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조회, 윤보선 대통령 예방…전국민운동 추진
박정희 군사정변 후 ‘유명무실’…살길 찾아 뿔뿔이
30대 전면 내세운 정풍운동…지지 높이는 해법될까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한설희 기자]
2020년 4월. 더불어민주당 용혜인 비례대표 당선자가 유튜브에 ‘국회의원 배지 언박싱(개봉)’ 영상을 올렸다. 이를 두고 일부 언론과 누리꾼들 사이에선 “국민이 위임한 권력과 책임을 가볍게 여긴다”는 비판이 일었다.
2003년 4월.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된 유시민 의원이 흰 면바지에 면 티셔츠를 입고 본회의장 단상에 올랐다. 그러자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의원들 사이에서 “국민에 대한 예의가 없다”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젊은 의원들의 ‘탈권위주의 등원(登院)’ 행보는 이처럼 기존 질서와 부딪히며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용혜인 당선자보다 60년, 유시민 전 장관보다 약 40년 앞서 젊은 김영삼(YS) 의원도 겪었던 일이다.
1961.01.26. 신민당 소장파 18명, ‘골덴 양복’ 입고 파격 등원
1961년 1월 26일, 대한민국 국회엔 ‘새바람’이 불었다. 4·19혁명으로 윤보선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자마자 민주당 내 구파(舊派)가 ‘신민당’을 창당해 여권이 분열되면서, 정국이 다소 어수선하던 때였다.
신민당의 소장파(少壯派), 김영삼·박준규·이상신·김창수·홍춘식·김옥형·황인원·조윤형과 민정구의 서태순·전휴상·장익현·한상준·장춘근·신준원 등 3040의 젊은 의원 18명이 뜻을 모았다.
이들은 26일 아침 저렴한 국산 ‘골덴(코듀로이)양복’ 차림으로 넥타이를 하지 않은 채 등원하는 파격적 행보를 선보였다. 당시 국회의원들은 값비싼 맞춤 정장을 격식에 따라 차려입고 등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골덴지로 만든 값싼 기성품, 그것도 넥타이 없는 복식의 정치인은 등장하는 모습 그 자체로 ‘충격’을 줬다.
한발 더 나아가, 이들은 기자들 앞에서 ‘맹약칠장(盟約七章)’, 즉 일곱 가지의 맹세를 선언했다.
첫째, 차를 폐차하고 대중교통을 사용할 것. 둘째, 요정(料亭, 고급술집)에 출입하지 않을 것. 셋째, 이권운동을 금할 것. 넷째, 선거제 개혁을 추진할 것. 다섯째, 학생들의 생활혁신운동을 지지할 것. 여섯째, 자유민주주의와 인격의 존엄성이 보장될 수 있는 남북통일을 노력할 것. 마지막으로 근로권(노동권)을 쟁취할 것.
권위주의 정치를 탈피하고 청신한 기풍을 진작하자는 취지가 담긴 선언문이었다. 특히 ‘폐차’와 ‘요정 출입 금지’는 사치와 향락에 젖은 기존 의원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항목이었다.
이들 모임엔 정식 명칭도 없었다. 모임 이름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박준규 의원은 “이건 무슨 ‘서클’ 같은 게 아니다. 하여간 여러분이 지어주시는 대로 하겠다”고 답하기도 했다. 언론이 이들의 운동을 ‘청조(淸潮, 맑은물)운동’으로 명명해 ‘청조회’라고 부른 것이 지금까지 굳혀졌다.
國產(국산)골덴服(복)입고 『淸潮運動(청조운동)』에 나선 議員(의원)들
"이건 무슨 써클이나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물론 모임의 명칭도 없지만 하여간 여러분이 지어주시는 대로 하죠." 일곱 가지 맹약을 들고 정치인의 새 생활운동을 선언하는 신민당 박준규 의원이 말했다.
국산품 골덴지로 지은 제복을 입고 나온 이들이 내세운 자동차 폐차, 이권운동금지, 요정출입 금지 등의 맹서는 모두가 실상 그들만의 운동이 될 수도 없는 것이고 보면 오히려 그들은 마땅히 해야 될, 너무나 당연한 일을 선언했을 뿐이기도 하다.
