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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서거 3주기①] YS는 살아있다…민주주의 확립과 경제투명화
하나회 청산으로 민주주의 정착…금융실명제로 경제선진화
2018년 11월 16일 19:52:05 정진호 기자 sisaon@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 YS는 ‘상식’을 만든 지도자다. 이제 더 이상 대한민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상식, 부정부패를 저지른 사람은 고위공직자가 돼서는 안 된다는 상식. ⓒ시사오늘

누군가 말했다. ‘우리는 YS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과장이다. 그러나 거짓은 아니다. YS(故 김영삼 전 대통령)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지 2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은 YS가 구축해 놓은 시스템의 바탕 위에서 돌아가고 있다.

YS는 ‘상식’을 만든 지도자다. 이제 더 이상 대한민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상식, 모든 금융거래는 본인 명의로 해야 한다는 상식, 부정부패를 저지른 사람은 고위공직자가 돼서는 안 된다는 상식.

현재의 대한민국이 이 ‘상식들’의 토대 위에 쌓아 올린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우리가 여전히 ‘YS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표현이 마냥 거짓은 아님을 이해할 수 있다. 이에 <시사오늘>은 서거 3주기를 맞아 YS가 남긴 정치·경제적 유산을 정리해 봤다.

민주주의 안착시킨 하나회 청산

2014년, 미국의 정치·사회 전문지인 VOX는 “태국은 쿠데타에 중독됐다”고 보도했다. 1932년 처음으로 쿠데타가 일어난 이후, 태국은 12번의 ‘성공한’ 쿠데타와 7번의 ‘실패한’ 쿠데타를 겪었다. 이를 두고 VOX는 “마치 민주주의 국가에서 4년에 한 번 선거를 하듯 태국은 4년에 한 번 쿠데타를 했다”고 평가했다. 지금도 태국은 2014년 쿠데타로 집권한 쁘라윳 찬오차가 집권하고 있다.

비단 태국만의 일이 아니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2016년에는 경제규모가 세계 20위권 안에 드는 큰 나라인 터키에서도 쿠데타가 일어났다. 터키 또한 1960년 첫 쿠데타 발생 후 네 차례나 같은 일을 경험했다. 태국과 터키 외에도 수많은 국가들이 민주정권과 군부정권이 교차하는 역사를 써 왔고, 여전히 쓰는 중이다. 일시적으로 민주정권이 수립되더라도, 군부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면 민주주의 정착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는 방증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대한민국에도 두 차례 쿠데타로 정권이 전복(顚覆)된 역사가 있다. 1961년 5월 16일에는 박정희를 위시한 육군 장교들이 제2공화국을 무너뜨렸고, 1979년 10·26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뒤에는 12·12쿠데타가 일어나 군부가 재집권했다. 두 차례의 성공 경험과 북한이라는 외부 위협의 존재는 대한민국을 쿠데타 가능성이 상존하는 땅으로 만들었다.

YS는 2009년 SBS와의 인터뷰에서 “그때는 ‘쿵’ 소리만 나도 ‘누가 쿠데타 했구나’라고 생각할 때였다. 내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외국 언론에서 관심이 많았다. 그때 외국 신문들은 ‘김영삼은 문민대통령이지만 군과 동거할 것’이라고 썼다”며 “그래서 내가 속으로 ‘웃기지 마라, 내가 대통령하면서 그렇게 더럽게는 안 한다. 왜 동거를 하느냐’고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YS 차남인 김현철 국민대학교 특임교수도 15일 <시사오늘>과 만나 “그때는 군인들이 서슬 퍼렇던 시절이었다. 하나회 멤버로 구성된 육군 수뇌부와 국방위 소속 국회의원들이 난투극을 벌인 ‘국방위 회식사건’이 일어났던 것이 불과 몇 년 전이었다”면서 “주요 외신들조차 ‘YS가 군인들과 타협을 하고 절대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군부 청산은 어려울 것이다’라고 했을 정도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증언이다. 

