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갈등거치며 동지적 관계유지
92년 12월.
김영삼(YS)은 14대 대통령이 됐다. 54년 만 26세로 3대 민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후 38년 만의 일이었다. YS가 69년 외교구락부에서 ‘40대 기수론’을 제창하며,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나선지 23년만의 일이었다. 이는 김영삼이라는 인물. 즉 그의 민주화에 대한 투지와 열망의 결정체라고도 말할 수 있으나,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헌신적 노력을 기울였던 ‘상도동 사단’의 노력으로도 볼 수 있다.
특히 ‘左동영 右형우’ 같은 지칠 줄 모르는 참모들이 YS 곁에 있어, 그가 대권에 오를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최형우는 김동영이 죽자 상도동을 이끌며 YS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는데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YS와 최형우 둘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거산(巨山) 김영삼(YS)- 54년 만 26세로 피선거권을 얻게 되자 3대 총선에 출마, 당선됐다.
그 후 YS는 5,6,7대 총선에서 당선되며, 야당의 지도자로 발돋움 했다.
69년 ‘40대 기수론’을 제창하며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섰다. 선거운동을 하기위해 무교동 한 건물에 YS캠프가 차려진다.
이곳이 YS와 최형우의 인연이 시작되는 곳이다.
온산(溫山) 최형우- YS와 만남이 이뤄지기까지의 약력은 이렇다.
동국대 대학시절인 60년대 초 자신의 고향인 울산의 민주당 지구당에서 정·부통령선거 운동을 하면서부터 정치와 인연을 맺었다.
그 후 63년 11월 6대 총선에서 민주당 울산지구당 위원장 최영근의 참모로 일했다.
당시 최영근은 민주당 신파로, 구파였던 YS와는 정치적 노선이 달랐다. 때문에 최형우의 정치적 출발점은 민주당 신파였다.
최영근이 최형우의 도움으로 6대 선거에서도 당선되지만, 67년 7대 선거에서 낙선하게 된다. 이때 최영근은 제일생명보험회사 사장으로 들어가게 되고 이에 실망한 최형우는 정치판을 떠난다.
그러다 그는 69년 4월 대통령 박정희의 3선 개헌 저지를 위해 발족된 ‘4·19, 6·3범 청년회(위원장 이기택)’의 사무총장을 맡아 3선 개헌 반대투쟁을 벌이다, YS와 첫 대면을 하게 된다.
정확히 말해, 두 사람의 만남의 시점은 71년 7대 대통령선거 신민당 후보로 나가기 위해 YS가 무교동 광남 빌딩에 캠프를 차렸을 때다.
당시 최형우는 조윤형 의원의 소개로 YS와 첫 만남을 가졌다.
70년 4월 무교동 광남빌딩 703호에서 두 사람의 인연은 시작된다.
당시 YS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조병옥 박사의 아들이었던 고(故) 조윤형 의원은 YS와 최형우의 만남을 이렇게 회고 한 적이 있다.
“최영근 의원 비서관으로 있을 때 최형우를 알게 됐고, 모 인사(박희부)가 최형우를 YS에게 인사시켜 달라고 부탁해 정식으로 인사를 시켜주었습니다.”
하지만 둘의 첫 만남이 순탄하지 만은 않았다.
그해 울산·울주 지구당 위원장으로 선출된 최형우는 울산의 태화강변에서 대규모 단합대회를 개최할 계획을 세우고, YS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YS가 “시간이 없다”고 거절하자, 최형우는 “나 김영삼계 안 한다”며 곧바로 건너편의 삼흥빌딩 11층 김대중(DJ) 후보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최형우의 성격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후로 YS와 최형우는 여러 번의 갈등을 겪는다. 이 사건은 다음번에 소개하기로 하자.
DJ는 대통령후보 경선을 앞두고 원외위원장이 자기발로 들어왔으니 경사가 난 셈이었다.
DJ는 최형우를 환대했다. 행사 때마다 그를 데리고 가는 등 친밀감을 표시했다.
이를 안 YS캠프는 난리가 났다.
YS캠프로 유턴(U-Turn) 시키기 위해 특명을 받은 사람은 박희부.
박희부는 최형우의 동문이자 ‘4·19, 6·3범 청년회’ 멤버였다. 또한 조윤형을 통해 최형우를 YS에게 소개해 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박희부는 최형우를 설득했지만, “나 YS한테 안가”라며 최형우는 거칠게 밀어붙였다.
하지만 박희부가 ‘의리’를 내 세우자, 최형우는 다시 YS캠프로 돌아갔다.
그리고 최형우가 완전한 YS사람이 된 것은 그 후의 일이다. 8대 총선을 앞두고다.
최형우의 지역구인 울산·울주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정성을 들이던 곳이었다. 때문에 최형우의 당선은 신민당 내부에서조차‘가능성 없다’로 나왔다.
신민당 고위당직자들은 YS가 당선가능성이 적은 최형우 지역구보다, 가능성이 높은 곳을 한 번이라도 더 가서 지원유세를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YS는 단호했다.
“최형우 지역구는 무조건 가야한다. 최형우의 당선이 곧 나의 당선”이라며 고집을 부렸다. 결국 YS 고집대로 최형우를 지원 유세했고, 이는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실제 최형우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당시를 이렇게 밝혔다.
“8대 선거 때 신민당에선 내가 당선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는 가족들도 나의 당선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YS가 지원유세를 하면서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