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의 덩치 키우는 서울공화국의 그늘
文정부 지방분권에 대한 전문가들의 걱정 '둘'
최양부 "헌법에 지방분권 명시하면 지역이기주의 커져"
신용인 "헌법보다 구체적 법률 제정으로 예산권 나눠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한설희 기자]
“차기 대통령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정치부 기자에겐 습관이 된 질문이다. 대권(大權), ‘클 대’ 자가 붙는 유일무이한 권력. 그리고 이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는 행정부의 수반(首班)이자 최고 통치권자, 대통령.
초·재선 의원들을 만나서 ‘대권 욕심도 있느냐’고 물으면 하나같이 손사래를 친다. “에이, 당권도 잡지 못했는데 무슨 대권을!” 그들은 그러면서도 넌지시 말한다. “뭐, 하지만 꿈은 꿀 수 있는 거잖아요?”
대권은 풍운의 꿈을 안고 정치권에 발을 들인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가슴 한켠에 품어 보는 ‘만인의 목표’다. 그래서 정치부 기자들은 늘 차기 대권 주자 선호도 조사에 귀를 기울인다. 대권의 향방에는 정치권, 나아가 국가 전체의 판도가 달려 있으니까.
이 대권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다가올 20대 대선은 지금으로부터 900일도 넘게 남았으니, 현 시점의 선호도 조사는 크게 의미가 없을 테다. 다만 데이터를 통해 합리적으로 추론해볼 순 있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또는 대선주자급(級) 정치인들의 출신지 및 지역 기반은 어디였을까?
역대 대통령-당 대표, 비수도권 지역 기반 뚜렷해… 서울人 '전멸'
결과는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다. ‘87년 체제’ 수립 이후, 호남 출신인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제외하면 비(非)영남 출신 중 대통령 자리에 오른 정치인은 단 한 명도 없다.
대통령이 가진 지역 기반도 크게 다르지 않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고, 부산 서구 지역에 출마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경남 김해 출신으로, 부산 동구에 두 차례 출마했다. 서울시장 이력을 가지고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은 선거운동 당시 경북 포항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던 사실을 강하게 내세웠고, 이는 실제 영남의 지지로 이어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 또한 임기 내내 출생지인 TK의 절대적 지지를 등에 업었고, 문재인 대통령은 출생지인 경남 거제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집토끼인 호남 지역 기반을 잡았다.
조원진 우리공화당 공동대표가 지난 7월4일 본지와 만나 “(진보에선) 유시민과 조국에 주목해야 한다. 영남권 주자를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며 “여당(민주당)이 좌파연정을 해 단일후보를 내더라도 영남 후보가 아니면 대통령 되기 힘들다”라고 주장한 근거가 있는 셈이다.
대통령의 지역 기반이 영남에 수렴한다면, 대선 후보급 정치인들이 한 번씩 거쳐 간다는 당대표직의 지역 기반은 과연 어땠을까?
김영삼·김대중·박근혜·문재인 등 역대 대통령들과 김종필·정동영·홍준표 등 대선 주자들이 거쳐 갔던 당 대표직 역시 다를 바 없었다. 1987년 이후, 가장 많은 당 대표의 출신지는 영남이다. 세부적으로 논하자면 부산경남(PK)이 11명으로 가장 많고, 대구경북(TK)이 8명이었다.
다만 ‘영남 일색’이 아니라는 데선 다소 차이를 보였다. 영남 다음으론 호남 출신이 11명(22%)을 기록했으며, 충청 출신은 6명(11%)으로 집계됐다.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출신은 8명으로, 요약하자면 비수도권 출신이 역대 주요 정당의 대표직을 70% 넘게 차지했다.
비수도권을 지역 기반으로 가진 국회의원일수록, 더 높은 정치적 지위까지 도달하기 쉬운 게 바로 한국 정치 사회다.