   
▲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실시는 자칫 큰 반발을 살 수 있는 일이었던 만큼,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됐다. ⓒ김영삼 민주센터

대한민국을 항구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군부 내 거대 사조직인 하나회 청산이 필수적이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결성된 하나회는 12·12쿠데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세력이었다. 이들은 전두환·노태우 정권의 요직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군부 내에서도 노른자위 보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나회 청산 없이는 ‘쿠데타 걱정 없는’ 완벽한 민주정권 수립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쿠데타 걱정 없는’ 민주정권 수립을 위해서는 먼저 ‘쿠데타 걱정’을 할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가 있었다. 퇴임 전, 노태우가 군 내 핵심 요직을 하나회로 장악시켜 놓은 상태였던 까닭이다. 당시 정권 안정과 직결돼 있는 보직인 제3야전군사령관·보안사령관·수도방위사령관이 모두 하나회 회원이었던 데다, 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 그 아래 기수인 육사 18기 대장 자리도 하나회 출신인 구창회·조남풍·김재창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야말로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였다.

김충립 전 수도경비사령부 보안반장은 2016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YS는 군을 잘 모르니까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하나회 파워를 모르니까 가능했던 일이다. 아는 사람이라면 엄두도 못 냈을 거다. 사전에 (하나회 척결 계획이) 알려졌다면 쿠데타가 났을지 모른다는 얘기를 하나회 출신 인사에게서 직접 들었다. 수도방위사령관 등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대전복(對顚覆) 부대 지휘관이 전부 하나회 핵심인사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YS는 특유의 돌파력을 앞세워 취임 11일 만에 하나회 숙청을 시작한다. 1993년 3월 8일, YS는 새벽같이 권영해 국방부 장관을 불러 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을 해임하고 비(非)하나회 출신인 김동진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과 김도윤 기무사 참모장을 각각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권영해 국방부 장관이 YS의 의중을 알게 된 지 불과 4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부는 8일 김진영 육참총장을 9일자로 전격 해임하고 후임에 한미연합사령부 사령관 김동진 대장을 임명했다.
정부는 또 서완수 국군기무사령관을 보직해임하고 후임에 김도윤 현 기무사 참모장을 임명했다.
육군총장의 경질은 정부의 장차관급 인사에 이어 대통령의 임명직위에 대한 군 통수권 차원에서 이루어진 조치라고 국방부가 이날 밝혔다. (중략)
경질된 김 전 육군총장은 금년 12월에 임기 2년을 마치게 돼있어서 이날 경질은 돌연한 것으로 새 김영삼 정부의 앞으로 군부개혁과 관련,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김 전 총장은 부산 출신의 육사 17기 선두주자였으나 지난 88년 국회의 5공 청산 과정에서 군부 비판에 대한 군 장성들의 불만을 대변하는 등 강성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 전 기무사령관도 관행상의 임기를 오는 12월로 1년 가까이 남겨두고 있어서 이번 인사가 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하향조정한 것과 함께 군 정보기구에 대한 개혁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군 주변에서는 김 전 총장과 서 전 기무사령관이 전두환 전 대통령 등 육사 11기 소수 장성들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군맥에 속하며 이들에 대한 새 정부의 갑작스런 경질이 군부 내에 고질로 여겨진 파벌과 인맥을 개혁하려는 강한 의지라고 풀이했다.
김 신임총장은 김 전 총장과 육사 17기 동기로 서울 출신이며 육사를 수석졸업했으나 하나회와는 관계를 맺지 않은 장성으로 알려져 있다.
1993년 3월 8일자 <동아일보> ‘육참총장 전격 경질’』

   
▲ YS는 취임 석 달 만에 장군 18명을 경질했다. 말 그대로 속전속결이었다. 사진은 1993년 김동진 신임 육군참모총장에게 삼정도를 하사하는 YS의 모습. ⓒ김영삼 민주센터

이어 같은 해 4월 2일에는 안병호 수방사령관과 김형선 특전사령관이 경질됐다. 4월 8일에는 김연각 제2야전군사령관과 구창회 제3야전군사령관이 교체됐고, 4월 15일에는 군단장·사단장급 하나회 출신 장군들까지 모조리 몰아냈다. 취임 석 달 만에 장군 18명의 옷을 벗겨버린 속전속결(速戰速決) 숙청 작업이었다.

