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 청산, ´내로남불´ 혼선 연속
자기성찰로 對국민 진정성 회복을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이병도 주필)
국가운영에 다시 적신호(赤信號)가 들어오고 있다. 분명한 경고등이다. 문재인 정권의 자체적인 결함 때문이기도 하고, 역대 정권들의 폐습 반복 경향도 보인다. 나라의 적폐를 파헤친 다면서, 정략적 행태를 떨치지 못한 데 큰 원인이 있는 것으로 진단된다.
김기식 금융감독원장과 관련된 의혹과 논란이 점입가경임은 물론, 이를 둘러싼 文정권의 기본 자세에도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피감기관과 민간기업의 돈으로 외유성 출장을 다녀온 사실만으로도 금감원장 자격이 없다는 비판이 봇물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스스로의 여러 해명도 거짓말로 파악되기 시작했다. 청와대의 대응도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文정권의 개혁은 고사하고 도덕성이나 독립성이란 말을 입에 올리기도 민망할 정도다. 도덕성 논란을 모면하려다 더 큰 비도덕의 함정으로 빠져드는 형국이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등 야당은 김 원장에 대해 뇌물·직권남용·공직자윤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고 국정조사도 요구했다. 범여권으로 분류되는 민주평화당과 정의당 까지도 “김 원장이 해명을 했지만 국민이 납득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며 “청와대가 상황의 엄중함을 깨달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김 원장에 대한 검찰 수사는 불가피하다. 이제는 윤리적인 문제를 지나 사법적 차원에서 다뤄야 할 수준까지 사태가 커졌다.
자기모순 도덕성
파열음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1차적으로 김 원장 개인의 부적절한 자기모순적 행동이 출발점이다. 김 원장은 19대 의원 시절 ‘로비’를 금지시킨 일명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제정에 앞장선 장본인이다. 바로 이 입법을 주도했던 그가 그 시점에 국회 예산이 아닌 피감기관 돈으로 해외 출장을 다녀왔으니, 그의 이중성에 국민이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을 넘어 오만의 극치란 비판을 받아도 마땅할 정도다.
여기에다 거짓말까지 계속 했다는 도덕성이 문제가 되고 있다. 2015년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주관한 미국·유럽 출장에 동행한 비서가 “경제·인문사회연구회 및 산하 연구기관을 총괄 담당하는 정책 비서”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정식 보좌진이 아닌 대학을 갓 졸업한 여성 인턴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문제의 핵심인 유착 특혜 시비와 관련, 그는 "(해당 출장 전후에) KIEP가 요청했던 유럽사무소 예산을 국회 심의 과정에서 반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했고, 청와대도 이를 근거로 김 원장의 출장에 하자가 없다고 했지만, 그가 출장 뒤 열린 예산 소위에서 관련 예산을 부대의견에 넣자고 요구, 실제로 2억9300만원이 2017년도 예산에 유럽 모니터링 사업이란 이름으로 반영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이 정도면 거의 뇌물 수준이다. 여기에다 대동한 여성 인턴이 출장을 다녀온 뒤 초고속 승진을 했다는 대목도 청년층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채용·인사 특혜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이어 2015년 5월 우리은행의 중국 충칭(重慶) 분행(分行) 개점 행사 참석과 관련, 김 원장은 “출장 일정은 매우 타이트하게 진행됐으며, 출장 목적에 맞는 공식 일정만 소화했다”고 했지만, 우리은행의 편의 제공으로 시내 관광을 다닌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은행은 이를 숨기기 위해 국회엔 김 원장이 현지 경영전략회의에 참석했다고 허위보고한 사실도 파악됐다.
그가 피감기관들의 돈으로 해외출장을 다녀온 것은 모두 세 차례다. 2015년 KIEP 예산 3000여만원으로 비서와 함께 미국·유럽을 열흘간 다녀온 당시 보고서에서 KIEP는 '의전(儀典) 성격 출장'이라고 적었지만, 인턴 접대에까지 국민 세금을 썼다. 2014년에는 한국거래소(KRX) 돈으로 보좌관과 함께 우즈베키스탄 출장을 다녀왔고, 2015년 5월에는 우리은행 돈으로 중국·인도 출장을 다녀온 것이다. 모두 김 원장 권한 내에 있던 기관들이다.