"전에도 가끔 국회의원 간에 새 생활운동이 논의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그건 거의 백안시 당해버리고 마는 설움을 가졌었다. 그리고 이번의 이 운동에 대해서도 벌써 "그건 정치의 정도가 아니다"라는 투의 말이 오가고 있다.
결코 그들만이 독점해버릴 수 없고 가장 간절한 이 운동이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널리 생활화되어야한다는 것일 따름이다.
-동아일보, 1961.01.27 기사
혼탁한 사회에서는 깨끗한 사람이 이단 취급을 받는다고 했다. 청조회의 이러한 ‘새정치 운동’은 태생부터 기존 정치인들에게 눈총을 샀다. 기성 의원들은 이들을 ‘위선자’, ‘자기선전을 위한 술책’ 등의 말로 헐뜯기 시작했다.
면전에서 “젊은 놈의 치기”, “저 혼자 잘났다는 것이냐. 그건 정치의 정도가 아니다”라며 공격하는 것은 일쑤요, 내각의 권중돈 국방장관은 이들을 향해 “저게 얼마나 가겠느냐. 밤이면 선글라스 쓰고 요정에 나가는 것 아니냐”며 조롱했다.
특히 당시 총리였던 장면(張勉) 총리의 측근은 ‘고급청주 청조’라는 언어유희를 유포해, 청조회 이상신 의원이 “우리가 버린 신사복을 장 총리실에 갖다 주겠다”며 크게 분노하기도 했다.
다음 〈동아일보〉 기사에는 당시 정황이 상세히 드러나 있다.
淸潮運動(청조운동) 비웃는 總理秘書(총리비서)
(중략)28일의 민의원 본회의는 성원이 되지 않아 유회됐는데 유회가 선포되기에 앞서 갈색 골덴복 유니폼을 입은 신민당의 소장의원들과 기자들 사이에 한동안 타의 없는 논쟁이 벌어졌다.
"맹약칠장에 보면 고급요정에는 일체 출입을 않겠다고 했는데 그 고급의 급수가 어떻게 됩니까?"
이런 질문을 받고 김영삼 의원은 "그건 빠(바)까지야, 왜냐면 빠에도 여급이 있으니까"라고 받았다.
"모르기는 하지만 앞으로 얼마면 차츰 그 급이 올라가지 않겠소?" 이렇게 꼬집었으나 김 의원은 펄쩍 뛰었다. 그때 사표를 낸 권중돈 국방장관이 개입을 했다.
"여봐, 그거 얼마나 입고 있을 텐가? 또 얼마 가다가는 벗어부치거나 밤이면 검은 안경 쓰고 명동이나 요정에 나가는 거 아냐?" 하고 비꼬았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양일동 신민당 의원은 "저런 때가 좋아, 지금은 한 이십대의 청년들처럼 저런 기분은 알 수가 있어"라고 스스로를 회고하는 투였다.
(중략) "만병통치 신풍환 고급청주 청조(청조회의 청조)"는 장 총리의 모 비서가 야당 소장 의원들의 청조운동과 민주당 소장파의 신풍회를 비웃는 글이라고.
청조운동을 일으킨 젊은 의원들은 처음부터 그들이 가는 길 앞에 비웃음과 모략이 있을 줄 각오하고 일절의 잡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기로 했으나, 이러한 운동을 생각조차 못하는 장 총리의 비서가 그런 말을 한 데는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28일 아침 이상신 신민당 의원은 "우리가 벗어던진 신사복을 장 총리실에 갖다 주어야겠어. 내핍생활을 비웃은 사람들이나 많이 입으라고 해"하고는 분을 참지 못하였다.
-동아일보, 1961.01.29 기사
언론들마저 여지없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기자들은 청조회를 향해 “‘요정’의 기준이 무엇이냐. 어디까진 출입하겠다는 것이냐”, “상황에 따라 기준을 바꿀 것 아니냐”는 질문을 퍼부었다.
〈경향신문〉의 소두영 논설위원은 칼럼을 통해 “청조운동이 일시적 ‘쇼’가 되지 않기를 기원한다”면서도 “굳이 골덴 양복으로 개성을 구속하고 획일성을 추구해야겠느냐”고 비판했다.
淸潮運動(청조운동)의 生活化(생활화)를 위하여
(중략) 이렇듯 정체된 사회 조류 속에서 근자 민주·신민 양당의 소장층 의원들이 청조운동을 일으켜 정계와 대중사회에 청신한 기풍을 진작하는 데 나섰다는 것은 그 발단이 어디서 유래하였든 간에 전체사회를 위해서 다행한 일이었다.
