도 한 것으로 나타났다. 불법 주차된 차량들로 소방도로까지 확보되지 못한 상태였으니, 당국이 불법을 사실상 방치하고 있었던 셈이다.
왜 이렇게 건물 관리들이 부실한가. 민간업체의 점검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안전이 비용에 좌우된다는 점이다. 문제점을 발견하고도 건물주와 협의한 뒤 적당히 넘어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싼 가격에 치중해 점검 과정이 허술할 때도 많다는 것이다. 건물주와 업체가 제출한 이런 점검표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게 현재 한국사회의 소방 점검 현실이다. 약간의 불편, 몇 푼의 돈을 아끼려다 결국 엄청난 대가를 치른 사례를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이 봐 왔다. 비용 문제에 안전이 휘둘리게 하는 제도적 허점은 시급히 바로잡아야 한다.
소방 인력이나 장비 부족은 구조적 문제다. 이번에 사고가 난 관할 제천소방서는 화재 진압요원 30명과 구조요원 12명이 3교대 근무를 한다. 대형화재가 발생하면 쉬는 직원까지 불러내야 하고 동시다발로 사고가 날 경우 사실상 대처가 불가능한 상황이란 것이다. 소방차 부족이나 장비 부실은 지자체가 안전 예산에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는데, "그걸 하지 않는다"고 소방 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 제기 자체가 새롭지도 않은 사안이다. 최근 영흥도 낚싯배 침몰 사고 때도 해경의 늑장 대응이 도마에 올랐다. 예산 부족으로 야간 항해 장비가 있는 신형 보트가 1대뿐인데, 마침 고장이어서 민간구조선을 빌려 타고 현장으로 향하느라 늦었던 것으로 드러나 한숨 짓게 만들었다.
'안전 관련법' 외면하는 정치권
정치인들은 이런 참사조차 정쟁의 대상으로 이용하려 하면서도 정작 안전을 위한 입법은 뒷전으로 미뤄놓고 있다. 국민 안전을 위한 제도적 허점이 이렇게 많은 데도, 국회의 관련 법안 처리는 감감할 뿐이다. 발의된 지 1년여 가까이 되지만 상임위 심사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법안들이 통과됐다면 이번에도 신속한 구조로 인명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었을 터인에도 그렇다.
그 구체적 사례들을 보면, 김영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3월 소방차의 통행을 방해해 대형 참사를 부를 수 있는 장소를 ‘주정차 특별 금지구역’으로 지정하고 이를 어기면 과태료를 2배 이상 물리는 도로교통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아직까지 심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또 조응천 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11월 일정 규모 이상 공동주택에 ‘소방차 전용 주차구역’ 설치를 의무화하고 정당한 사유 없이 주차를 할 경우 2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소방기본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이 또한 1년이 넘도록 계류 중이다. 소병훈 민주당 의원도 지난달 구조 작업 도중 차량 파손 등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손해배상 대상에서 소방관은 제외하는 소방기본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이 역시 논의가 내년으로 미뤄졌다.
정치권은 참사가 터지면 상대방 흠집을 들추는 정쟁에만 관심을 보일 뿐이다. 그것은 대형 사고가 터질 때마다 정치권 책임이 거론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12월 임시국회가 개헌특위 활동기간 연장과 관련한 여야의 다툼으로 단 한 건의 법안도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단적인 사례다. 정쟁으로 시간을 허비할 뿐 가장 기본적인 의무인 입법 활동에는 손을 놓고 있는 것이다. 이번 사고와 관련해서도 청와대와 여당은 ‘조문 홍보’에 급급하고, 야당은 ‘세월호’를 거론하며 공세를 펼치는 등 당리당략에 이용하려는 모습을 드러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화재 현장을 방문해 “이 정부가 정치보복과 정권을 잡았다는 축제에 바빠 소방 점검을 전혀 안 했을 것”이라고 비난했고, 민주당은 “화재 원인을 정부 탓으로 돌리는 홍 대표의 발언은 부적절하다”고 응수했다.
재난 대처 능력이 부족하다면 이를 보강할 예산부터 우선 배정하고, 제도가 부실해 예방에 허점이 있다면 관련 법규를 신속하게 만들어야하는 것이 국회와 정부의 책무다. 특히 예산심의 때는 소방 인력 증원에 기를 쓰고 반대하다가, 이번에는 임시국회를 열어 놓고 관련 법안 하나 처리하지 않는, 민생과 안전을 정쟁의 볼모로만 삼는 정치인들에게 이번 참사의 책임을 추궁치 않을 수 없다. 법안처리가 지연되고 있는 이유는 여야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데 필요한 법안이 주요 관심사가 아니라면 의원들은 대체 어디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번 참사를 계기로 정부는 소방안전 시스템을 총체적으로 점검하고, 정치권은 입법이 필요한 사안에 조속히 협력해야만 한다. 지금은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 마련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할 때다.