의혹의 불길은 그 외에도 더욱 커지고 있다. 의원 이전까지 거슬러 오른다. 2007년 당시 참여연대 사무총장 시절, 포스코 지원을 받아 1년간 미국 연수를 다녀왔다는 주장도 새롭게 고개를 들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대기업 비판자가 대기업 돈을 받아 미국 연수를 다녀온 셈이다. 금융사와 대기업 대관 업무 책임자들을 상대로 자신이 소장으로 있던 더미래연구소의 350만~600만원대 고액 강좌를 운영했다는 의혹도 새롭게 나오고 있다. 참석자에는 피감기관의 대관 담당자들이 대거 포함, 이익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재벌 개혁과 사회 정의를 누구보다 앞장서 외쳤던 시민운동가 출신으로서 그의 이중성을 실로 비판치 않을 수 없다.
'관행과 적폐' 의혹
김 원장은 피감기관 지원 출장에 대해 ‘19대 국회까지 남아 있던 관행’ 운운하며 물타기를 시도했으나 이런 해명은 국민적 공분만 키울 뿐이다. 관행과 적폐는 무엇이 다르고, 정권이 바뀌면 사안을 바라보는 잣대와 대응이 달라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국민적 의혹만 가중되는 상황이다. 관행이라고 해도 ‘국민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면 그것이 바로 적폐(積弊) 일 수 밖에 없다. 그가 숨고자 하는 ‘관행’이야말로 국민들이 그토록 청산을 요구하는 ‘적폐’임을 알아야 한다.
그가 주도한 김영란법의 제정 취지 역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접대 문화를 바꿔 로비 시비 자체를 없애자는 것이었다. 이 법이 시행된 2016년 9월 이전에 국회의원들이 그럴싸한 명분을 앞세워 피감 기관의 돈으로 외유성 출장을 다닌 게 공공연한 관행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엄밀히 보면 이 역시 '이해관계가 있는 자로부터 직ㆍ간접적 금품수수를 금지한’ 당시 국회 윤리규정 부터 위반한 것이다. 일예로, 지난 1991년 국회 상공위 소속 여야의원 3명이 자동차공업협회 후원으로 해외여행을 즐기다 뇌물수수 혐의로 처벌받은 사례도 있었다.
김원장은 지난 19대 국회 정무위원회 민주당 간사 때 금융개혁 강성 행보로 ‘저승사자’ ‘저격수’로도 불렸고, 실제 2014년 10월 한국정책금융공사 국정감사에서 임직원 해외출장과 관련해 “명백히 로비이고 접대”라고 질타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스스로 금융기관 등의 비용 지원을 받아 해외출장을 갔다 오고, 비판이 제기된 데 대해 변명으로 일관하며 사퇴 거부 의사를 밝힌 것은 전형적인 ‘내로남불’이 아닐 수 없다. 의혹을 있는 그대로 진실을 밝히기는 커녕 덮기에 급급한 모습은 국민의 불신만 키울 뿐이다.
김 원장의 이같은 잘못된 처신은 그가 문재인 정권의 핵심 인사였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점을 내포한다. 그는 문 대통령의 대선후보 시절 경제특보였고, 국정과제 입안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여권 싱크탱크인 더미래연구소 소장으로 일하면서 문 정부의 금융 개혁 밑그림을 그렸던 인물이다. 야당 의원 시절 금융권 낙하산 인사에 누구보다 비판적이었던 그가 낙하산의 당사자가 된 오늘의 현실 _ . 그의 피감기관 로비성 출장이 지난 국회의 관행이었다면 이제라도 외부 인사들이 참여하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진상을 가리는 것이 필요하다.
청와대와 여권 자세
그런 관점에서 청와대의 비호(庇護)는 더 심각한 문제다. 청와대는 김 원장 보호에 급급하다 거짓말에 동조한 결과가 됐다.
문 대통령이 김 원장의 위법 여부를 수사 중인 검찰과 도덕성 기준을 판별할 중앙선관위의 판단에 따라 '사임 여부'를 결정토록 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지만, 그간 청와대의 자세는 문제점 투성이다.