왜 비수도권 지역 기반을 가져야 성공할까?… 원인은 ‘지역주의’
“지금 양당(민주당·한국당) 원내대표들은 대권과는 거리가 좀 먼 사람들이죠. 이인영, 나경원이 대선후보 급(級)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있습니다. 충청으로 내려가야 해요. 가서 지역의 맹주가 돼야합니다.”
이 시점에서 지난 6월 10일 기자와 만난 한 시사평론가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 원내대표(충북 충주 출신)와 나 원내대표(부친 충북 영동 출신)는 모두 서울을 지역구로 하는 국회의원이다. 이들이 높은 지위에 오르려면, 역대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비수도권 지역 기반을 확고하게 다져야 한다는 조언이다.
왜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지방 사람들이 수도권 사람들보다 유독 지역 정체성에 따라 정당일체감을 형성하고, 그것에 기초해 후보자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좋게 표현해서 지역정체성, 터놓고 말하자면 ‘지역주의 투표’다.
지난 7월4일, 〈거산에 오르면 큰 길이 보인다〉의 저자이자 문민정부에서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농림해양수석비서관을 지낸 최양부 전 수석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지역주의 투표는 1971년 제7대 대선에서 박정희와 김대중에 의해 수면 위로 떠올랐으며, 87년 대선 당시 김대중(DJ)의 ‘4자필승론’으로 심화된 결과물”이라고 주장했다.
4자필승론이란 노태우(대구·경북), 김영삼(부산·경남), 김종필(충청), 김대중(호남)이 각자 자기 지역을 가져가면 수도권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은 후보인 DJ 본인이 당선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사람들의 지연(地緣)을 집단적으로 정치에 활용할 생각을 시작한 것이 지역주의인데, 이 지역주의는 박정희와 김대중이 71년도 대선에서 적극 사용한 겁니다. 우리 정치사에서 그 때 처음으로 지역주의라는 말이 등장했죠. 71년 대선에서 ‘호남의 김대중’ 대 ‘영남의 박정희’ 구도는 예전에도 깔려 있던 한국의 영호남 지역갈등을 자극했습니다. 심지어 박정희는 영남에 가서 호남인들을 적극적으로 폄하했고요.
그래도 71년 지역주의 투표는 ‘독재와 반독재(민주)’라는 큰 대의명분이라도 있었어요. 그런데 87년부터 김대중이 ‘4자필승론’을 내세우며 그런 명분마저 사라졌죠. 김대중이 내세운 정치 공학적 슬로건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나는 진보적인 호남과 수도권에서 표를 얻겠다’, ‘TK·영남 세력은 기득권 세력이다’, ‘충청은 끼지도 못한다’, ‘호남은 억압받은 민주화의 희생양이다’ 등등…. 이념을 지역 위에 잔뜩 덧칠한 것입니다. 정치적 프레임을 아예 바꿔버린 거예요. 그러면서 ‘지역 패권’ 개념이 등장했습니다. 지역 맹주들도 등장했죠.”
이런 지역주의 투표의 기저에는 ‘내가 사는 지역 출신이 권력을 잡으면, 우리 지역에도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하는 암묵적인, 또 이기적인 기대감이 깔려있었다. 물론 정치인들 역시 이 기대감을 선거철마다 적극 이용해왔다.
결국 한국에 깔려있는 지역주의는 이처럼 전반적으로 호남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당과 영남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한국당의 이념 대결구도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방(地方·비수도권 지역)의 ‘우리 사람’ 정서도 눈에 띈다.
지난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는 부산과 경남에서 약 30%에 가까운 표를 얻었다. ‘반(反) DJ’ 정서가 강한 영남에서 민주당이 예상 외로 크게 선전한 것이다. 이는 노무현 후보의 영남 출신이라는 지역연고주의 감정이 선거에 가장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지역주의 타파’를 기치를 내걸고 2003년 창당한 열린우리당이 결국 지역정당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실패한 사례도 이를 반증한다. 탄핵 역풍을 타고 17대 총선 당시 과반 이상인 152석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영남 민심은 한나라당을, 호남 민심은 다시 민주당을 향하면서 약 3년 만에 해산되고 말았다. ‘지역주의’의 다른 말은 ‘지역기반’이라는 것을 실패로써 증명한 셈이다.
