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前대통령 서거> 탄생에서 서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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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前대통령 서거> 탄생에서 서거까지
  • 차완용 기자
  • 승인 2009.08.21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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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옥·망명·대통령 당선·노벨평화상… '파란만장한 삶'

'인동초(忍冬草)'는 이름처럼 겨울을 이겨내는 꽃이다. 이 풀은 엄동설한에도 잎과 줄기가 얼어 죽지 않고 견디다가 이듬해 여름이 되면 화사한 꽃을 피운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인동초라는 별호가 붙은 것은 거의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혹독한 겨울을 여러 차례나 겪었지만 그때마다 마치 인동초처럼 살아나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김 전 대통령은 인동초처럼 굴곡 많은 한국 현대 정치사를 풍미했다. 1973년 도쿄 피랍사건 등을 비롯해 5차례의 죽을 고비와 5년여의 감옥생활, 6년여의 가택연금, 3년의 망명생활 등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은 파란만장했다.

한국 정치사에서 ‘3김(金)시대’의 한 축이었던 고인은 1997년 15대 대통령에 당선돼 반세기 만에 선거를 통한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이러한 김 전 대통령의 ‘인동초’와 같은 삶을 탄생에서부터 지난 18일까지 총 85년간을 시사오늘에서 되짚어 봤다.
 

▲ 1971년 박정희와 대결했을 때 지방유세     © 시사오늘


◇김 전 대통령의 탄생과 유년기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23년 음력 12월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아버지 김운식씨와 어머니 장수금씨 사이에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나중에 일제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출생연도를 1925년으로 고쳤다고 한다. 하의면은 목포에서 뱃길로 150리 떨어진 외진 섬이다. 후광리는 그의 아호 '후광'이 됐다.

김 전 대통령이 하의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부모는 아들 교육을 위해 육지인 목포로 이주했으며, 김 전 대통령은 목포제일보통학교(현 목포 북교초등학교)로 전학했다. 1939년 이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며 목포일보 사장상을 받았다.

이어 당시 지역 명문인 목포공립상업학교(현 목포상고)에 진학했다. 1944년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그는 진학의 꿈을 접어야 했다. 명문대였던 만주건국대에 응시했지만 서류전형에서 낙방한 것이다. 그는 재수를 포기하고 목포상선회사에 취직했다. 일제의 징용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몽양 여운형 선생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으나 곧 탈퇴했다. 그해 그는 목포상선회사의 경리관리에 이어 재산관리인으로 선정되고, 11월엔 대표가 됐다. 그의 사업은 고속성장을 거듭했다. 전남선박 목포조합장, 대양조선 사장 등을 거쳐 48년 목포일보를 인수해 주필까지 겸하게 된다. 1951년엔 목포해운(흥국해운) 사장에 이어 전남해운조합 회장으로 취임했다. 1945년엔 미모가 뛰어났던 차용애씨와 결혼해 48년 큰아들 홍일씨를 낳았다.
 

 


▲ 1979년 석방후     © 시사오늘

◇‘인동초’처럼 4전5기 끝에 피어난 정치역정
그의 정치역정은 ‘4번의 죽을 고비’라는 표현처럼 파란만장했다.
김 전 대통령의 정치참여는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이후 3·4·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연거푸 낙선하고 말았다. 세 번의 낙선으로 가산은 탕진됐고 부인 차용애씨와 누이동생마저 1960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1961년 36살에 강원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4전5기'에 성공했지만, 사흘 만에 5·16 쿠데타가 터져 의원직을 잃었다. 군정 기간 그는 반혁명사건에 연루돼 두 차례에 걸쳐 한 달 남짓 감옥생활을 했다.

시름에 빠져 있다가 ‘평생의 동지’ 이희호 여사를 만난 건 2년 뒤인 1962년이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1963년 6대 총선에서 목포로 옮겨 노동조합의 지지와 목포상고 동창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개원 초기 6개월 동안 본회의 13차례 발언, 본회의 최장인 5시간19분 발언 등 여러 가지 기록을 세웠다. 1967년 7대 총선에서 박정희 정권은 그를 떨어뜨리기 위해 정권 차원의 '낙선운동'을 벌였지만, 또다시 당선돼 이름을 날렸다. 1971년 대선에서 그는 '박 대통령의 영구집권 음모'를 폭로하고, 미·일·중·소 4대국의 한반도 안전보장안을 제시하는 등 박 대통령을 위협했다. 결과는 95만표 차이의 패배였다.
 
◇박정희·전두환 정권 눈엣가시…수차례 죽을 고비
박 정권 최대 위협요인으로 부상한 김 전 대통령은 이후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1971년 8대 총선 지원유세 과정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고비를 맞기도 했다. 의문의 사고였다. 그는 고관절 변형증으로 지팡이에 의지하는 신세가 됐다.
 