김의겸 대변인은 “김 원장의 출장은 의원외교 차원이거나 현장조사를 위한 것으로, 국민 눈높이엔 맞지 않으나 해임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결함으로는 보지 않는다”고 밝혔다. ‘심각한 결함’으로 보느냐 마느냐는 청와대 소관이 아니다. 공직 윤리와 법의 잣대로 평가하고 국민들이 판단할 일이다. 언론과 야당의 합리적 문제 제기에 귀를 기울이기는 커녕, 공연한 흠집 내기로 몰아가는 청와대의 인식은 안이하고 오만하다. 그동안 전 정권 비리에 대해서는 엄격하기 그지없던 청와대가 자기편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청와대는 “조국 민정수석이 확인한 결과, (김 원장의)해외 출장들은 공적인 목적으로 이뤄진 것이며 적법하다”는 설명도 내놨다. 그렇다면 조 수석 등도 부실 검증과 판단 오류의 책임을 면키 어렵다.
이와관련, 조 수석이 과거 참여연대에서 함께 활동한 인연으로 김 원장을 감싼 것이 아닌지도 면밀히 따질 일이다. 김 원장이 운영했던 더미래연구소 이사와 강사를 했던 조 수석의 검증한 결과가 그렇다고 하니, 조 수석에게 검증 업무가 맡겨진 것 부터가 불합리다. 문 정권의 취임 초심은 뒤로 밀려났고, 겸손한 권력과도 거리가 멀다. 다른 편의 ‘잘못된 관행’에 대해선 전직 대통령을 사법처리까지 하면서, 내 편의 그것은 옹호하고 나선 셈이다.
한때 문 정부는 강규형 명지대 교수를 KBS 이사진에서 쫓아내기 위해 감사원을 동원, 법인카드 사용 명세까지 털고 나섰다. 강 교수는 결국 2년 동안 327만원을 부당 사용한 허물로 이사직에서 해임됐다. 월 13만원을 잘못 쓴 ‘죄’였다. 그토록 엄정하던 정부가 이번 김 원장에 대해선 감싸기로 일관하고 있다. 왜 그때는 법의 잣대가 추상같고 이번엔 이토록 관대한가. 타인에게만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한 ‘고무줄 도덕성’으로는 국민을 설득할 수는 없다. 대통령의 지지율 고공행진에 갇혀 청와대가 봐야 할 것을 제대로 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
현 정부 출범 이후 부실 검증으로 인한 고위직 낙마는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청와대는 비판에 귀를 닫고 감싸기에만 바빴다.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의 격세상속을 이용한 탈세 때도 ‘국세청이 권하는 합법적 절세 방식’이라며 임명을 강행한 바 있다. 청와대 인사검증 시스템이 다시 도마에 오르게 됐다. 더 늦기 전에 이것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음모론’으로 몰고 가는 여당의 태도 또한 민심을 한참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김 원장을 “평소 소신이 있고 깐깐한 원칙주의자”라고 두둔하면서 이번 상황을 금융개혁을 좌초시키려는 정치공세라고 했다. 적폐청산을 하겠다면서 자기편에는 면죄부를 주는 것은 이중잣대이자 오기다. 금융검찰로 불리는 금감원장은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자리이기에 더욱 그렇다.
야당의 고발로 이제 김 원장에 대한 검찰 수사는 불가피해졌다. 문 정권과 정부 여당이 김 원장을 해임하고, 인사 검증 시스템의 쇄신과 인사 라인의 문책에 스스로 나서지 않는 한 결코 적폐는 청산될 수 없게됐다.
참여연대 행보
이번 사태는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의 도덕성에까지 문제를 제기케 하고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과 김 원장이 모두 참여연대 출신으로 '더미래연구소'에서 함께했던 것으로 밝혀진 것 외에도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을 비롯 사회혁신비서관, 공정거래위원장, 국민권익위원장 등 청와대 핵심인사들은 거의 모두 참여연대 출신이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한미연구소(USKI) 소장 축출 압력을 가했다는 홍일표 청와대 선임행정관도 그렇다.