결국 대통령의 지역 대표성은 그들의 비수도권 출생지 또는 특정 지역 기반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이런 지역주의는 제왕적 대통령제 하의 막강한 대통령 권한과 긴밀히 연결되면서, 상대 지역을 배척하는 성격의 ‘분열 정치’를 더욱 고착화시키는 악순환을 가져왔다.
한국지역진흥재단 상임이사를 맡고 있는 주용학 사단법인 빅드림 대표는 지난달 26일 기자에게 “항상 대선 얘기가 나오면 그 사람이 어느 지방 출신이냐가 이슈가 된다”며 정치인이 비수도권 지역연고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 같은 경우도 서울 행정가라는 메리트도 있었지만 포항, 즉 영남의 지역 기반에 힘입어 당선됐죠. 그런 뿌리를 쫓아가다보면, 애초 ‘호남향우회’라는 친목단체도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가 야당 세력을 확충하겠다는 정치적 계산으로 동원된 세력이에요. (차기 대선 후보라는) 박원순 서울시장도 마찬가지죠. 민주당이지만 영남 출신이기 때문에 호남 사람들이 밀고 거기에다가 영남 사람들 일부도 밀겠죠. 한국 정치에 그런 경향성이 있습니다.”
서울이라고 해서 출신지 연고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해방 후 급격한 도시화와 인구이동의 결과 서울에는 ‘서울토박이’라고 불릴만한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앞선 주용학 대표는 서울 사람들 또한 지방 중심의 ‘반(反)수도권 지역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역설을 분석했다.
“서울과 수도권 인구를 자세히 살펴보면, 호남 출신 30%, 충청 30%, 영남이 20%정도 돼요. 결국 서울이라고 해도 충청권 민심을 더 많이 잡은 곳이 당선됩니다. 충청권이 어떻게 보면 캐스팅 보트 역할인 셈이죠. 어딜 가더라도 여전히 지역적인 연고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겁니다. 경제는 어느 수준까지 도달했는데, 정치는 아직까지 OECD국가의 선진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현실입니다.”
요컨대 지방에서 출발한 지역주의 투표가, 지역 주민들이 수도권에 상경하면서 수도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됐다는 것이다.
지역주의 덩치 키우는 서울공화국의 그늘
물론 우리는 이러한 지역주의 투표가 잘못된 행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역주의는 한국의 민주주의 및 정치 발전을 위해 반드시 극복돼야 할 주요 장애물 중 하나다.
그러나 무조건 ‘지역주의는 사회악’이라는 생각으로 단순하게 접근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왜 지방으로 갈수록 지역주의가 득세하는가. 누군가의 편향적 주장대로 그들의 소득이 더 적고, 그들의 평균 나이가 더 많고, 더 감정적인 요인에 치우칠 정도로 의식 수준이 낮아서 그런 것인가.
그렇다면 지역주의가 휩쓰는 지방을 ‘답 없는 곳’ 취급하고, 손가락질 하는 것은 과연 한국 정치 발전에 도움이 될까? 냉소는 쉽다. 다만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매번 선거 때마다 지역주의를 청산해야 한다는 담론들은 무성하게 펼쳐져왔지만 변화는 미약했다. 지역주의 투표가 단순 개인의 문제에 기인한 것만은 아니며, 이미 한국 사회의 구조화된 특징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지역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현실 기저에는 어떤 구조가 도사리고 있을까. 이를 추적하던 기자에게 지난달 만난 호남 출신의 정치권 관계자는 이렇게 귀띔했다.