한국 대형 사고史
지난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 사회에서 안전은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할 최고의 가치로 여겨졌지만, 우리 삶 곳곳에 체화된 안전불감증은 그다지 달라진 게 없다. 아직도 너무나 익숙한 상황들이 되풀이 되고 있다. 소중한 생명을 잃고 나서야 뒤늦게 뭐가 잘못됐고,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 따지는 후진적 사고와 행태가 고스란히 되풀이되고 있는 모습이다.
당시 세월호 사고는 304명의 안타까운 목숨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곳곳의 뿌리 깊은 안전불감에 대한 적폐가 한 점으로 집약돼 나타남으로써 우리 사회를 큰 충격에 빠뜨렸다. 이 때문에 그 때도 세월호 사고와 같은 후진국형 참사가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국민적 공론이 모아졌으며, '안전 대한민국'이라는 이름 아래 각종 후속조치들이 이어졌다.
그렇지만, 이 시점에서 보면 무엇하나 달라진 게 없다는 것 또한 작금의 여론이다. 국민 대다수가 안전 시스템 개선에 대한 진전을 느끼지 못한다면 여전히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이번 사건은 130여 명의 사상자를 냈던 2015년 1월 의정부 아파트 화재의 판박이로도 볼 수 있다. 필로티 주차장의 오토바이에서 시작된 불이 가연성 외장재를 타고 전층으로 옮겨 붙은 것이 의정부 화재였다. 이번 제천 화재도 필로티 주차장의 천장 열선 작업 중 불똥이 튀면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필로티 구조는 1층에서 불이 나면 대형화재로 번지기가 매우 쉽다는 것이다.
불법 주차차량으로 인한 소방차질도 거듭되고 있다. 2015년 의정부 아파트 화재와 지난해 9월 서울 쌍문동 아파트 화재 등 불법 주차 차량 때문에 피해가 커진 사례는 부지기수다. 촌각을 다투는 화재 현장에서 ‘소방로’는 말 그대로 ‘생명로’이다. 소방차 진입을 막는 불법 주차 차량은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흉기와 다르지 않다. 화재진압의 결정적 시간을 놓치게 함으로써 인명피해를 가속화 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 세월호 참사 당시에도 출동한 해경이 가라앉는 선체 주위만 빙빙 돌다 골든타임을 놓친 것과도 사실상 다름이 없다. 이번 제천 사고에서도 27m 높이의 굴절차가 현장에 도착했지만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근처의 외벽 청소업체 사다리차가 달려와 세 명을 구했다니 이 역시 해경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민간 어선들이 먼저 구조에 나섰던 세월호 상황과 다르지 않다.
한편, 건물주나 사업주의 '안전자금' 아끼기 행태도 원천적으로 사고원인의 큰 부문을 차지한다. 그동안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인명 사고들은 기업이나 사업주들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과정에서 벌어진 ‘기업형 참사’인 경우도 많았다. 그렇기에, 그런 사고들은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던 ‘인재형 참사’였고, 공공부문의 책임 있는 관리가 부재하면서 벌어진 ‘직무유기형 참사’들이기도 했다.