참여연대 네트워크가 전성기를 맞은 듯하다. 그렇지만, 과거 국회의원이나 공무원의 외유성 출장에 대해 "유권자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감사원 감사 대상"이라고 했었던 참여연대는 이번 김 원장 문제엔 '노 코멘트'로 일관하고 있다.
거슬러 오르면, 참여연대의 '내로남불'과 도덕성 문제는 결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청와대 홍 행정관은 2006년 포스코 돈으로 미국 연수를 갔는데, 참여연대 사무처장을 지낸 박원순 서울시장이 당시 포스코 사외이사로 홍 행정관의 미국행을 도왔다는 전문이다. 대기업 비판에 앞장서던 참여연대가 대기업 후원 연수를 가는 데도 맨 앞에 섰던 형국이다. 뿐만 아니라, 2006년 서울 종로에 5층짜리 자체 건물을 지으면서 자신들이 편법 상속을 조사하던 대기업을 포함해 850개 기업에 '계좌당 500만원 이상씩 신축 후원금을 달라'는 사실상의 청구서를 보낸 적도 있었다.
문 정부는 최근 부동산 보유세제 개편을 주도할 재정개혁위원장에도 참여연대 출신 교수를 선출했다. 참여연대 전성기를 구가할 인물들은 이 정권 기간 중에 계속 늘어날 것이다. 권력에 중립적이지 않은 단체가 어떻게 시민단체라는 간판을 걸고 있는 것인지, 추궁치 않을 수 없다.
인사 개입 파행
빗나간 시민단체를 권력기반으로 하고 있는 문 정권의 이같은 실상은 정권 출범후 인사파행 사례에서도 문제점을 선명히 드러냈다. 인수위원회 없이 출범한 정부여서 검증이 소홀할 수 있을 것이란 측면이 있었으나 정도가 심했다.
취임 직후인 2017년 6월, 김기정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이 물러났을 때도 형식상 사의 표명이지만 사실상 경질이란 관측이 강했다. 임명된 지 불과 12일 만이었다. 사생활과 관련된 부적절한 처신이 문제가 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같은 달, 청와대 일자리수석으로 내정돼 근무 중이던 안현호 전 지식경제부 차관도 짐을 쌌다. 인사청문회 대상인 장관 후보자들의 도덕적 흠결도 결코 적지 않았다. 검증 시스템의 미비와 함께 청와대가 사전에 이런 사실을 알았지만 묵과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임기 만료 4개월을 앞두고 물러난 김인호 한국무역협회장의 '사임의 변'도 문 정부의 인사파행 흐름을 일깨운다. 김 회장은 2017년 10월24일 이사회에 사임서를 제출한 뒤 “정부가 사임을 희망하는 메시지를 보내왔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당시 사임 요구 주체와 관련, “지금까지 무역협회 인사에 산업부 수준에서 개입한 적은 없었다”며 사실상 청와대임을 시사했다. 무역협회장의 임기 도중 사퇴는 1999년 당시 구평회 회장 이후 처음이었다. 적폐 청산을 앞세운 문 정권이라면 잘못된 관행의 고리를 끊는 데 스스로 앞장서야 했음에도, 당시 김 회장이 시장경제를 강조하고, 현 정부의 경제 정책을 비판한 것이 마뜩잖아 급히 몰아내려 했다는 관측을 불러일으켰고, 더 나아가 신(新)적폐가 구(舊)적폐 뺨친다는 말까지 나오게 했다.
공공연히 사법부(司法府)를 흔들어 댄 행태도 지적치 않을 수 없다. 2017년 11월 김관진 전 국방장관과 임관빈 전 국방부 정책실장이 구속적부심을 통해 석방됐을 때 담당 판사(서울중앙지법 신광렬 형사수석부장판사)를 겨냥한 여권의 비난은 도를 넘었다. 여당 대변인이 결정을 맹비난하고, 의원들은 ‘떼창’ 운운하며 선동했다. 현 검찰의 무리한 적폐 수사도 문제이지만, 여권이 앞장서는 이런 반(反)법치 기류는 3권분립의 민주체제에서 더욱 위험한 일임이 분명하다. 자칭 진보정권이면서 ‘내편’ 아니면 ‘피의자 인권’도 내동댕이치는, 한심한 이중성을 엿보게 했다.