“서울 출신이시죠? 서울 사람은 몰라요. 지방 사람들은요, 항상 중앙에서 소외됐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더 우리 고향 사람들을 서울에서 밀어주려고 하죠. 동창회나 향우회를 한번 가보세요. 아예 못사는 지방일수록, 군 단위, 면 단위 지방일수록 향우회 운영이 활발해요. 서로 엄청 밀어주고 도와줘요. 이런 향우회가 잘 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서울 중심의 국가 발전이 지역민들의 울분을 가져왔다는 말이다. 앞선 주 대표는 서울 중심의 국가, 서울공화국의 출현과 심각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과거 정부는 효율성을 위해 계획적으로 도시 기반 사업을 강남 위주로만 진행했습니다. 그래서 강남권에 국가 투자, 기반 시설, 문화, 교통 등 모든 것이 집중됐죠. 지하철 노선도를 한 번 펼쳐보세요. 강남과의 연결성이 좋은 역세권은 집값이 비쌉니다. 여기에 맞춰 경기도나 서울 외곽 주택들의 집값도 형성되고요. 상대적으로 서울과 먼 지방이 빈곤,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어요. 실제로 모든 사회문화는 서울로만 통하죠. 단어마저도 서울 사람들 중심이지 않습니까. 서울로 ‘올라간다’, 지방으로 ‘내려간다’는 표현도 서울 중심주의 시각에서 나온 말이죠.”
‘마을공화국 이론’의 주창자인 신용인 제주대학교 로스쿨 교수도 지난 10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일단 모든 결정권이 다 서울에 집중돼 있고, 그 결정권 쟁취를 위해 투쟁이 벌어지면서 지역감정이 강화된다”며 수도권 중앙집권화의 폐해를 비판했다.
“우리나라는 지나치게 중앙집권화 됐어요. 소수인 수도권에 부와 권력이 집중되다보니, 그 권력의 부스러기라도 갖기 위해 전 국민이 드라마 ‘스카이캐슬’처럼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온 국민이 수도권에 위치한 대학에 가기 위해 입시지옥에 시달리고, 수도권에 있는 기업에 가기 위해 취업 경쟁에 시달리고, 일렬로 줄을 서서 중앙(수도권)만 보고 달려갑니다. 만약 그 권력과 부가 지방사회에 분산된다면, 지금처럼 치열한 경쟁이 필요할까요?”
이는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올해 초 출간한 저서, 〈바벨탑 공화국〉에도 제기된 문제의식이다. 강 교수는 결국 ‘서울공화국’을 깨면 지역감정도 깨진다고 주장한다.
영호남 간의 갈등이란 것도 중앙의 지배 권력을 누가 차지하느냐는 갈등이기 때문에 서울 초집중화를 약화시키면 따라서 약해진다. 서울 초집중화를 강화시키거나 이 문제에 아무런 관심도 없으면서 외치는 ‘지역갈등 해소’는 하나마나한 소리라고 봐도 무방하다.
지역주의란 무엇인가? 이걸 자꾸 감정의 문제로만 보면 답이 나오질 않는다. 지역주의건 지역감정이건 그 뿌리는 ‘이익’에 있다. 우리 지역 출신이 중앙 권력을 잡아야 우리 지역이 더 많은 돈을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 이게 바로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한국의 모든 선거는 서울이 지방을 빨아들이는 소용돌이 선거다. 전국에 걸쳐 선거 때마다 국회의원·지방자치단체장 후보들이 가장 강조하는 게 무엇인가? 그건 “나 서울에 줄 있다”는 ‘줄 과시론’이거나 “나 서울 가서 살다시피 하련다”는 ‘줄 올인론’이다. 지역에 중앙 예산 끌어오고 사업 유치하는 데 필요한 줄을 이용하고 만들 수 있는 자신의 역량을 알아달라는 것이다.