또 1972년 유신개헌 당시 일본 체류 중 도쿄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돼 바다에 수장될 뻔한 위기도 맞았다.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 전신)가 꾸민 일로 정권 차원의 정적 제거 기도였다.
1979년 10·26사건으로 복권돼 정치활동을 재개했지만 1980년 5월 17일 또다시 신군부에 의해 구속되면서 더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신군부는 김 전 대통령에게 내란음모죄, 반국가수괴죄로 사형을 선고했던 것. 다행히 미국 정부의 압력으로 사형을 면하고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 김대중 가택연금     © 시사오늘

◇대권 향한 도전과 좌절…'3전4기' 정권교체 신화
망명생활 중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함께 민추협을 발족했고, 1985년 입국 뒤 치러진 제12대 총선에서 ‘신민당 돌풍’을 일으키며 정국의 중심인물로 복귀했다. 그는 2·12 총선 직전 미국에서 귀국해 71년 대선 패배 이후 타의에 의해 중단했던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1987년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은 이뤄졌지만 김 전 대통령은 그해 대선에서 YS와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다.
 
호남을 기반으로 독자출마하는 승부수를 던진 것. 그러나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YS와 함께 야권분열 책임론에 시달렸다. 이듬해 1988년 13대 총선에서 평민당을 제1야당으로 만들어 여소야대 정국을 주도했지만 곧이어 민정, 민주, 공화의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에 포위되고 말았다. 이후 야권을 재정비한 뒤 1992년 대권 3수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또다시 낙선해 참모들과 지지자들의 통곡을 뒤로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영국에 6개월 동안 머문 뒤 귀국한 그는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해 통일 연구에 몰두했다. 집도 아예 동교동에서 일산으로 옮겼다. 하지만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1995년 지방선거 지원 유세는 그에게 정계 복귀의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민주당은 서울시장을 차지했고, 그는 1995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6년 4·11 총선에서 국민회의는 겨우 79석을 차지해 그의 정치적 생명을 위협했으나, 1997년 5월 당내경선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됨으로써 '마지막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199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과거와 전혀 다른 전략을 세웠다. '지역연합론'을 바탕으로 자민련의 김종필·박태준씨와 손을 잡은 것이다. 여기에 여당 후보의 분열, 외환위기 충격이란 상황에 힘입어 마침내 대통령 선거 3전4기의 신화를 완성했다.
 
◇국민의정부 출범과 남북 정상회담
1998년 2월25일 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는 '국민의 정부'를 표방했다. 당선의 기쁨을 누릴 여유는 없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지표로 내세우고 외환위기 극복이라는 당면 과제에 매달렸다.
 
그는 과감한 경제개혁 조처를 추진했고, 그 결과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조기 졸업이라는 성과로 나타났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했고,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과 국민기초생활법을 제정했다. 정보통신 산업 부흥과 벤처 붐도 일으켰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은 재임 동안 남북문제에 가장 큰 열정을 쏟았다. '햇볕정책'이라고 불린 그의 대북 포용정책도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외교·안보 정책의 핵심 목표로 설정한 그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화해의 메시지를 꾸준히 보냈다.
 
결정적인 것은 남북 당국간 경제협력을 제의한 2000년 3월9일의 베를린 선언이었다. 그는 2000년 6월13일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해 김정일 위원장과 포옹했다. 그리고 평양을 떠나기 전 역사적인 6·15 남북 공동선언문에 합의했다.
 
◇한국인 최초 노벨평화상 수상
김 전 대통령은 재임 중인 2000년 생애 14번째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다. 그해 노벨평화상 부문엔 빌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을 비롯한 115명, 35개 단체가 몰려 사상 최대 경쟁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노벨상위원회는 그의 손을 들어줬다. 그동안 민주주의와 인권, 한반도 평화에 기여한 점이 높이 평가돼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영광 뒷면의 그림자도 짙었다. 지역감정 해소를 집권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그였지만, 대통령 재임 기간 지역갈등은 오히려 격화했다. 햇볕정책에 대해서도 '퍼주기'라는 말이 끝없이 나돌았다.
 
2001년의 언론사 일제 세무조사는 가뜩이나 좁은 그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압박했다. 경제위기 극복 차원에서 장려한 신용카드 발급은 임기 말이 되자 신용불량자 급증이라는 부작용으로 나타났다.
 
2000년의 4·13 총선에서 그는 '모든 것'을 쏟아 부었지만, 원내 1당은 한나라당이 차지했다. 임기 말이 되자 자식들의 비리가 쏟아져 나왔고, 둘째와 셋째 아들이 구속되는 아픔을 겪었다. 심장혈관질환과 만성신부전이 악화하는 등 건강도 급격히 나빠졌다.
 
◇시민으로 돌아가다
2003년 2월 김 전 대통령은 ‘위대한 국민에의 헌사’라는 대국민 퇴임사를 낭독하고 청와대를 떠났다. 시민들의 환호 속에 동교동 사저로 돌아온 그는 ‘시민 김대중’으로 새 삶을 시작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답게 전 세계를 돌며 인권과 남북관계에 대한 강연 및 연설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고, 때때로 국가 원로로서 정치권에 ‘훈수’를 두기도 했다. 특히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발언 수위는 점점 높아졌다. 지난해부터 정국을 ‘민주주의, 남북관계, 서민경제의 위기’로 규정하고 현 정부에 강력한 비판의 메시지를 쏟아냈다. 민주당엔 민주평화개혁세력의 통합도 주문했다.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김 전 대통령에게 육체적·심리적으로 커다란 충격이자 시련이었다. 그는 “내 몸의 반쪽이 무너져내리는 심정”이라고 비통함을 전했다. 노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휠체어에 앉아 오열하던 모습은 국민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병색이 급속히 악화된 김 전 대통령은 2009년 8월18일 결국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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