『2일 단행된 수방사와 특전사 사령관의 경질은 지난달 8일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의 전격 교체 시부터 이미 예견돼 왔던 일로 사실상 교체 시기와 후임자 선정 문제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육참총장 등의 경질과 같은 맥락에서 그동안 군 내에서 정치색이 짙은 인물들로 채워져 왔던 두 수도권 부대장의 교체 역시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이로써 군 내에서 4대 핵심 실세 자리로 여겨져 왔던 육군참모총장·기무사령관·수방사령관·특전사령관 등이 김영삼 대통령 취임 한 달여 만에 모두 교체돼 문민시대의 군 인사를 가늠케 하고 있다.
이번 전격 인사의 배경은 이른바 ‘하나회’, ‘9·9인맥’으로 불리는 정치 지향 장교들에 대한 거세 작업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같은 의지는 지난번에 경질된 김진영 전 총장과 서완수 전 기무사령관, 그리고 이번에 교체된 안병호 수방사령관이 한결같이 하나회의 핵심 멤버들이면서 9·9인맥이었다는 데서 잘 나타난다.
또한 후임으로 임명된 김동진 총장과 김도윤 기무사령관, 도일규 수방사령관, 장창규 특전사령관 등이 하나같이 비하나회 출신인 데다 그동안 군 내에서 정치적 성향을 보이지 않았던 인물들이라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안 전 수방서령관은 이진삼 전 참모총장, 이문석 전 총무처 장관, 김진선 육참차장 등으로 이어지는 9·9인맥으로 12·12 때 노태우 9사단장 밑에서 작전참모를 하면서 당시 이필섭 연대장과 함께 9사단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출동한 인물이다. (중략)
이날 청와대에서 있은 보직 및 진급신고식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신임사령관들에게 “다른 데 정신 팔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고 하면서 “저 사람들(하나회 출신들을 겨냥한 듯) 아직도 얼떨떨할 걸”이라고 말한 대목도 앞으로 군 개편과 관련,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1993년 4월 3일자 <경향신문> ‘정치군인 거세 가속화’』

하나회 척결은 우리나라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게 하는 마무리 작업이나 다름없었다. 청산 과정에서 국방부를 비롯한 전 행정부가 보름 동안 밤샘 비상대기를 했을 정도로, 당시 군부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때문에 YS의 하나회 숙청은 ‘국민이 직접 자신의 손으로 지도자를 뽑는’ 민주주의 체제를 공고화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김현철 국민대학교 특임교수는 “하나회 청산은 혁명이었다. 문민정부의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다. 30년 가까이 이어진 군부 통치를 한 달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완전히 끝내면서 완벽한 민주화를 이룬 것”이라며 “이런 조치가 없었다면 또 다른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악순환의 고리를 종식시켰다는 점에서 하나회 청산은 엄청난 의미”라고 강조했다.

신율 명지대 교수도 15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하나회 청산에 대해 “우리나라 정치에서 쿠데타의 가능성을 없앴다는 것 외에도 김대중 정권이 등장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계기 중 하나가 됐다”면서 “대한민국에서 진짜 제도적인 민주화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하게 기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YS 본인도 하나회 청산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한 바 있다. YS는 앞선 SBS 인터뷰에서 “하나회를 척결하기 전에는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하나회를 청산하지 않았으면 김대중이나 노무현은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실제로 하나회가 사라진 지 4년 후에 치러진 1997년 대선에서도 “군부가 ‘빨갱이’라고 비토(veto)하니 DJ가 후보가 돼서는 안 된다”는 말이 돌았을 정도였으니, 현재의 ‘민주국가 대한민국’에 YS의 지분은 상상 이상으로 많은 셈이다. 

