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체제 5주년 맞아 '뉴삼성' 건설 사활
AI-인재경영 앞세워 '글로벌 신경영' 박차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김기범 기자)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1993년 6월 7일 지천명(知天命)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 경영진 회의에서 부르짖은 일성(一聲)이다.
당시 삼성의 위기의식을 반영한 이 회장의 이 일갈은 파격(破格) 그 자체였다. 동시에 오늘의 글로벌 ‘넘버 원’이 있게 한 밑바탕이었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일컬어지는 이 회장의 '신사고(新思考)'는 이후 삼성이 펼치는 ‘신경영’의 지표가 됐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있은 지 정확히 25주년이 된 지금 삼성전자는 조용하다.
예전의 기념행사는 일체 생략됐다. 삼성그룹 창업자인 故 이병철 회장을 기리는 '제28회 호암상 시상식'에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한 총수 일가는 참석하지 않았다.
최근 이 부회장의 공식석상 모습으론 지난달 20일 故 구본무 LG그룹 회장 빈소를 가장 먼저 조문하는 장면이 포착됐을 뿐이다. 지난 2월 출소 이후 아직 대외적으로 경영 복귀를 공표하지 않은 이 부회장의 왠지 부자유스러운 현재 상황이다.
하지만 이 부회장의 요사이 ‘정중동’ 행보는 암묵적인 만큼 묵직하다.
삼성의 혁신과 미래 먹거리 창출을 위해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조용한 가운데 늘 새로운 것을 갈구(渴求) 하고 있다. 부친인 이 회장의 25년 전 모습과는 다소 다른 듯해도 분명 닮은 이유다.
지난 3월 말부터 시작된 이 부회장의 해외 출장은 늘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유럽과 캐나다 방문으로 시작된 그의 외유(外遊)는 매달 이어지고 있다. 특히, 지난달 초 중국 선전(深圳) 샤오미 매장에서 찍힌 그의 사진은 삼성의 현재 고민을 보여주는 듯 했다.
세계 최대 스마트폰 시장인 중국에서 삼성전자는 지난 1분기 1.3%의 점유율을 보였다. 그나마 0.8% 시장점유율을 보인 작년 4분기보다는 나아진 수치다.
‘가성비’로 무장한 중국 현지의 화웨이(21.2%)나 샤오미(13%)는 그렇다 치더라도, 세계시장 1·2위를 다투는 애플(9.4%)에게도 상대가 안되는 형국이다.
25년 전 위기의식의 발로에서 신성장 동력 창출을 위해 절치부심(切齒腐心) 했던 이 회장의 심정이 다가오는 대목이다.
선전에서 중국 굴지의 IT 기업 CEO들을 만난 이 부회장의 해외 출장은 지난달 31일 홍콩행으로 이어졌다. 아직까지 그의 귀국은 이뤄지고 있지 않지만, 그 사이 삼성전자는 인재 영입을 발표했다.
결국 시대의 변곡점에서 ‘S급’ 인재 영입이라는 삼성 특유의 전가보도(傳家寶刀)가 발휘된 것이었다. 더해진 것이 있다면 바로 ‘인공지능(AI)’이다.
지난 4일 삼성전자는 AI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세바스찬 승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와 다니엘 리 펜실베니아대 교수를 영입했다고 밝혔다. 두 교수는 ‘삼성리서치(SR)’에서 AI 전략 수립과 로보틱스 관련 연구를 담당할 예정이다.
이는 지난해 11월 신설된 한국 AI 총괄센터와 함께 올해 미국·영국·캐나다·러시아 AI 연구센터 개설과 맞물릴 전망이다. AI 연구에 있어 글로벌 5대 거점을 마련한 삼성전자의 향후 행보는 2020년까지 관련 인재 1000명 영입 계획과 궤를 같이 한다.
삼성전자의 인재 수혈은 계속됐다.
지난 5일 삼성전자는 데이비드 은 삼성넥스트 사장을 최고혁신책임자(Chief Innovation Officer:CIO)로 임명했다고 밝혔다. 하버드 출신의 미디어 전문가인 은 사장은 지난 2006년 재직하던 구글에서 유튜브 인수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CIO는 새로 생긴 직책이지만 은 사장은 자신이 맡았던 기존 유망 스타트업 발굴과 인재 확보는 물론 혁신 업무까지 담당하게 될 것˝이라며 앞으로 삼성이 기울일 무게 중심을 암시했다.
재계에선 이 부회장이 세계 주요시장을 다니며 전사적(全社的) 차원의 신성장 동력 발굴과 인재 영입에 힘썼다는 분석을 공통으로 내놓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의 저력은 ‘한 명의 천재가 수십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소위 ‘천재론’에 입각해 전통적으로 인재 영입에 공격적 투자를 아끼지 않는데서 나온다˝며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중대한 시기마다 위기 상황을 정확이 인식하고 이를 관리와 혁신으로 극복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이 회장이 신경영을 내세웠던 25년 전과 지금은 분명 삼성을 둘러싼 현실이 다르다.
지난달 1일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대기업집단 지정 현황을 보면 삼성그룹의 지난해 총 자산은 744조5900억 원이었다. 1993년 당시보다 18배 늘었다.
삼성전자의 경우 올해 1분기 매출 60조5600억 원, 영업이익 15조6400억 원을 기록했다. 분기 최대 실적이다. 하지만 외형 못지않게 삼성 주변의 대내외적 환경은 더욱 크게 변했다.
현 정부의 삼성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압박은 연일 그 수위가 올라가고 있다. 여기에 삼성을 둘러싼 싸늘한 국민여론도 현재의 반기업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한진그룹에 집중된 '오너 리스크' 문제는 연일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며 '대기업 규제론'에 힘을 싣는다.
아울러 삼성전자를 둘러싼 대외적 분위기도 녹록치 않다.
사드 문제에서 비롯된 한중관계의 경색 국면은 지난 1년간 국내 산업계에도 피할 수 없는 파고를 만들어냈다. 국가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던 조선·해운·중공업 분야는 긴 터널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가운데 중국의 추격세는 만만치 않다.
반도체와 스마트폰으로 대한민국 경제를 외롭게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 삼성전자의 그늘이다.
이 부회장의 부친인 이 회장은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던 시절에도 삼성그룹 내부 반대에 맞서 개인 사재를 출연하고 인재를 직접 뽑으며 반도체 신화를 일궈냈다.
다만, 이 회장이 반도체를 키웠듯 오늘날 이 부회장의 안목은 AI에 집중되고 있다.
AI의 큰 그림을 그리는 이 부회장이 현재 자신 나이의 부친이 이뤘던 신화와 혁신을 계속 이어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좌우명 : 파천황 (破天荒)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