⑪ 무너진 ‘대권 꿈’
YS가 대통령에 오르자 최형우는 거칠 게 없었다. 대권을 향해 순항했다. 한 때 신한국당 내 대의원 3분의 2이상의 지지를 이끌어내, ‘신한국당 대선후보=최형우’라는 등식이 나돌았다.
하지만 YS는 본선에서 경쟁력이 없다며 이원종 정무수석 등을 통해 최형우의 대권행보 중단을 요구했다. 마침내 이 문제로 담판을 짓기 위해 최형우는 청와대로 들어갔다.
97년 2월말.
최형우는 YS와 담판을 짓겠다며 청와대로 갔다.
YS를 만나기 위해 붉은 주단이 깔린 청와대 2층 집무실을 올라가면서 최형우는 주머니에서 작은 메모지 한 장을 꺼내서 폈다.
‘대권포기 없다, YS와 민주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메모지 안에는 YS와 만나 대권행보를 포기할 수 없다는 나름대로의 논리가 적혀있었다.
청와대 집무실에 들어가자 YS는 최형우를 반갑게 맞이했다.
최형우는 사족을 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퇴임 후에 우리 민주계를 살리고 형님을 살리는 길은 이 길(대권도전)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최형우는 자신이 대권에 도전해야 하는 논리를 열심히 설명했다. 설명을 듣고 있던 YS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YS는 감동을 하거나 감정이 복받칠 때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YS는 아무런 얘기도 없이 자신의 책상서랍에서 10여 페이지 정도로 작성된 보고서를 최형우 앞에 내놓았다.
“이게 뭡니까.”
“나야 왜 너를 생각(대권)하지 않겠어, 하지만 이 보고서를 봐라.”
보고서를 훑어 본 최형우는 깜짝 놀랐다.
보고서 안에는 최형우가 DJ를 비롯한 정대철 등 야권후보로 거론되는 인사들 중 그 누구와 대선전을 치러도 승산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이런 보고서를 누가 작성한 겁니까.”
YS는 아무 말 없이 최형우에게로 다가가 두 손으로 최형우의 오른손을 꽉 잡았다.
“우리가 같이 한 세월이 몇 년이꼬.”
“69년에 만났으니, 한 30년 됐습니더.”
최형우는 일부러 딱딱하게 답했다.
“왜 온산(최형우의 아호)을 생각하지 않겠어, 하지만 사이즉생(死而卽生) 아이가, 이번만 참아줘야겠어.”
YS는 최형우의 아호까지 써가며, 대권행보 중단을 요구했다.
“……”
최형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저 갑니다.”
간단한 말을 하고 청와대 집무실을 나오려고 하자, YS는 간곡히 최형우의 손을 잡으며 다시 한 번 대권행보 중단을 요구했다.
2층 청와대 집무실에서 나온 최형우는 눈물이 핑 돌았다. 자신의 정치생활 30여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려오는 계단 옆에 난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그 중 난 하나를 집어들은 최형우는 아래로 세차게 집어던졌다.
“언제나 지 맘대로야.”
청와대를 나온 최형우는 마포 21세기 정보화전략 연구소로 황명수 서청원 노승우 등을 불러 대책회의를 했다.
결론은 대권행보 포기였다.
이날 이후 최형우는 대권을 포기하고 당권을 노렸다. 즉 당권을 잡아 ‘킹메이커’가 되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당 대표는 자신이 맡고, 그동안 자신을 지지해 왔던 대의원들의 표를 한쪽으로 몰아준다는 계획이었다.
최형우가 누구를 ‘킹’으로 생각했는지는 아직까지 알려진 게 없다. 확실한 건 ‘이회창만큼은 대권을 못잡게 한다’는 생각이었다.
다만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상 최형우가 대통령으로 ‘DR(김덕룡)’을 점찍지 않았을까란 추측은 해볼 수 있다.
대권포기를 하고 난 후 97년 3월 어느 날 이른아침.
최형우는 김덕룡 서석재 등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대권논의를 하기 위해 만났다.
무슨 내용이 오고갔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날 논의를 하고 난 후 최형우는 ‘뇌일혈’로 쓰러지며 사실상 정치생활을 마감했다.
그리고 2005년 9월 5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최형우의 고희연이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YS와 손명순 여사를 비롯해 박관용 신상우 서청원 서석재 김덕룡 손학규 박종웅 안경률 등이 참석했다.
최형우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들어오는 인사들에게 더듬더듬 “안-녕-하-세-요”만 되풀이 했다.
그리고 YS와 만나는 순간, 최형우는 97년 담판의 그날처럼 두 손을 꼭 잡았다.
YS도 그날이 생각났는지 이렇게 답했다.
“온산이 건강했다면, 오늘날 정치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계속>
<최형우의 정치 에필로그>
YS 측근임에도 불구, 김상현 박철언 등 칭찬 아끼지 않아
다만 이회창과는 악연, 최형우 이회창 이름만 나오면 ‘거품’
최형우는 정치를 하는 30년 동안 늘 YS의 오른팔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야를 넘나드는 정치를 해왔다. 물론 불의에 타협하는 정치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특히 ‘꼼수’를 쓰지 않았기에 모두 그를 좋아했다.
민주당 김상현 상임고문에서부터 한때 YS의 정적이었던 박철언 전 장관까지 최형우에 대한 평가는 좋다.
박 전 장관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YS에 대해 불쾌한 심정을 드러냈지만 최형우에 대해서는 “남자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정치인”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유독 최형우와 거리를 둔 정치인이 이회창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게 된 것과 관련해 몇 가지 일화가 있다.
이는 94년 이회창이 문민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한 후 내무부 장관이었던 최형우와 잦은 언쟁을 주고받았기 때문인 듯하다.
두 사람이 첫 번째로 충돌한 사건은 새마을운동 국고보조금 지원문제였다.
이회창은 국무총리에 취임하자 관변단체에 대한 국고보조금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주무부처인 내무부와 사전 상의 없이 발표하자 최형우는 화가 났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충돌한 사건은 지방선거 사전운동과 관련된 일이었다.
최기선 인천시장과 박태권 충남지사가 94년 도내시장, 군수를 모아놓고 ‘고향의 밤’ 행사를 연 것과 관련해 야당이 사전선거운동이라며 이들의 해임을 촉구하고 나서면서 부터다.
최기선과 박태권은 ‘YS 대통령 만들기’ 1등 공신이자 최형우의 최측근이었다.
당연히 최형우는 “이는 통상적인 업무행위”라며 이들을 편들고 나왔다.
하지만 이회창은 “단체장들은 사전 선거운동으로 오해받을 행위를 하지 말라”고 야당 편을 들고 나왔다.
이때부터 완전히 두 사람의 감정은 끝을 향해 달렸다.
최형우는 ‘이회창’에 대한 인물평을 요구할 때면, 언제나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댈 정도였다.
때문에 만약 최형우가 ‘뇌일혈’로 쓰러지지 않았다면 이회창이 신한국당 대권후보가 되지 못했을 것이란 얘기들이 회자된다.
최형우는 한때 신한국당 내 대의원 3분의 2이상 지지를 이끌어냈던 정치인이다. 그가 대권을 포기한 후에도 늘 입버릇처럼 “이회창은 안된다. 이회창이 대권후보가 되면 신한국당도 YS도 민주계도 모두 없어진다”고 말하곤 했다.
그가 정치일선에서 물러 난지 10여 년이 흘렀다. 진짜 그의 말처럼 신한국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YS에 대한 평가도 예전 같지 않다. 민주계 또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