유권자들이 그걸 비웃을까? 그렇지 않다. 유권자들은 줄의 필요성에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지역주의 선거의 본질은 서울의 권력 핵심부에 지역의 줄을 더 만들겠다는 것이다. (중략) 지역주의적 투표 행위도 궁극적으론 서울이 '약탈'해간 부와 권력을 우리 지역으로 더 많이 가져와야 한다는 심리의 발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 강준만, 〈바벨탑 공화국〉 199~201쪽
‘서울공화국’이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로 수도권에 모든 권력이 집중된 현실이 지역감정과 지역주의를 부추겼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서울공화국에 대한 반감이 서울 출신 정치인을 멀리하고 지방 출신의 정치인을 가까이하게 만드는 ‘서울공화국의 역설’에 일조했다는 것.
앞선 최양부 전 수석은 이러한 일련의 현상을 “반 수도권으로 뭉친 결집력”이라고 해석했다.
“조직의 숫자가 줄어들수록, 즉 인구가 줄어들수록 대단한 결집력을 가지게 됩니다. 수도권은 인구가 점차 늘어나면서 강한 결집력을 행사할 수 없어요. 그 이해관계가 다양한 사람들을 모두 지지 기반으로 모으기 힘드니까요. 그래서 반 수도권 ‘지역 맹주’가 등장합니다. 지역 맹주에 대해서는 무조건 그 지방 사람들이 ‘우리 지역 맹주시다’ 떠받들고, 그 사람을 적극적으로 밀어줍니다. 지방으로 갈수록 지연(地緣) 안에 혈연과 학연까지 붙어있기 마련이라, 이 끈끈함은 절대적이에요. 이걸 정치인들이 더 활용하려고 하니까 지역주의가 강화되고요.”
이어 최 수석은 이렇게 정략적으로 등장한 ‘지역 맹주’의 부정적 요소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의기투합이 잘 된다고 마냥 좋은 게 아니에요. 그러다보니까 학연·지연·혈연의 선·후배 서열이 지방을 지배해버렸어요. 비판이 자유롭지 못하고, 부정행위를 저질러도 서로 감싸고돌아요. ‘적당히 나눠먹기 하자’는 생각에 원칙이 없어지기 시작하고요. 이게 지방사회의 가장 큰 문제에요. 맹주를 비판하는 문화가 없어요. 뭐가 잘못됐다고 지적하면, 내부의 치부를 공격했다고 생각해요. ‘저놈은 우리 지방을 해치는 놈이다’하고 지탄해요. 내부고발자처럼 지역사회로부터 부정적 낙인이 찍히고 지역사회를 떠나야 해요. 지역구 정치인이라고 해서 그 논리에서 자유로울까요?”
지역 맹주의 등장은 ‘보스 정치’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지방 내 풀뿌리 민주주의 정치마저 망가뜨린다는 내용이다.
서울공화국 부수는 지방분권, 성공할까?… 文 지방분권에 대한 걱정, ‘둘’
서울공화국이 가져온 부정적 연쇄 효과는 이만치도 크다. 서울 출신 정치인을 대권에서 멀어지게 할 뿐만 아니라 지방 내 지역주의를 부추기고, 지방 내 보스정치를 부활시킨다. 수도권과 지방을 포함해 대한민국 전체의 민주주의를 퇴행시키고 말았다.
이런 문제의식은 현 정부에도 닿은 모양이다. 문재인 정부는 ‘지방분권형 개헌’을 통해 혁신적인 지방분권을 추진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2017년 10월 ‘자치분권 5년 로드맵’을 발표하고, 이 내용을 담은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특히 헌법 제1조 3항에 “대한민국은 지방분권국가를 지향한다”는 선언을 직접 명시하려고 시도했으나, 야당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실패했다.
그러나 정부의 지방분권 헌법 명문화에 대해 최양부 전 수석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한편으로는 위험천만한 얘기”라며 우려를 표했다.
