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정치인 또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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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정치인 또 만날 수 있을까’
  • 정세운 기자
  • 승인 2009.09.15 17: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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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권선징악’은 믿기 어려운 식상한 말
YS 관련 자료들, 아이들의 롤(role)모델 역할
정치인 YS의 삶 속…‘정의가 승리한다’ 확신

⑫에필로그
 
2008년 3월 노병구 민주동지회장과 인터뷰 할 기회가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고 4월 총선을 앞둔 시점이었다.

노 회장과 인터뷰를 하자고 한 이유는 한나라당 공천과 관련해서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기 때문에 YS의 상징인 박종웅 전 의원이나 차남 현철씨 등 민주계 인사들이 대거 공천을 받을 것이란 말들이 돌았다.

하지만 결과는 민주계 인사들의 대거 ‘낙천’이었다. YS는 당시 한나라당 공천과 관련해 “대단히 잘못된 공천이다. 버릇을 고쳐야 한다”고 비난했다. 이들 두고 언론들은 YS가 자신의 차남인 현철씨가 공천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항의라고 해석했다. 인터뷰 중 노 회장으로부터 시쳇말로 ‘쇼킹’한 말을 들었다.

노 회장은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YS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실어본다.
 
-YS 상징인 박종웅 전 의원이나 차남인 현철씨가 공천을 받지 못했습니다. YS가 대단히 서운할 것 같습니다.

"YS가 현철이 국회의원 시키려고 이명박 후보를 밀었다고 해. 그 속을 내가 아나. 그래서 YS 만나러 상도동에 갔어. 그때 현철씨가 한나라당 공천 받고 거제에 출마하겠다고 기자회견 했을 때야. 한나라당에 당규 상 과거비리가 있는 사람은 공천신청도 할 수 없다고 발표했어. 김덕룡 김무성 박종웅 등 공천에 관한 얘기들이 떠돌아 불안해하고 있어. 그래서 내가 YS만나 이들이 불안해하는 말을 전하며 ‘현철씨까지 이번에 공천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고 했지. 그랬더니 YS가 ‘우리가 무엇을 바라고 이명박 후보를 지지한 것은 아니지 않냐’고 운을 떼면서 말합디다. ‘나는 현철이가 정치를 안했으면 좋겠어. 내 자식이라도 오십이 다 됐는데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어서 그냥 보고만 있는 거지’라고 말을 해요.”

그러면서 노 회장은 YS에 대해 “거짓 없는 지도자”라며 추켜세웠다.
 

▲가택연금 중인 김영삼

사실 필자는 노 회장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다. ‘노 회장과 다시 만나면 YS의 정치 이력 중 문제점을 지적해보리라’고 생각하고 YS 관련 서적 등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읽고 난 감상평은 한 단어였다. ‘카타르시스.’

‘정의가 승리한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고 우리는 학교에서 배웠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식상한 말이 돼 버렸다.

솔직히 필자도 세상을 경험하면서 그 말들을 믿지 않았다. 믿지 않는 이유는 굳이 지면에 설명하지 않겠다. 그러나 YS 관련 책자들을 읽으면서 내 생각이 ‘잘못 됐구나’란 확신을 했다.

한마디로 YS는 소설에나 나올 법한 ‘지도자’였다.

그는 ‘상도동계’, ‘민주계’의 보스로서 적어도 같은 계보 정치인에게 믿을 만한 지도자였다.
YS의 오른팔이었던 최형우는 YS 앞에서 술상을 발로 차 엎어버렸다. 그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런 식으로 하다가는 대통령은커녕 소통령도 못한다.”

YS는 대드는 최형우에게 화를 내기보다는 설득했다.

이게 가능한 장면일까?

우리는 친구와 술을 먹다가도 술상을 엎으면 ‘상종 못할 놈’이라며 만나기를 꺼려한다.
한 계보의 보스와 계보정치인이 정치적 사안에 이견을 보이자,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만큼 YS는 계보원들과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계보정치’를 해왔다.

그러나 독재에 항거할 때는 인간적인 면이 없을 정도로 냉정했다. YS가 박정희 정권에서부터 전두환 정권을 몰락시키고 직선제 개헌을 쟁취할 때까지 그야말로 각본 없는 ‘드라마’였다.

특히 ‘40대 기수론’에서 ‘79년 5월30일 치러진 신민당 전당대회’, ‘83년 5월18일 단식농성’ 등은 관련 자료를 읽는 독자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YS 관련 자료들을 섭렵한 후 글이 쓰고 싶어졌다. ‘YS와 최형우’를 쓰게 된 사실상 동기다.

