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시민단체의 신뢰도·투명성 돌아보는 계기 삼아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김병묵 기자]
"우리는 본질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본질에 대한 인식에 따라 움직인다." 미국의 심리학자 앤서니 라빈스의 말이다.
윤미향 더불어시민당 당선인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단체 정의기억연대(정의연)를 둘러싼 논란이 좀처럼 진화되지 않고 있다. 사건의 본질에 대한 논의 대신, 본질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고 있어서다.
정의연에 대한 논란을 정리하면 크게 두 가지다. 정의연이 후원금 운영을 불투명·불공정하게 했다는 부실회계 논란, 그리고 지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내용을 사전에 인지하고도 피해자들에게 이를 감췄거나 제대로 전달하지 않은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내부고발로 시작된 이 논쟁은 사실 한 시민단체의 투명성과 신뢰도에 대한 의문 제기다.
하지만 사건이 커지면서 본질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윤 당선인의 국회 입성이 예정된 상황이다 보니 여야 정치권은 정의연 지지·비판으로 나뉘어 설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민주당 김두관 의원은 지난 13일 "일본의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밝혀 내고 이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활동에 대한 공격은 결국 ‘친일’ 이외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며 정의연에 대한 공세를 친일로 규정했다.
미래통합당은 지난 14일 "집권여당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비롯한 많은 시민들에게 큰 실망과 상처를 주고 있는 윤미향 당선인을 공천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사실관계 확인 후 제명 등 강력한 징계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34개 여성단체는 지난 12일 '최초의 미투 운동이었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우리의 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제목의 연대 성명을 발표하며 정의연에 힘을 실었고, 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는 15일 "기부금 논란으로 지난 30년간 역사와 정의 바로 세우기에 헌신한 정의연 활동이 부정돼선 안 된다"며 비슷한 맥락으로 공식 지지 입장을 밝혔다.
정의연의 활동 목적·가치와 활동하면서 일어난 문제는 별개의 일이다. 또한 이 사태의 중심에 선 윤 전 당선인이 같은 당이라고 해서, 혹은 다른 정당이라고 해서 공세를 주고받을 일도 아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친일·반일 논란은 사태의 본질에서 그야말로 '너무 멀리 간' 일이다.
이러한 상황은 정의연과 윤 당선인이 자초한 감이 있다. 지난 11일 이 할머니의 발언을 적극 반박하는데 집중하며 스스로의 진정성에 물음표를 달았다. 대한변호사협회 일제피해자 인권특별위원회 위원장인 최봉태 변호사는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봤을 때 이 할머니 말의 핵심은 결국 자신과 위안부 문제를 더 들여다봐달라는 것"이라며 "(정의연이)이에 따박따박 반박한 건 백해무익한 실수"라고 지적했다.
이어 윤 당선인은 지난 12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나에 대한 공격은 보수언론과 미통당(통합당)이 만든 모략극"이라며 "6개월간 가족과 지인들의 숨소리까지 탈탈 털린 조국 전 법무장관이 생각나는 아침"이라고 조 전 장관을 굳이 언급했다. 어떤 것도 사태 진정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행보였다. 결국 윤 당선인에 대한 고소·고발이 이어지면서 결말은 법정에서 보게 될 전망이다.
정의연은 21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을 배출한 대표적인 시민단체다. 한 때 주로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에 집중됐던 시민단체들의 활동은 시대의 흐름과 함께 다변화됐다. 그 중요성이 부각되며 이들의 목소리와 영향력도 커졌다. 국회에선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그만큼 시민단체가 갖춰야 할 요건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시민단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도이며, 그 신뢰도를 뒷받침 할 수 있는 것은 투명성이다.
하지만 정의연은 이번 사태로 신뢰도에 큰 타격을 입게 됐다. 정의연은 논란이 된 회계 문제들에 대해 관행과 단순 실수라고 해명하고 있다. 고의성과 무관하게 신뢰도를 떨어뜨릴 수 있는 사안이다. 대응도 좋지 않았는데 자성도 없다. 정의연은 회계처리상의 오류를 인정하면서도 "기부금 내역을 샅샅이 공개하는 것은 가혹하다"고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었다.
이미 논란이 여기까지 커진 상황에서 정의연의 남은 선택은 한 가지로 보인다. 정의연을 믿고 기부금을 보낸 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활동 중인 수많은 시민단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기부금 사용 내역을 공개하는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 민주당 김해영 의원이 "정의연과 윤 당선인은 기부금의 투명한 공개로 관련 의혹을 불식시키고 위안부 운동의 더 많은 추진력을 확보하길 바란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윤미향 논란의 본질은 정의연, 나아가 한국 시민단체들이 안고 있던 아마추어틱한 과제들, 이와 관련된 정치권의 시각 등이 표면으로 올라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한국 시민단체 운동의 분수령일지도 모른다. 윤 당선인의 의석이나 친일·반일 논란, 정의연의 활동과는 궤가 다른 문제다. 정의연은 향후 수많은 시민단체들의 롤 모델이 될 건지, 한국 시민단체들의 활동이 위축되는 방아쇠가 될 건지 갈림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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