(중략) 모처럼 일어난 이러한 기운이 본의 아니게도 스스로를 사회에서 소외시키는 결과가 되지 않고 동시에 대중의식에서 유리되지 않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몇 마디의 사견을 보정하고자 한다.
(중략) 청조운동의 성원들은 국산지로 된 국민복을 '유니폼'처럼 입고 나왔으나 청조운동 자체가 일시적인 행사나 정치적 '쇼'가 아닌 바에야 구태여 천편일률로 똑같은 신조국민복을 과시할 필요까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형식주의나 센티멘탈리즘이라거나 아니면 하나의 제스처라는 인상을 줄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정치가들과 일반대중에게 보급시킬 것은 기대한다면 자칫 잘못하면, 개성을 구속하는 획일성을 요구하는 결과가 돼 반발을 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이다.
-경향신문, 1961.01.29 소두영 논설
반면 여론은 청조회의 정풍 운동에 한껏 박수를 보냈다.
부유한 젊은 계층, 요새말로 ‘강남좌파’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골덴 양복을 차려 입고 자동차도 버리는 검박한 생활을 따라했다. 유성환 전 신한민주당(신민당) 의원도 지난 2014년 본지에게 “청조운동은 정치 개혁에 대한 공감대를 확대시킨 운동”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제3대 도의원 73명 중 대졸 도의원이 10명이 넘었다. 개혁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당적을 넘어서 나의 제의로 9명의 도의원이 골덴 작업복을 입고 등원했다. 나는 김영삼 의원이 주도하는 청조회 팬이었다. 그 이유는 26세의 젊은 의원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헌법파괴행위를 직접 경무대를 방문해서 만류한 사실은 당시 젊은 정치 지망생들에게는 큰 감명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1961.02.11. 청조회, 윤보선 대통령 예방…전국민운동 추진
청조회는 청조운동이 단순 ‘찻잔 속의 태풍’으로 머물지 않길 바랐다. 그들은 신민당 전체가 해당 운동에 동참하고, 나아가 국민 전체가 사회개혁에 참여하길 꿈꿨다. 그 일환으로 청조회 멤버 십여 명은 윤보선 대통령을 예방해 ‘골덴 양복’을 증정하며 청조운동의 전국민 생활화를 주장했는데, 이에 윤 대통령도 “생활혁명과 관련된 입법 운동을 추진하는 것도 좋겠다”고 화답했다.
날로 번져가는『淸潮(청조)』運動(운동)
이제는 윤보선 대통령도 골덴 양복을 입고 신생활운동의 선두에 서게 됐다. 박준규 신민당 의원 등 십여명의 청조운동의 멤버들은 11일 상오 청와대를 방문하고 윤 대통령이 입을 골덴 신생활복을 선사한 것이다.
"우리는 수천년래 지속해 온 생활방식 중 불합리한 폐풍폐습을 타파하고 생활혁명을 일으켜야지."
이것은 윤 대통령의 지론이다. 이날 골덴 제복을 받은 윤 대통령은 청조운동을 하는 의원들에게 "앞으로 나도 이 양복을 입지"하며 "생활혁명을 위한 입법조치도 연구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견해를 표명했다고.
건국 이래 최대 난국을 맞아 이제 대통령 국회의원, 정부요인들 할 것 없이 모두 비장한 각오로 자멸의 길에서 스스로를 구해내자는 기풍을 세울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골덴 제복으로 생활혁명을 하자는 이 결의 앞에 아직도 서울의 아낙네들은 외국 냄새만 풍기는 화장에 긴 양단 치마를 휘두르고 다닐 것인가?
-동아일보, 1961.02.11 기사
2월 첫 총회를 시작으로, 청조회는 종로에 위치한 한 다방을 아지트로 삼아 비정기 총회를 열었다. 이들은 ‘내핍생활(청렴생활)운동 계몽강연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할 것과 원내동참운동 및 원내순화운동 계획을 세웠다. 4월엔 ‘이승만 하야 일주년’을 기념해 “새로운 민족적 주체 세력을 형성하자”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YS는 기자들에게 “앞으로는 세궁민(細窮民, 빈곤층)들에 대한 기아대책 등 여러 문제를 확대해 다룰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당시 한국은 전쟁 직후 경제가 낙후돼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청조회는 성금(誠金)·성미(誠米) 운동을 비롯해 ‘국회의원 세비 기부운동’을 펼쳤다. 이는 오늘날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 국회 일각에서 시작된 ‘세비 기부 운동’의 시초라고 볼 수 있겠다.
