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추협 발족의 1등 공신…계파를 초월한 마당발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병묵 기자)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민추협을 만드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2009년 본지 인터뷰 中
후농(後農)의 마지막 길은 사람으로 두터웠다. 김상현 전 민주당 상임고문이 18일 세상을 떠났다.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에 마련된 김 전 고문의 장례식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빼곡한 조기(弔旗) 사이사이로 정치권 인사들의 조문이 줄을 이었다.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를 초월하고 정당을 떠나 모두가 시대를 풍미한 정객을 추모했다.
김 전 고문은 제도권 한국 민주화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현대 정치사에서 그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현 더불어민주당 김영호 의원의 아버지기도 하다. 그의 당적(黨籍)은 수 차례 바뀌었지만, 대개 ‘명분’을 택한 결과다. 그래서 상도동계 원로인 유성환 전 국회의원은 “김상현 씨는 명분에서 늘 이기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935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김 전 고문은 1965년 31세에 민중당 소속으로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7대와 8대 3선을 기록했으나,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피선거권을 박탈당했다.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에서 수 차례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정계 입문 전부터 이미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친분이 있었던 김 전 고문은, 그의 정치 파트너이자 조력자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DJ의 1970년 ‘40대 기수론’ 참여를 이끌면서 결국 DJ를 1971년 대통령 후보로 만들어낸다.
“김영삼과 이철승이 40대 기수론의 기치를 내걸고 나왔지만 김 전 대통령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 40대 기수론에 동참하지 않으면 앞으로 지도자 대열에서 영원히 탈락할 수 있으니 선언에 동참해야 한다’고 했더니, 김 전 대통령은 ‘아무런 준비도 안됐는데 어떻게 할 수 있느냐. 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선언이 준비’라고 설득했습니다. 제가 서울의 ‘뉴 서울호텔’에서 차 한 잔 하자고 만난 자리에서였습니다. 저는 김 전 대통령에게 40대 기수론에 참여해야 정치적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했지요. 그랬더니 김 전 대통령이 ‘하루만 생각하고 내일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다음 날 ‘풍림’이라는 한정식 식당에서 만났습니다. (40대 기수론에) 동참의 뜻을 밝혔습니다. 나 아니었으면 김 전 대통령이 40대 기수론에 참여하지 않았을 겁니다.”
2009년 본지 인터뷰 中
장례식에 참석한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이날 기자와 만나 김 전 고문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DJ에겐 원래 김상현 한 사람 뿐이었다. 의원들 중에서 유일하게 DJ를 지지했다. 나중엔 사이가 벌어지고 말았지만…, 누구보다 친밀한 사이였다”
민주화 운동을 누구보다도 열렬히 했던 김 전 고문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발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1983년엔 미국에 있던 DJ를 대신해 동교동계 대표로 민추협 의장권한대행을 맡았다. 상도동계의 의장은 김영삼(YS) 전 대통령이었다. 민추협이 주축이 된 신한민주당은 돌풍을 일으켰고, 결국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김 전 고문은 1987년, 통일민주당 분열 당시 DJ의 평화민주당에 합류하지 않았다. 군정종식을 위해 끝까지 양김의 단일화를 주장했다. DJ의 반대를 무릅쓰고 민추협을 만든 것도 DJ와의 결별 원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1987년 대선 때입니다. 당시에 나는 YS와 DJ가 무조건 단일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표가 갈라지면 노태우가 이기는 건 너무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YS-DJ 단일화 100만인 서명운동도 벌였고, 99만 명 정도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DJ가 평민당을 만들어 나갔고, 나는 그때 따라가지 않았죠. 사실상 DJ와 멀어진 것은 그 때 입니다.”
-2014년 본지 인터뷰 中
김 전 고문은 3당 합당에 반대하며 또 한 차례 당에 남는다. 세간에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3당 합당 반대 사진’으로 알려진 바로 그 때다. 이후 다시 DJ와 합류하며 국민회의와 민국당을 거치며 14대~15대, 16대 보궐선거까지 당선되며 6선 의원이 됐다.
하지만 이후 17대 총선에서 낙선하며 일선 정치에서 물러섰다. 김 전 고문이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정대철 대권, 김상현 당권을 주장하면서 대외적으로 DJ와 동교동계 주류의 미움을 산 것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이와 관련된 정대철 전 국민의당 상임고문은 기자와의 만남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날 장례식장엔 정 전 고문과 그 아들인 정호준 전 의원도 이른 시간부터 자리를 지켰다.
“저도 그렇고, 후농은 당내 민주주의자였습니다. 정당이란 건 아무리 유력한 후보가 있더라도, 당연히 민주주의적으로 경선을 통해 후보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DJ에게도, 민주당에도 더 좋은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기사를 작성하는 중에도 조문객들은 쉬지 않고 몰려들었다. DJ의 삼남인 민주당 김홍걸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은 기자에게 “평소에 늘 베풀고 사시던 분 아닌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그분이 정치를 하시는 방식에 있어서야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 김상현에 대해선 모두가 좋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나이 지긋한 조문객에게 ‘기자가 도착하기 전에 또 어떤 이들이 다녀갔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김 전 고문의 장례식을 한 문장으로 표현해줬다.
“기자양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후농 김상현이 가는 길이여. 온 사람을 세는 것보다 안 온 정치인을 세는 것이 빠르다 그 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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