밀려난 취임 초심
이런 와중에도 한동안 문 대통령 지지율이 70%를 넘나들 정도로 높았던 것은 불공정 관행이나 비리와 결별하고 공정하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표면적 ‘사이다’ 행보에 많은 국민들이 박수를 보낸 방증이었다.
그러나 문 정권의 실제 행적은 비판이 아무리 정당해도 반(反)개혁으로 몰아붙이고, 높은 지지율로 덮겠다는 것에 다름아니었다. 높은 지지율이 무엇을 해도 무방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겸손한 권력, 낮은 대통령을 강조하며 “잘못된 관행과 완전히 결별하겠다”고도 했었다. 그렇지만 ‘인사 참사’가 되풀이되는데도 검증을 담당한 민정수석과 인사수석이 제대로 사과한번 한 적이 없었다. 탈(脫)원전, 최저임금 1만원 등 심각한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는 정책을 공약이란 이유로 밀어붙이고, 강남 부동산을 팔라면서 자신들은 여전히 갖고 있는 것도 국민의 눈으로는 납득키 어려웠다. 문 정권이 그동안 줄곧 주장한 ‘특권· 반칙 불용’의 원칙과도 거리가 멀었다. 취임 초심은 뒤로 밀려났고, 겸손한 권력과도 거리가 멀었다. 다른 편의 ‘잘못된 관행’에 대해선 전직 대통령을 사법처리까지 하면서, 내 편의 그것은 옹호하고 나선 것에 다름아니었다.
적폐청산을 한다면서 자기편에는 면죄부를 주는 것은 이중잣대이자 오기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인사피로’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양상이다. 정치권력과 코드가 맞으면 어느 정도의 문제점은 알고도 덮는 흐름이 곳곳에서 탐지되기에 이르렀다. 인사는 만사다. 문 정권과 청와대는 더 이상 인사 파행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부실한 인사검증에 대해서는 철저히 책임을 묻고 국민들 앞에 사과해야 마땅하다.
이중성 폐해 현대사 교훈
이중성을 극복키 위한 국가권력의 진정성이 무엇보다 촉구된다. 역사는 이를 증거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과거청산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우리는 일본과 독일의 진정성을 비교한다.
독일은 과거청산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성의있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전후 수십년간 정성을 다한 속죄를 통해 도덕성을 회복하고 거듭났다. 동서독 모두 치열한 과거사 반성과 청산작업을 단행, 옛 서독의 경우 나치범죄자 1만3,000명을 처벌했다. 이와 함께 주변국과 이스라엘 등 피해국가에 대한 거듭된 사죄와 피해배상, 경제지원 등에 힘을 쏟았다.
지난 70년에는 당시 빌리 브란트 총리가 나치에 학살된 폴란드 유태인 묘소를 방문, 몸 전체를 던져 용서를 비는 오체투지 사죄를 했다. 또 헬무트 콜 총리는 이스라엘 학살기념관을 방문, 과거의 잘못을 사죄하고 재정적 지원까지 제안하는 행보를 보였다. 독일의 과거청산은 일과성 발언으로 끝나지 않고 이렇게 지속적인 행동으로 실천해 왔다. 독일이 분단을 극복하고 유럽을 주도하는 위치로 발돋움한 것은 이같은 도덕적 처신을 주변국이 인정한 데 따른 것이다.
이와 비교할 때 일본의 과거청산 노력은 미비하기 짝이 없었다. 2차대전 중 100만명이 넘는 한국과 중국, 필리핀인을 전쟁과 강제노역에 동원한 일본은 피해자들에 대한 개별배상을 미루고 있다. 종전 반세기를 넘겨 올 4월 징병과 징용 피해자 중 재일동포 생존자와 유족에게 위로금을 지급하는 법안을 의회에 상정하는데 그쳤으며, 이마저 아직 통과되지 않고 있다. 탈냉전후 세계는 21세기의 밝은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가고 있음에도, 유독 일본만은 군국주의 망령에 발목이 잡혀 뒷걸음질치려 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것은 일본인들 스스로도 더욱 잘 알 것이다. 세기를 넘어 이어진 독일의 속죄자세에서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진정성을 결여한 최근 국내 정치 파행 사례도 거듭 되새겨져야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집권당시 세월호 참사 14일 만에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국가안전처 신설 등의 대책을 내놓았었지만, 사과의 형식이나 내용을 보면 사과라는 말을 붙이기조차 민망할 정도였다. 미증유의 국가적 대참사에 대해 대통령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국민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 했음에도, 죄책감이나 책임의식 등 진정어린 단어는 당시 박 대통령과는 거리가 멀었다.