   
▲ 하나회 청산이 정치적 의미에서 ‘새 시대’를 여는 키(Key)였다면, 금융실명제 실시는 경제적 측면에서의 마중물이었다. ⓒ시사오늘

투명한 경제시스템 세운 금융실명제

하나회 청산이 정치적 의미에서 ‘새 시대’를 여는 키(Key)였다면, 금융실명제 실시는 경제적 측면에서의 마중물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차명이나 가명으로도 금융거래가 가능했다. 경제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투자재원을 원활히 조달하기 위한 정책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비실명 금융거래는 수많은 부작용을 낳게 된다.

우선 비실명 계좌가 부정축재자금이나 부동산 투기자금, 범죄조직 자금 등의 ‘세탁 도구’로 악용됐다. 1982년 구속된 이철희·장영자 부부의 어음사기 사건이 대표적이었다. 이철희·장영자 사기 사건은 철강업계 2위인 일신제강과 도급순위 8위였던 공영토건을 무너뜨렸을 정도의 ‘대형사기’였음에도, 금융거래 시 실명을 쓸 필요가 없었던 탓에 기업들이 부도를 내기 전까지 이들의 사기 행각을 추적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경제 정의를 실현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비실명 거래는 재산과 거래 규모 파악을 어렵게 했고, 이는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조세의 제1원칙 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과세(課稅) 기준이 정확하지 않으면, 빈부격차 축소 등 조세를 통해 국가가 실현하고자 하는 정책이 제대로 달성될 수 없는 까닭이다.

이런 이유로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금융실명제 실시를 추진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철희·장영자 사건 직후인 1982년 7월 3일 이른바 7·3조치로 불리는 ‘금융실명거래와 금융자산소득에 대한 종합과세의 실시방침’을 내놨다. 그러나 7·3조치는 정치권의 반발에 밀려 여러 차례 수정됐다가, 수정안마저도 정치자금 조달이 어려워질 것을 우려한 정치권의 반대로 통과가 무산됐다.

이후 노태우 정권은 1988년 10월 “1991년 1월 1일부터 금융실명제를 전면 실시한다”고 발표하고 1989년 4월 금융실명제 실시준비단을 설치했으나, 결국 경제여건 악화를 이유로 무기한 연기했다. 경제 정의 실현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제도였지만, 정치권의 반발과 경기 악화를 걱정하는 여론에 밀려 번번이 좌절됐던 것이다.

문민정부에서 청와대 경제비서실 과장을 지낸 송하성 경기대학교 교수는 지난 3월 <일요서울>과의 인터뷰에서 “금융실명제를 제일 싫어하는 쪽은 정치권과 대기업이었다”며 “금융실명제는 나쁜 관행을 끊는 계기가 된 훌륭한 정치적 결단이었다”고 회고했다.

상도동계로 분류되는 바른미래당 정병국 의원도 16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금융실명제는 부정하게 축재한 돈을 숨겨 놓고 탈세와 불법을 일삼은 부패한 자산가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다수의 국민들에게는 깨끗한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하는 초석으로 손꼽히는 정책”이라며 금융실명제의 의미를 밝혔다.

하지만 YS는 국가의 ‘체질’을 바꾸려면 금융실명제 실시는 불가피한 과제라고 믿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의 방식으로는 반대 여론에 부딪혀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YS의 선택은 ‘전격전(電擊戰)’이었다. 1993년 6월, YS는 이경식 경제부총리와 홍재형 재무부 장관을 불러 금융실명제를 극비리에 준비할 것을 지시한다.

김현철 국민대학교 특임교수는 과거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이때 상황을 “처음에는 강남 대치동 빌딩에 비밀 사무실을 구해 KDI(한국개발연구원) 측과 초안 작업을 진행했고, 재무부 팀은 과천 주공아파트에 모여 실무 작업을 계속했다. 공무원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면 기자들이 의문을 품을 수 있어 일부 직원들은 하와이 해외출장 핑계를 대기도 했다. 트렁크를 끌고 공항에 나갔다 비행기에 타지 않고 곧장 숙소로 오는 식이었다. 가족들에게 해외에 머무는 것처럼 안부 전화도 잊지 않았다”고 묘사했다. 