현대사에서는 20년전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대표적 사례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던 대형 백화점이 거짓말처럼 20초 만에 무너져 내리면서 고객과 백화점 직원 등 무려 502명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단일 사고로는 최대의 인명 피해를 낸 건국 이후 최악의 참사였다. 삼풍 사고는 전형적인 인재(人災)였다. 민관(民官)의 불법과 비리, 안전불감증이 합쳐지면서 돌이킬 수 없는 참혹한 결과를 낳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삼풍백화점은 대들보가 따로 없이 기둥만으로 지붕판을 받치는 ‘무량판 공법’으로 지었다. 설계를 불법으로 바꾸면서 건물을 떠받치는 기둥의 굵기까지 줄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에스컬레이터 주변 기둥도 기존에 비해 굵기를 25%나 줄였다. 또 애초에 4층으로 허가 난 건물에 별도의 보강공사 없이 3500t의 시멘트를 쏟아부어 5층으로 증축했다. 이런 불법 증축을 관할 공무원들이 눈감아 줬고, 이것이 결국 대형 인명사고로 이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 외에도, 성수대교 붕괴(1994), 삼풍백화점 참사(1995), 씨랜드 참사(1999), 대구 지하철 참사(2003), 춘천 산사태 참사(2011), 태안 사설 해병대캠프 참사(2013), 경주 리조트 참사(2014), 장성 요양원 참사(2014), 판교 환풍구 참사(2014), 의정부 생활주택 화재 참사(2015) 등 모두가 하나같이 해당 기업·사업주, 그리고 정부·지자체 등 공공부문의 부실과 비행 으로 인한 참사들이었다. 즉,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일들이 기업·사업주의 무분별한 이윤 추구와 부정·비리, 공공부문의 무책임과 직무유기로 발생하고야만 사례들 이었다. 그것은 향후 정부와 정치권의 안전 대책 초점이 철저히 공공부문 및 기업·사용주 측의 안전 관련 조치와 책무를 극대화시키는 데 맞춰져야 한다는 역사적 경고에 다름없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국가와 사회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진실은 한국사회의 이같이 끝없는 대형참사 반복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생명 중시정책 재구축을
이제, 이번 참사를 계기로 정부는 그동안 내놓았던 각종 안전 관련 대책과 인프라에 빈틈이 없는지를 재점검해야 만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성원들도 안전의식에 문제가 없었는지를 스스로 살펴봐야 한다. 이 사고가 준 충격과 문제의식을 거듭 새겨야 할 시점이다.
다중이용시설 화재는 인재(人災)에서 비롯된 것이 대부분이다. 안전을 확보하는 데 드는 비용은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에 사회가 마땅히 부담해야 할 투자라는 인식이 중요하다. 화재에 취약한 건축물은 전수조사를 통해 안전대책을 다시 세우는 것도 필수적이다.
2015년 말 소방법이 강화되기 이전에 대거 지어진 건축물은 유독가스를 배출하는 값싼 마감재로 건축된 경우가 많다. 사업주가 영세해 소방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아 ‘화재 시한폭탄’으로도 불릴 정도다. 언제 어디에서 또 이번과 같은 대형참사 사고가 되풀이 될지, 위험요소는 곳곳에 도사린다. 정부는 이들 건축물에 대한 관리감독을 적극 강화하고, 필요하다면 소방시설을 보완하도록 장기저리 자금의 지원과 알선 등도 본격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전임 정권의 정부는 세월호 참사 직후 해경을 해체하고 국민안전처를 신설하는 조직 개편을 단행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도 형식적일 뿐, 실제 국민 안전 상황은 개선된 것이 거의 없다. 이 안전 행정의 사령탑이 제 구실을 하려면 더 많은 자원과 조직 혁신이 필요하다는 점을 정부는 제대로 인식해야 만 한다.
삶의 현장, '안전 혁신'의 장으로
정말, 이번만큼은 정확한 진단과 책임 규명이 이뤄져야 한다. 정부는 곳곳에 만연한 안전불감증을 뿌리 뽑을 특단의 조치를 마련하고 관련 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꿀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사실상 '셀프'로 그치고 있는 소방 점검은 반드시 뜯어고칠 필요가 있다. 안전불감증을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는 의식 혁명과 제도 개혁이 없다면 이번과 같은 참사는 또다시 되풀이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구시대의 잘못된 관행과 과감히 결별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면 '설마' 하다 대형 참사를 부르는 안전불감증이라는 적폐부터 과감히 도려내는 것이 필수다. 사람의 안전과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좀 더 비싸고, 불편하고, 투박하더라도 안전을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으로 정확히 인식할 줄 아는 사회가 되어야만 한다. 우리 사회의 재난관리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돼야만 이번과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안전불감증은 급속한 산업화의 부작용으로도 볼 수 있다. 과정보다 성과를 너무 중요하게 여기는 풍조로 인해 ‘빨리빨리’와 적당주의 문화가 확산, 국민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란 측면의 진단도 가능하다. 하루아침에 고칠 수는 없겠지만, 정부와 국민들이 그야말로 크게 각성, ‘안전한 대한민국’ 건설을 위해 본격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정부와 국회는 ‘안전혁신 마스터플랜’을 실질적이고도 세밀하게 짜는 등 튼튼한 재난대처 시스템 구축에 진력해야 할 것이다. 당장은 전문 인력과 기동장비 확보에 차질이 없게해야 함은 물론이다. 국민들도 각기 삶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안전 위험 요소를 찾아내고, 개선하는 습관을 일상화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병도는…
1952년 경남 진양에서 출생했고 서강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 1979년 동양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한 후 1981년 연합뉴스로 자리를 옮겨 정치부 야당출입 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해 왔다. 저서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