서점에는 수많은 책들이 나열돼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한 생명이 태어나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면, 부모들은 이들에게 책을 사준다.

책 제목은 ‘장화홍련전’, ‘신데렐라’, ‘홍길동전’ 등 다양하다. 내용은 한마디로 ‘정의가 승리한다’다.

부모는 아이가 앞서 말한 책들을 롤(role) 모델로 삼아 살아가기를 원한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가 사준 책은 롤 모델이 되지 못한다. 부모들도 아이가 커가면서 ‘정의가 반드시 승리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대신 ‘세상은 그런 거란다’고 타협을 제시한다. 그러면서 부모나 아이들은 세상에 대한 ‘패배자’로 전락돼 간다.

그럴 때 아마도 자신의 서재에 YS 관련 책자가 꼽혀 있다면 패배자는 면할 수 있다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적어도 실생활에서 ‘정의가 승리한다’는 말을 들려 줄 동화 같은 얘기들이 들어있으니까….

1979년 5월 30일 전당대회 속으로 들어가 봄으로써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전에서 YS와 DJ 사진제공=김영삼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가 당사 4층 건물에서 거행됐다.

당권에는 이철승 김영삼 이기택 신도환 등이 도전했다. 하지만 당권은 이철승과 김영삼의 2파전으로 압축돼 갔다.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의 당선을 막는데 주력했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확보할 후보가 없다고 판단한 박 정권은 이기택과 신도환 등이 결선투표에서 이철승을 밀도록 공작했다. 신도환은 쉬웠다. 하지만 42세의 이기택은 알 듯 모를 듯한 행보를 거듭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박 정권은 이기택을 이철승 지지로 틀기위해 처가쪽에서 운영하는 ‘태광’ 장부를 압수하는 등 압력을 가했다.

1차투표 결과는 재석대의원 7백 51명 중 이철승 2백 92표, 김영삼 2백 67표, 이기택 92표, 신도환 87표.

결승투표에 앞서 정회가 선포되자 이철승과 김영삼 양측은 ‘이기택’ 잡기에 나섰다.

양측은 이기택과의 면담을 신청했다. 하지만 이기택은 김영삼이 보자고 할 때 고개를 돌려버리고 이철승과의 면담을 가졌다.

이철승은 이기택에게 간절한 메시지를 띄웠다.

“과거의 인연으로 봐서도 나를 좀 도와줘야 하지 않소.”

“….”

이기택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이기택을 지지한 세력은 ‘민주사상연구회(민사연)’였다. 민사연은 여러 계파에 속했던 당직자들로 결성된 외인부대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이철승 지지파와 김영삼 지지파로 나눠져 있었다. 결국 민사연은 이기택의 결정에 따라 그가 손을 들어주는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기로 행동통일 할 수밖에 없었다.

진행이 김영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이기택 비서이자 심정적으로 YS를 지지했던 박관용 비서는 흥분해 이기택의 허리띠를 잡고 흔들며 ‘밖의 함성을 들어보라’고 협박했다.
신민당사 밖에는 시민들과 학생들이 모여 ‘김영삼’, ‘이기택’을 외치고 있었다.

이기택은 박관용의 귀에 대고 “무슨 뜻인지 알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박관용은 정신이 번쩍 들어 허리띠를 놓았다.

그리고 대회장 입구에서 김영삼과 이기택 간의 마지막 회동이 이뤄졌다.

“이 동지 한 번만 도와주시오.”

“좋습니다. 김 총재를 돕겠습니다.”

극적인 장면이었다. 김영삼과 이기택은 손을 잡고 대회장으로 들어간 뒤 연단 위에서 손을 치켜들어 제휴를 과시했다.

오후 7시 결선투표 결과가 발표됐다.

“김영삼 3백78표, 이철승 3백67표” 11표 차이였고, 과반수에 2표가 많았다.
김영삼은 연단에 올라가 이렇게 외쳤다.

“오늘은 진실로 위대한 민권 승리의 날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

박관용은 이기택의 서교동 집으로 사과를 하러갔다.

“의원님, YS를 지지한다고 저에게 사전에라도 말씀해 주셨어야죠.”
이기택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렇게 답했다.

“내가 김영삼을 지지한다고 말하면 너의 눈빛이 달라질 거다. 그러면 어제 전당대회가 치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권을 가진 이철승 쪽에서 전당대회를 치렀겠느냐.”
<제1편 YS와 최형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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