국민에 대한 직접 사과 대신 국무회의를 통한 간접 사과 방식을 택한 것도 그렇고, 사고의 원인을 “과거의 잘못된 적폐” 탓으로 돌린 대목에 이르면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였다. 당시 박 대통령은 ‘내 탓’은 커녕 사건의 책임을 철저히 과거 탓으로 돌렸다. 눈앞의 배를 뻔히 바라보면서도 제대로 초동대응을 하지 못해 그 많은 아까운 생명을 잃은 것이 과거 적폐 탓이었던가. 컨트롤타워의 부재로 그 순간까지도 정부가 우왕좌왕 한것이 과거 탓이었던가. 박 대통령은 과거 적폐를 말하기 전에 당시 정부의 총체적 무능과 무책임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하고 사과했어야 옳았다. 과거의 적폐를 도려내겠다고 큰소리치기 전에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 안에 도사린 적폐부터 도려내겠다고 다짐했어야 했다.
총리실 직속으로 국가안전처를 신설하겠다는 것도 병의 정확한 원인이 나오기 전에 처방전부터 내놓은 격이었다. 당시 정부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사고의 근인과 원인, 시간대별 조처의 문제점, 부처간 혼선의 원인 등을 광범위하면서도 꼼꼼하게 진단하는 일이었다. 이런 과정은 건너뛴 채 무턱대고 새로운 부처 하나 만들면 안전한 나라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땜질 처방이었다. 진정성은 크게 결여돼 있었다. 심지어 박 대통령은 ‘국가 개조’까지 말했지만, 그런 식으로는 국가 개조가 결코 이뤄질 수 없음이 분명했다.
부정부패 근절도 마찬가지다. 역대 모든 정권이 내건 목표였지만 방법과 수순에 따라 결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정권이 바뀌면 지난 정권에서 부당한 피해를 보았다는 측의 신고나 투서가 폭증해 이른바 ‘사정(司正) 정국’이 조성되기 쉬웠다. 그러나 정권 초기 정치권력이 주도하는 사정은 일시적 효과는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되고, 5년 뒤엔 그 권력 자체가 다시 사정 대상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되풀이 됐다. 정치적 반대 세력엔 가혹하고, 현행 권력 측에 대해선 덮어주는 식이 수시로 되풀이됐다. 이번 문 정권 역시 마찬가지 흐름이다.
청산과 통합
적폐청산과 통합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적폐청산은 우리 사회를 불공정하게 만드는 시스템을 청산하자는 것이요, 통합은 갈기갈기 찢긴 우리 사회를 하나로 묶자는 것이다.
잘못을 적당히 덮자는 게 통합일 수는 없다. '내 것은 봐주고 남의 것은 응징하는' 빗나간 적폐청산은 갈등만 일으킬 뿐이다. 그런 식으로는 통합 자체가 불가능하다. 잘못을 방치한다는 것은 새로운 갈등과 분열의 씨앗을 키우게 된다. '적폐 관행 청산'은 스스로에게 더 엄격해야 한다. 상대 진영에만 가혹하면 ‘정치 보복’ 비판론만 설득력을 높히게 할 뿐이다. 이번 사태 역시 김 원장 스스로 거취를 정리하고 검찰 조사를 자청, 시비를 가리는 것이 정도(正道)가 될 것이다. 문 정권 또한 이번 사태가 정확한 자기성찰과 대한민국 국가운영 방식에 대한 진정한 반성 및 쇄신의 계기가 돼야 할 것임을 강조한다.
이병도는…
1952년 경남 진양에서 출생했고 서강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 1979년 동양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한 후 1981년 연합뉴스로 자리를 옮겨 정치부 야당출입 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해 왔다. 저서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