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교동 DJ 자택] ‘민주화 투사 김대중’을 만든 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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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교동 DJ 자택] ‘민주화 투사 김대중’을 만든 그 곳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8.03.24 0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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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협상가’서 ‘투사’로 변신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 납치됐다 풀려난 후 기자들을 만난 DJ의 모습 ⓒ 김대중평화센터

봄 향기를 샘내는 추위가 전국을 덮친 3월 21일, 옷장 깊은 곳에 구겨 넣었던 패딩을 꺼내 입은 기자는 지하철 2호선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서울시 마포구 동교동에 위치한 故 김대중 전 대통령(DJ) 자택. 개헌(改憲) 논의가 정치권을 휩쓸고 있는 와중에, ‘87년 체제’를 만든 주역 중 한 명인 DJ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기 위함이었다.

DJ 자택은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4번 출구에서 가장 가깝다. 4번 출구로 나오면 동교동 삼거리가 있는데, 여기서 우회전을 해 신촌 방향으로 직진하면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보인다. 김대중도서관은 DJ가 연세대학교에 기증한 사료·자료를 모아 개관한 도서관으로, 한국 최초의 전직 대통령 관련 전문 학술 기관으로 기록돼 있다. 

▲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4번 출구에서 DJ 자택까지는 도보로 10분 거리다 ⓒ 시사오늘

신촌 방면으로 가는 큰 길에서 김대중도서관 방면으로 돌면, 곧바로 대통령 자택을 지키는 경찰들이 보인다. 이곳은 DJ가 1961년 입주해 1995년 일산으로 이사를 갈 때까지 머물렀던 집이다. DJ는 여기서 1971년과 1987년, 1992년 세 차례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또 이 사저에서 55차례나 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한국 정치사의 중심에 서 있었던 장소인 셈이다.

무엇보다도, DJ의 동교동 자택은 ‘민주화 투사 김대중’을 만든 곳으로 기억된다. 1963년, 민주당 소속으로 고향 목포에서 제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재선에 성공한 DJ는 1964년 국회 본회의 연설에서의 필리버스터를 통해 국민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공화당 정권이 한일협정 협상 과정에서 1억3000만 달러를 들여와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폭로한 자유민주당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을 부결시키기 위해,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5시간19분 동안 의사진행 지연 발언을 한 것이 화제가 됐기 때문이다. 

▲ 동교동 삼거리에서 신촌 방향으로 직진하면 김대중 도서관을 발견할 수 있다 ⓒ 시사오늘

1967년에는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며 정무위원 겸 대변인으로 발탁됐고,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는 ‘40대 기수론’의 한 축으로 등장, 대통령 후보 자리를 거머쥐면서 ‘젊은 거물 정치인’으로 이름을 떨친다. 급기야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인 끝에 석패(惜敗)하며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가시적 위협’으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유신 체제가 선포된 이후에는 해외에서 반(反) 유신 활동을 전개하면서 ‘박정희의 정적(政敵)’으로 위치를 확고히 했다. 이러자 박정희 정권은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의 그랜드팰리스 호텔에서 DJ를 납치, 암살을 시도했다. 나중에 DJ는 스스로를 ‘구국동맹행동대원’이라고 밝힌 요원들이 배를 탈 때 다리에 무게 추를 달았다고 증언했는데, 이 사실로 미뤄볼 때 박정희 정권은 DJ를 수장하려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 김대중도서관은 DJ가 연세대학교에 기증한 사료·자료를 모아 개관한 도서관으로, 한국 최초의 전직 대통령 관련 전문 학술 기관으로 기록돼 있다 ⓒ 시사오늘

다행히 동해 일본 측 해안에서 해상자위대 함정에 적발된 요원들이 계획을 변경, DJ를 동교동 자택 앞에서 풀어주면서 DJ는 천우신조(天佑神助)로 목숨을 구한다. <동아일보>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보도했다.

『지난 71년 7대 대통령선거 때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으며 전국회의원인 김대중 씨가 지난 8일 오후 일본 동경시내 그랜드팔레스 호텔에서 피랍된 지 만 5일 9시간 만인 13일 밤 12시20분쯤 서울 마포구 동교동 718의1 자택으로 돌아왔다. (중략) 김 씨는 이날 “8일 오후 5, 6명의 건장한 청년들에게 납치, 온몸이 묶인 채로 자동차로 5, 6시간 달려 오사카 부근에서 모터보트에 실려 큰 배에 옮겨진 다음 10여 시간 해상으로 끌려갔다가 천사일생으로 한국 해안에 회항, 11일 오후 7, 8시께 한국에 상륙, 초가와 양옥에 감금돼 있던 끝에 13일 밤 12시20분 쯤 붕대로 눈을 가리운 채 집 근방에 내려주어 돌아왔다”고 그동안의 경위를 밝히고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죽음 직전에서도 예수님께 꾸준히 기도하고 국내의 동포들과 일본을 비롯한 우방의 인사들이 걱정해준 덕택”이라고 말했다. (중략) 김 씨는 이날 밤 12시20분쯤 집 근처인 동교동사무소 앞에서 ‘크라운’ 같은 차에 실려 눈을 가리운 채 내려 청년들의 지시대로 삼분 동안 뒤로 돌아서 있다가 걸어서 집에 당도, 세 번 벨을 누르고 집안에 들어섰다고 말하면서 웃는 얼굴로 “나는 하도 겁나는 일을 많이 당해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놀란 가족들을 위로했다고 밝혔다.
1973년 8월 14일 <동아일보> ‘동경서 납치한 자칭 구국대원 김대중 씨 서울 자택에 데려다 놔’』

▲ 신촌 방면으로 가는 큰 길에서 김대중도서관 방면으로 돌면, 곧바로 DJ가 살았던 동교동 자택을 찾을 수 있다 ⓒ 시사오늘

이 사건 이후 DJ는 확실한 ‘민주화 투사(鬪士)’로 자리매김한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 납치사건 전까지 DJ는 ‘온건파’에 가까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주로 해외나 교포사회를 중심으로 반 정부 투쟁을 벌여온 까닭에,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같은 ‘싸움꾼’ 이미지는 옅었다는 것이 원로 정객(政客)들의 증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DJ는 ‘강력한 투사’ 이미지를 얻었고, 그 스스로도 이전에 비해 ‘정면 돌파’에 가까운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1973년 이전 DJ의 활동 무대는 주로 미국과 일본이었으나, 1973년부터는 국내에서 민주화 투쟁을 앞장서 이끌며 셀 수 없이 많은 옥고(獄苦)와 가택연금을 겪었다.

DJ의 정치적 동지였던 정대철 민주평화당 상임고문 역시 지난해 <시사오늘>과의 만남에서 “DJ는 투사보다는 협상가 스타일이었는데, 박정희가 DJ를 민주화 투사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1995년 일산으로 이사했던 DJ는 대통령에서 퇴임한 후 다시 동교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동교동 자택은 DJ가 퇴임하기 직전 연면적 198평에 지상 2층 지하 1층 양옥으로 신축한 집으로, DJ가 55차례나 가택연금을 당했던 당시와는 형태가 많이 다르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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