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vs 협력 분리 대응해야
YS처럼 실리적 주도권 얻어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당당한 외교는 좋다. 그러나 불안한 외교라면 곤란하다. 요즘 외교가 실종돼간다는 지적들이 적지 않다. 일본의 경제 보복은 불합리하다. 하지만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파기로 맞대응한 우리식 대처 역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고 있다. 북한이 연일 미사일 도발을 해오는 상황에서 경제 불안도 모자라 안보 불안 가중으로까지 불똥이 확산된 것이다. 남북 관계는 안개 속으로, 한일 관계는 악화일로에, 한미 동맹마저 균열이 감지되고 있다. 또한 그 결과는 고스란히 ‘민생 불안’으로 이어지고 있다.
당장 경제가 문제다. 1%대 저성장 시대의 우려 속 지난 13일 하나산업정보에 따르면 일본의 화이트리스 배제로 인해 수입의존도가 높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일부 산업 소재와 부품 조달에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기업들의 투자심리가 위축될 것으로 분석됐다. 미중 무역 분쟁 격화로 수출 부진이 지속된 것까지 겹쳐 중소기업의 부채상환 리스크 우려 또한 더욱 커지고 있다는 견해다. 나아가 한일 양국 간 갈등이 장기화될 경우 대일 수출 의존도가 높은 농림어업도 문제가 돼 각별한 리스크 관리가 요구되고 있다. 더불어 환율 악화, 일본 여행 수요 감소에 따른 항공사 및 여행사에 가해진 치명타, 일본 석탄재 통관 절차 강화로 시멘트 생산량 감소, 일본계 금융의 자본 이탈 우려 등 크고 작은 일본발 경제 대란이 잇따르는 중이다.
가뜩이나 세계 경제가 호황을 누린다고 할 때도 우리 경제의 기상도는 맑지 못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중 무역전쟁 확산, ‘노딜 브렉시트’ 현실화, 동북아 금융 타격 우려 등 세계 경제마저 먹구름이 드리워져 불확실성 심화로 치닫고 있다는 경고음들마저 들려오고 있다. 여기에 내년도 513조에 달하는 슈퍼예산부터, 역대 사상최고치를 기록한 조세부담률(국회예산처 발표, 26.8%) 등도 국민 부담을 높이며 문재인 정부의 포퓰리즘 논란에 불을 댕기고 있다.
민생 문제도 착잡한 형편이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따른 경제성과에 자신하며 좀 더 기다려보라던 정부의 호언장담은 유야무야 사라졌다. 대신 그 공백을 메운 것은 역대 최고 수준의 소득 양극화를 기록했다는 지난 2분기의 가계 동향 조사 결과다. 가계 부채 역시 지난 2분기 말 기준 1556조 원을 넘어서며 이례적 증가폭을 보였다. 그밖에 자영업 붕괴, 청년 실업률 악화 등 안녕하지 못한 수치들을 기록 중에 있다.
때문에 이처럼 경기가 침체되고 가계 경제가 흔들릴수록 정부가 외교에서만이라도 더욱 냉철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조언이 적지 않다. 게다가 이는 정부 출범 초 애초 정책 공약이기도 하다. 청와대와 외교부는 다자외교 확대일로로 나아가되, 한미 동맹 중심의 주변 4개국과의 공조강화 및 국익을 증진하는 경제 외교에 주력한다고 한 바 있다.
특히 일본과의 외교에 있어서 정부는 투트랙 정책을 청사진으로 내걸었다. 독도 및 역사왜곡 등에는 단호히 대응하되, 한일 관계는 미래지향적 성숙한 동반자로서 협력해나간다는 방침이었다. 즉 과거사와 북한 핵 미사일 대응 및 양국 간 실질 협력 등에 있어 서로 분리 대응해나간다는 기조를 지키며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겨나가겠다는 취지를 천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 같은 방향성이 무색하리만큼 정부는 현재 투트랙 외교 대신 외발 자전거식 반일 정책에만 올인 하는 모양새다. 그 결과 경제, 안보까지 포함해 우리나라를 지탱하는 삼각 축 모두 흔들리는 위기를 맞았다는 염려가 나오고 있다. 더러는 지소미아 파기를 놓고도 ‘조국 법무부 장관 수석을 지키기 위해 무리수를 뒀다’거나 ‘한미일 삼각동맹 대신 북중러 대륙권으로의 편입을 위한 셈법’일 수 있다는 일각의 우려로까지 확대되는 양상이다. 설령 단순 억측이자 기우일지언정 결국 이 모두가 마찰로 가득한 외교에서 파생된 저변의 불안한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때문에 이제라도 정부가 더욱 냉철한 외교를 통해 명분과 실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취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제언이다. 아울러 그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문민정부 당시의 김영삼(YS) 대통령이 보여 온 한일 관계 해법이다.
과거 YS는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유명한 으름장이 말해주듯 대일강경 노선에 일가견이 있는 대통령이었다.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통해 조선총독부 철거 지시 및 독도 영유권 분쟁,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사과 촉구 등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내각을 상대로 가열 찬 당당 외교를 구사해왔다. 그러면서도 YS는 한일정상회담 시 하시모토 총리의 깍듯한 예우를 받고, 퇴임 후에도 일본에 초대돼 와 세대 대학의 청년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초청강연자로 나설 수가 있었다.
이럴 수 있던 이유에는 YS가 일본으로부터 도덕적 우위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전언이다. 1993년 YS는 대통령이 된 직후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물질적 배상 정책을 정부 차원에서 천명하고, 일본 정부에는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진상 규명, 후세에 대한 바른 역사 교육 등을 요구하며 역사 청산의 국내외적 관심과 지지의 동력을 얻어나갔다. 그 결과 명분상 우위를 점하며 한일 관계의 실리적 주도권을 이끌어 나갔다는 평가다.
관련해 YS비서관 출신의 김정남 전 청와대 교문사회수석은 지난 13일 다산연구소에서 발행하는 ‘다산포럼’논평을 통해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YS처럼 도덕적 우위에 서는 것”이라고 했다. 김 전 수석은 이어 “(문민정부 당시) 한국대사가 자신의 외교관 생활 중 일본 앞에서 일찍이 그렇게 당당해 본 적이 없었노라던 모습이 지금도 새롭다고 했다”고 전하며 “그에 비하면 한국의 도덕적 우위마저도 잃고, 경제보복까지 당하는 (문재인 정부의) 현실이 안타깝다”일갈했다.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놓고 과거의 국제간 협정이 깨진 것에 대해 한국은 못 믿을 나라라며 아베 신조 총리로부터 경제 보복의 빌미를 넘긴 것에 대해 아쉬워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일 관계 전문가로 꼽히는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도 지난 23일 서울 라이온스빌딩에서 열린 안민정책포럼에서 ‘YS식 대일외교’가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먼저 그는 우리 정부가 지소미아를 파기한 것은 결과적으로 한미일 동맹에서 한국을 배제시키려는 아베의 함정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일침을 전제했다. 뒤이어 강제 징용 배상 판결로 촉발돼 경제 문제 여파로 이어진 한일 갈등을 안보로까지 확대 재생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실익이 없음을 경계했다. 따라서 YS처럼 금전적 배상 대신 국제 여론의 지지를 받는 정신적 역사 청산의 배상을 요구하는 실용적 방법론이 대두될 필요가 있다는 제언을 현 정부는 새겨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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