“우리나라는 지방 간 경제 격차가 심한 국가입니다. 그래서 국가가 세금을 걷어서 지역 간 불균형을 잡아주려고 하죠. 그런데 ‘분권론’이 박혀버리면, 국가의 조정과 통제를 받는 ‘절충형 지방자치제’ 국가 기조에 문제가 생깁니다.
헌법이 바뀌면 몇몇 지방이 ‘우리 지역에서 국세 너무 많이 걷어간다, 우리 지역에서 번 돈은 우리 지역을 위해서만 쓰겠다’는 이기적인 주장을 할 때, 국가적으로 조정하는 데 제동이 걸릴 수 있습니다. 국가 운영을 하려고 할 때마다 계속 시비가 걸린다는 거죠. 사회적 갈등은 당연히 더 많아지겠죠. 조정 능력을 국가가 상실하면 엄청난 자원의 낭비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제대로 고려한 정책인지 의문입니다.”
이와 정 반대되는 ‘헌법 무용론’도 제기된다. 신용인 교수는 “헌법 같은 추상적 얘기보다 구체적인 법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적극 비판했다.
“물론 헌법으로 정해놓으면 좀 나아지겠지만, 상징에 그치기 쉽죠. 헌법 자체가 추상적이잖아요. 개헌이란 건 굉장히 어렵습니다. 국회 동의도 까다롭고 국민 투표까지 거쳐야 하죠. 그렇지만 법률은 상대적으로 제정하기 쉽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멀리만 보지 말고 당장 가능한 눈앞의 단계부터 차근차근 밟길 바랍니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1월 29일 향후 5년간 175조 원을 들여 국가균형발전(지방균형) 정책을 펼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신 교수는 이를 활용한 지방분권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추가 법률 제정을 통해 읍·면·동 소규모 마을 단위에 관련 예산을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라는 것이다.
“법으로도 얼마든지 근거를 마련해서 지방분권을 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낼 수 있어요. 175조 원의 엄청난 돈이 투입되면 지금과 같은 서울공화국 현상이 단숨에 사라지고, 국토가 균형적으로 발전할까요? 저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오히려 토목업자들, 부동산 가진 사람들 돈이나 벌어주겠죠. 땅값 들썩이고 개발 사업만 이뤄지니까요. 실제 주민들이 어떤 득을 볼 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국에 읍·면·동이 3500개인데, 175조 원의 예산들을 읍면동에 나눠준다면 각각 500억 원입니다. 그 돈을 주민 공동 기금으로 못 박고, 주민들이 알아서 그 기금을 활용해 자치를 펼쳐보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어차피 지방 분권을 위해 쓰는 돈이라면, 주민에게 자율권과 재량권을 확실하게 주라는 말입니다. 거기서부터 지역민주주의, 마을민주주의가 시작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구체적 대안들이 제시돼야 합니다.”
그는 지방의 소규모 단위에 예산권을 부여하는 것이 청년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서울공화국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지금 청년 인력이 수도권으로 빠져나간다고 앓는 소리들 하잖아요. 만약 동네에 500억 원이 있으면, 청년들이 서울에 가겠습니까? 기금의 수익을 ‘n분의1’로 나눠준다고 하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지금은 중앙에 연(緣) 닿는 사람이 ‘지역 맹주’를 해먹는 구조죠. 그 연이 있어야 사람들이 밀어주니까요. 저는 ‘돈 가는 데 마음 간다’고 확신합니다. 우리 동네에 돈이 몇 백 억 들어오고, 내가 지방 정치에 개입해서 얻을 게 있다면, 지역 맹주가 설치도록 놔둘까요? 아무런 자치권도 주지 않고 중앙 정부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하니까 지역감정과 서울공화국 현상이 심화되는 겁니다. 위에서부터 모든 지령이 내려오는 탑-다운(Top-down) 형태는, 그저 기득권의 생색내기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정부가 알아야합니다.”
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