   
▲ YS는 대통령 긴급명령을 통해 기습적으로 금융실명제 실시를 발표했다. 사진은 1993년 8월 12일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표하는 YS의 모습. ⓒ김영삼 민주센터

1993년 8월 12일 저녁 7시 45분. YS는 긴급 재정경제명령 제16호를 내려 ‘금융실명거래및비밀보장에관한긴급재정경제명령’을 전격적으로 실시한다. 모든 금융기관과 거래할 때 실명을 사용해야 하며, 금융실명제 실시 후 2개월간 기존 비실명자산을 실명으로 전환하도록 하고, 의무기간 이후 실명으로 전환하면 매년 10%씩 높여 최고 60%의 과징금을 부과하는 등의 내용이 골자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12일 헌법 제76조 제1항에 의거,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을 발동, 이날부터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김 대통령은 또 헌법 제47조 제3항에 따라 이 긴급명령을 심의하기 위한 임시국회를 16일부터 20일까지 5일간 열 것을 요구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저녁 7시 청와대에서 긴급임시국무회의를 주재, 금융실명제 실시를 결정한 뒤 특별담화문을 발표, “이 시간 이후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담화에서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지 않고는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없고 정치와 경제의 검은 유착을 근원적으로 단절할 수 없으며 진정한 분배 정의를 구현할 수 없고 사회의 도덕성을 확립할 수 없다”는 말로 전격적인 실명제 실시 이유를 밝혔다.
김 대통령은 “과거 금융실명제의 실시 문제가 논의될 때마다 금융시장이 동요하고 경제의 안정이 위협받는 것을 보아 왔다”고 전제, “대통령긴급명령으로 국회에서의 법 개정절차를 대신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후략)
1993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

다행히 우려했던 부작용은 크지 않았다. 철저한 보안 유지 덕에 대규모 자금 이탈 등 금융 혼란도 미미한 수준이었다. 오히려 금융실명제 실시 후 두 달 사이 가명계좌의 97.4%가 실명계좌로 전환되면서 실명 금융거래 관행이 정착됐다. 그 결과 소위 ‘검은 돈’이 상당부분 사라지고, 증여세나 상속세 없는 편법·불법적 부의 대물림도 차단됐다.

『(전략) 자금 흐름의 투명화는 정경유착을 없애고 부정부패의 원천을 봉쇄하는 효과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 사회에서 불로소득 계층을 사라지게 해 진정한 분배정의를 이루는 초석을 쌓았다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불로소득의 대표적 사례는 음성적 정치자금과 공무원들에 대한 뇌물, 기업 간에 주고받는 각종 뒷돈들이다. (중략)
“실명제로 인해 가명계좌를 통한 돈세탁이 불가능해지고 은행창구를 통해 흐르는 금융자산이 거의 노출될 수밖에 없어 자금추적이 훨씬 쉬워지게 됨으로써 불로소득의 원천이 돼 온 검은 돈에 사실상 ‘족쇄’가 채워진 셈”이라는 게 국세청의 말이다. (중략)
또 거액의 금융자산가와 재벌들이 자식들에게 정당한 증여세나 상속세를 내지 않고 부의 대물림을 해온 행위가 상당부분 차단당하게 된 것도 실명제가 가져온 큰 효과 중의 하나다.
1993년 8월 19일 <한겨레> ‘금융실명제 시대…가·차명 예금 부자들 진퇴양난’』

김행 위키트리 부회장은 15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금융실명제가 전광석화처럼 어느 날 갑자기 실시됐기 때문에 자금을 빼돌릴 여유 없이 ‘블랙머니’가 수면 위로 다 드러났었다”며 “사실상 경제민주화의 첫 단추를 YS가 꿴 것”이라고 했다.

신율 명지대 교수도 같은 날 “금융실명제는 부정부패를 최소화시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정책”이라며 “우리나라에 존재하고 있던 음성적 자금을 양성화시킨 것”이라고 평했다. 그러면서 “YS가 훌륭한 것은 정치·경제적 문제를 ‘제도를 통해 풀려고 한 것’이다. 제도를 만들어 놔야 고질적 문제들이 반복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YS의 시스템 구축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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