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최기영 피알비즈 본부장)
소백산은 거대한 숲이다. 소백산을 오르는 등산로는 숲 사이로 난 오솔길 같다. 소백산 정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산봉우리와는 다르다. 산마루라고 하는 것이 맞다. 그 산마루로 향하는 오솔길은 오르는 내내 하늘을 열어 보여주지 않는다. 지상의 낮은 곳에서는 미풍조차 느낄 수 없는 뜨거운 여름날에도 그 숲 터널 속으로 들어가면 신기하리만큼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백두산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은 태백산을 지나 서남쪽으로 내달려 소백산에 이른다. 소백산은 겨울산으로 가장 유명하다. '소백'(小白)이라는 이름부터가 하얀 눈이 온통 산머리를 덮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만큼 겨울 눈꽃의 자태가 아름다운 곳이지만 소백산의 눈꽃을 감상하기란 언감생심이다. 소백산 겨울의 칼바람은 어지간한 심장을 갖지 않은 사람이라면 버티기가 정말 힘들다. 나 역시 아무 생각 없이 비로봉으로 가면서 그 칼바람을 한번 경험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릴 정도다.
그러나 몸을 가누기도 힘든 그 악명 높은 소백의 칼바람만 피한다면 소백산의 능선은 정말 유순하다.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 여름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초원, 그리고 가을철에는 소백 산정에 억새가 금빛 물결을 이룬다.
소백산의 능선을 걷는 등산로 중에서 하루 일정으로 산행을 즐길 곳은 많다. 단양 방면 어의곡리에서 시작해 소백산의 주봉인 비로봉에 올랐다가 연화봉과 천문대를 지나 희방사로 내려오는 코스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길이다. 반대로 희방사에서 시작할 수도 있고, 죽령이나 풍기읍 방면 비로사를 기점으로 잡는 코스도 있다. 어느 길로 오르든 소백산 비로봉으로 향하며 사방으로 펼쳐진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주목감시초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능선 길을 걷다 보면 초원으로 뛰어 들어가 드러눕고 싶은 충동이 들지만 아쉽게도 펜스가 설치돼 있어 정해진 코스를 따라 걸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 덕분에 소백산정의 초원은 늘 건강하다.
나는 소백산 당일치기 코스로 어의곡탐방지원센터에서 새밭(乙田)계곡을 따라 벌바위, 그리고 늦은맥이재를 지나 소백산의 능선길을 따라 상월봉과 국망봉을 지나 비로봉을 찍고, 어의곡 계곡길로 내려오는 길을 가장 좋아한다. 당일 코스로는 소백산을 가장 길게 탈 수 있고 소백산의 대표적인 봉우리인 비로봉과 국망봉을 한꺼번에 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들머리와 날머리 지점이 같아 차를 운전해 가더라도 편하다.
나는 오랜만에 그 사랑스럽고 시원했던 소백의 숲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은 열기가 식지 않은 태양 볕을 가려주며 소백의 옅은 바람이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정표가 아니면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우거진 숲길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 늦은맥이재를 올라 키 큰 철쭉나무 사잇길을 빠져나오자, 드디어 소백산의 순하고 장쾌한 산마루가 눈앞에 펼쳐졌다. 사방으로 속 시원하게 트인 조망을 보면서 소백의 산정으로 향하는 길은 내가 왜 이곳으로 왔는지를 설명해 준다.
능선길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상월봉이 나오는데 굳이 상월봉에 오를 필요는 없다. 그 시간을 아껴 국망봉으로 서둘러 가서 부드러운 파도처럼 겹겹이 펼쳐져 흐르는 소백 산세를 좀 더 오래 감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백산 국망봉의 조망은 정말 거침없이 시원하다.
국망봉에서 비로봉으로 가는 길은 또다시 다정한 숲길이 이어진다. 그 숲길을 빠져나와 어의곡삼거리를 만나야 그 넓고 아름다운 초원을 가로질러 비로봉으로 향할 수 있다. 초원의 억새는 어느새 금빛으로 변해가며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연화봉 쪽으로 보이는 주목감시초소가 그림 같다. 저 푸른 산정에 저와 같은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님과 함께 살고 싶은 사람은 나뿐일까?
이제 곧 가을이 되면 산꾼들은 단풍 절정을 따라다니며 산을 타곤 한다. 10월 초부터 설악산 대청봉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단풍의 향연이 시작된다. 그렇게 시작된 단풍은 산 아래로는 하루에 40m를 내려가고 남으로는 하루에 25km씩 번져나간다. 소백산 단풍은 10월 중순이 절정이다. 단언컨대 소백 산정의 가을은 우리나라 가을산 중에서 가장 스산하고 쓸쓸하며 극적이다. 그리고 어느새 능선에 내리쬐던 태양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고 그렇게 소백의 금빛 가을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가을산은 그렇게도 서로 치받던 인연의 마지막 이별의 향연이다. 소백의 산정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어김없는 계절의 변화를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들의 인연도 늘 시작이 있으면 어떻게든 매듭이 지어지곤 했다. 때로는 이별의 아픔이 두려워 그 인연을 잡아 두려고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인연은 계절처럼 속절없이 변했다. 소백산 역시 곧 모든 인연을 떠나보내고 가혹한 겨울바람을 견디어 내야만 한다.
가을산이 아름다운 건, 아마도 이별의 고통과 새로운 인연을 기다리는 희망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네 인생처럼 말이다.
최기영은…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前 우림건설·경동나비엔 홍보팀장
現 피알비즈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