誠金·誠米運動(성금·성미운동) 決議案(결의안)을 提出(제출)
13인의 청조회 의원들은 25일 상오 춘궁위기 극복에 관한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들의 춘궁 위기 극복운동은 청조운동의 일환으로 전개하는 것인데, 이 결의안 내용은 ➀앞으로 석달 동안 의원세비의 반액과 ②삼부기관의 판공비 반액 이상을 송제하여 세궁민 구호에 돌려쓰는 동시에 ③성금·성미 운동을 널리 전개한다는 것이다.
-동아일보, 1961.02.26 기사
이들은 청조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려면 힘이 있는 ‘보스’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윤보선 대통령 또는 전남지사 출신이자 1961년 UN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할 정도로 명망이 높았던 서민호 의원을 조직의 리더로 추대하려고 했으나, 구체화되진 않았다.
淸潮運動(청조운동) 政黨化(정당화)를 指向(지향)
(중략) 어느 시기가 오면 하나의 정당운동으로 전환할 것을 궁극의 목표로 하고 있는 이들 청조회는 이번 폐회기간 중 조직 확장 운동의 하나로 대중 속을 파고들어감과 동시에 그들의 정치운동화에 필요한 조직체계를 갖추기 위해 '보스'에 윤보선 씨나 서민호 씨를 추대할 계획이라는 것이다.
(중략) 청조회의 한 멤버는 "우리는 지금 보스를 윤보선 씨와 서민호 씨 중 누구로 택하느냐에 신중한 검토를 하고 있으며 대외적인 여론도 참작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멤버는 윤 씨와 양 씨 중 누구를 택하든지 청조회가 지향할 길은 "대통령중심제로의 환원", "국회의 단원제", "국회의원 수의 축소", "남북교류 등 과감한 통일정책 구현" "경제정책에 있어 어느 정도의 계획경제" 등이 될 것이라고 시사했다.
-경향신문, 1961.05.02 기사
한편, 청조 지방강연회의 열기는 몹시 뜨거웠다. 수백 명의 지방 사람들이 강연장에 몰려들었고, 강연이 끝나면 청조회 멤버들을 붙잡고 온갖 곳을 따라다녀 난감한 상황도 펼쳐졌다. 정치사회와 관련된 토론을 요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민심을 접하면서 YS는 국민들의 현 정권에 대한 불만과 직선제에 대한 열망을 체감했는데, 이는 차후 박정희 정권 아래서 ‘야당생활’에 몰두하는 계기가 된다.
自稱(자칭) 『안토니오』의 辯(변)
전주에서의 요청에 따라 청조운동을 위한 강연을 하고 돌아온 신민당의 김영삼 의원은 "그런 강연은 전에는 별로 해본 일 없는 특수한 것이었다"는 즐거운 비명을 올렸다. 비가 오는 데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것은 또 이해가 간다고 하지만 강연이 끝난 다음에도 뒤를 따라서 백여 명이 다방까지 몰려드는 데는 질색했다는 것이다.
"한 군데는 워낙 많은 사람이 몰려드니 할 수 없이 다방에서 나가라고 하더군. 그래서 그 다음엔 미리 다방 하나를 시간으로 돈 5000환을 주고 그 사람들과 여러 가지로 토론을 해 보았는데 강연보다도 더 어렵더군"하고 김 의원은 상황을 설명하더니 현 정권에 대한 실망이 그와 같이 클 것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고 한숨 섞인 결론을 내렸다.
-동아일보, 1961.03.20 기사
1961.05.16. 박정희 군사정변 후 ‘유명무실’…살길 찾아 뿔뿔이
4·19 혁명으로 출범한 5대 국회는 의정사상 처음으로 양원제로 운영됐으며, 의원내각제 하에서 비교적 큰 권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5대 국회는 불과 9개월 만에 박정희를 비롯한 육군사관학교 8기생 출신 군인들로 인해 막을 내려야 했다.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군부세력은 1962년 3월, 4374명의 정치인들에게 ‘정치활동정화법(정정법)’이란 재갈을 물려 놓고 공화당을 조직했다.
이에 청조회의 쇄신 활동도 5·16을 맞아 흐지부지해지고 말았다. 사실상 모든 정치적 활동이 중단됐기 때문이다.
일부 회원들은 군정에 굴복해 5·16을 지지하고 공화당에 참여했으며, 일부는 야당에 남았다. 현실에 절망해 박준규 의원처럼 “정치를 잠시 쉬겠다”는 사람도 나타났다. 청조회는 유명무실한 상태로 지내다 결국 1963년 1월 14일, 그들의 아지트였던 종로의 다방에서 ‘공식 해체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清潮會(청조회)의 「피날레」
우리 정계에서 특이한 위치를 점해왔던 청조회는 정신적 부채를 짊어진 채 파산하고 말았다.
몇 번이나 다짐하던 행동통일의 원칙이 깨어지고 어떤 사람은 여로, 또 어떤 사람은 야로 제각기 갈 길을 찾아가기로 했다는 청조회 성명이 발표된 14일, 청조회의 아지트였던 종로 다방은 벌집 쑤셔 놓은 듯 윙윙했다.
"우리는 각박한 현실 앞에 이 이상의 주저가 있을 수 없음을 재인식하고 각자는 각자의 양심과 소신에 따라 정당을 택하기로 했다."
파산 선언이 낭독되고 있을 때 의자에 몸을 내던지고 있던 청조회원들 얼굴에는 어딘가 허탈과 허망 같은 것이 깃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여론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하던 청조회원들이 민망할 정도의 고민을 겪은 다음 자폭적인 행동을 태하게 된 것은 5·16 후에 취한 일련의 사건에서 그들이 너무나도 경솔한 짓을 한 데 있었다. (중략) 그들은 여도 야도 그렇고 마음에 드는 데가 없다는 공통점은 발견했으나 그렇다고 정치에서 몸 뺄 수는 없다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에 각자 소신에 따라 정당을 하도록 뿔뿔이 흩어졌다. 회원 가운데는 회가 저지른 책임을 느끼고 "정치를 쉬어야겠다"고 한숨짓는 사람도 생겨났다. 아무튼 정치사에 어쩌면 찬연한 빛을 발할 수도 있었던 청조회는 이런 곡절을 거쳐 비참한 종지부를 찍었다.
△여당 참여=전휴상 금옥형 장익현 홍춘식 박준선 이교선 서태원 백남억
△여당 불참=조윤형 김창수 이상신 김용성
△정치 쉬겠다=박준규-경향신문, 1963.01.15 기사
청조운동은 이후 정치권에서 하나의 실패사례로 자리 잡는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3년 ‘대혁신운동’을 제창하자, 일부 언론들은 청조운동을 예시로 들고 “결국 흐지부지 되기 마련”이라고 냉소 섞인 비판을 가했다.
말의潮流(조류) (1) 大革新運動(대혁신운동)
(중략) 청조운동 하던 때 골덴복을 입고 앞으로 절대 요정 출입을 안하겠다던 그 숱한 선량들은 청조운동이 흐지부지된 후엔 오늘에 이르기까지 더욱 호사스런 차림으로 요정만 잘 드나들고 있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또 언제 대혁신운동에 호응하여 일정기간 동안 검약생활을 내세울지 모른다고 말하는 이가 있을 정도다. (중략) 지금은 민정당 출신인 김영삼 의원은 현 집권당이나 정부체계로 보아 그것(대혁신운동)은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동아일보, 1964.01.17 특집기사
1961년, 5대 국회 초에 모였다가 5·16 혁명을 거쳐 민정 이양 준비가 시작되자마자 권력속의 먼지로 사라진 청조회. 길지 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청조회의 개혁 운동은 우리 정계에 한 획을 그었다.
자가용 지프차를 폐지하고 값싼 골덴 양복 유니폼을 착용하는 등 혁신을 추구했던 청조회는 30대를 넘지 않은 청장년층 의원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세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여론의 지원을 등에 업자 낡은 사고방식에 젖은 기성 정치인과 한때나마 동등하게 대립할 수 있었다.
5·16이 없었다면 청조운동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뱃지 언박싱에 혀를 차고, 하얀 면바지에 격노하는 국회의 권위주의 형태가 지금보단 나아지지 않았을지, 아쉬움을 남기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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