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조서영 기자]
2020년은 방역과 경제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한 해였다. 정부는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 상향과 자영업자·소상공인의 경제적 손실을 두고 고민이 이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방역과 경제는 반드시 함께 잡아야 하는 두 마리 토끼”라고 말했으나, 일반적으로 둘은 상충됐다. 신규 확진자 천 명이 넘자, 전문가들의 3단계 격상에 대한 요구는 커져 갔다. 그러나 정부는 경제적 충격을 우려해 주저하는 실정이다.
상충되는 가치에 대한 깊은 고민은 23년 전에도 있었다. 1997년 외환위기를 마주한 한국은 IMF(국제통화기금) 협상에 입장 차를 보였다. IMF로부터 받는 차관은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으나, 그 대가가 가혹했기 때문이다. 협상 대 재협상, 차관 대 실업이 맞부딪쳤다.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들뿐만 아니라, 언론의 평가도 엇갈렸다.
<시사오늘>은 과거의 인물, 그리고 과거의 사건에 대한 당대 신문들의 평가를 재조명하며, 보수와 진보 언론 양극단의 평가를 비교해왔다. 여기서 ‘어떤 평가가 옳은가’에 대한 가치 판단은 전면 배제한다. 판단은 ‘사상의 자유’를 만끽하면서도, 동시에 ‘과잉 이념’의 시대에 지쳤을 독자들에게 맡길 예정이다. 이번 여섯 번째 ‘옛날신문 보기’는 1997년 IMF다.
1997.11.21. IMF 구제금융을 요청하다
1997년 11월 21일 밤 10시 경, 긴급 기자회견이 열렸다. 당시 경제부총리는 “금융·외환시장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IMF에 유동성 조절 자금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김영삼 정부가 200억 달러 규모의 긴급 구제금융 지원을 공식 요청한 것이다. 한국은 기자회견 직후 미셸 캉드쉬 IMF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지원 약속을 받았다. 그로부터 이틀 후 실무협의단이 서울에 도착했다.
<경향신문>과 <조선일보>를 비롯한 여러 신문은 22일자 1면을 ‘IMF 구제금융 공식 요청’으로 채웠다. 그러나 각 신문의 2~3면의 어조는 사뭇 달랐다. <조선일보>는 “나라망신”이라며, “구제금융 신청은 너무 늦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라 비판했다. 그러나 <경향신문>은 “정부는 끝까지 버텼다”며, 복합적인 국제 사회 배경 분석에 힘썼다.
나라망신…타이밍도 놓쳐
정부가 ‘IMF 우산’ 속으로 일시 피난하게 됐다. 금융기관들이 “한국의 신용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겠다”며 돈을 더 빌려주지 않자, 고육지책으로 선택한 생존책이다. 한국을 못 믿겠으면 이제 IMF의 신뢰도에 의존해 돈을 빌려달라는 선언인 셈.
(중략) 선진국 클럽이라는 OECD 회원국이자, 세계 11대 무역 국가를 자임해온 한국으로선 적지 않게 망신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중략) 돈은 돈대로 쓰고, 망신은 망신대로 당했으니, “한국은 경제 체력이 좋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던 재정경제원 관리들은 뭐라고 변명할지 알 수 없다.
- <조선일보> 1997.11.22. 2면
‘발등의 弗끄기’ 막다른 선택 정부 구제금융 신청까지
우리 경제가 IMF의 수술대에 오른 것은 겉으로만 보면 우리 스스로는 현 위기를 타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사정에는 미국의 숨겨진 의도, 거기서 파생되는 한국에 대한 국제 사회의 불신, 그리고 무엇보다 함량미달의 시장대책 등 복합적인 배경이 얽혀있다.
(중략) 임 부총리는 취임 기자회견 발언대로 단기 국채 발행과 중앙은행 간 협조융자를 통한 외자조달로 문제를 봉합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 등이 시큰둥하면서 당초 계획이 물 건너가자 결국 구제금융 요청으로 돌아선 것이다.
- <경향신문> 1997.11.22. 3면
1997.12.03. 경제 주권 상실의 날
협상은 12월 3일 마침표를 찍었다. <동아일보>는 이날을 ‘경제주권 상실을 세계에 알린 날’이라 명명했다. 서울 힐튼 호텔에서 진행된 정부와 IMF의 협상은 진통을 겪었다. 1일 오전 0시 반 정부는 9개 부실 종금사를 업무 정지 조치를 받아들이며, “최종 타결됐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시간 뒤 협상은 모두 취소됐다. 캉드쉬 총재의 추가 요구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부실금융기관 조기정리를 추가 요청했다.
다시 양측의 밤샘 협상이 이어졌다. 11월 23일부터 진행된 협상-재협상은 4차례나 반복됐다. 2일 새벽 양측은 △성장률 하향조정과 경상수지 적자축소 △부실금융기관 퇴출 △국내 금융기관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들의 인수·합병(M&A)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회계제도 투명성 확보 등에 합의했다. 이는 곧 신자유주의 체제(IMF 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이틀 후 IMF는 12억 6천만 달러의 1차 자금을 인출했다. 지원 자금 규모는 총 550억 달러였다. 그중 IMF 210억 달러, IBRD 세계은행 100억 달러 등의 지원이 예정됐다.
1997.12月. 두 번의 각서와 무너진 재협상론
외환위기는 김영삼 정부 시절 발생했으나, 다음 정부와도 무관하지 않은 일이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협상 후 약 2주 뒤였기 때문이다. IMF는 후보들에게 협약을 이행하겠다는 각서를 요구했다. 당선 이후에도 이를 준수하라는 요구였다. 세 후보는 원칙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입장이었으나,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4일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대구 유세를 가기 위해 김포공항에 나가던 중이었다. 강만수 차관이 달려가 각서 서명을 직접 받았다. 이회창은 회고록을 통해 “그런 식의 각서 요구는 국제 관행에 어긋나고 국민 자존심에도 반하는 것”이라면서도, “나라가 위급한 상황인 만큼 불만을 참고 서명해 주었다(176쪽)”고 당시를 회상했다.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는 지방 유세 중으로, 박범진 사무총장이 그를 대신해 서약서에 후보 직인을 찍었다.
그러나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순순히 서명하지 않았다. 그는 청와대에 별도의 서약서를 보냈다. ‘계속적인 논의와 세부적인 협상을 통해 대량 실업 등에 따른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할 것’이란 단서를 붙여 서명했다. 김대중은 자서전을 통해 “IMF와 맺은 대기성차관 협약 양해 각서는 너무도 불평등했다(669쪽)”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차관 제공의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다”며 “대규모 실업 상태가 걱정됐다”고 덧붙였다.
이에 이회창은 ‘하나마나한 단서’라고 꼬집었다. IMF 재협상에 대한 입장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금융시장 개방이 가져올 실업을 우려하는 재협상론과, IMF 합의사항에 대한 확고한 이행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는 반박이 맞부딪쳤다. 아래는 김대중과 이회창의 회고록에서 드러난 입장 차다.
나는 김영삼 정권의 경제 파탄을 강도 높게 비난하며 IMF 재협상을 주장했다. 그러자 이회창 후보가 재협상론이 외환위기를 더욱 조장한다고 공격해왔다. 사실 IMF와 맺은 대기성차관 협약 양해 각서는 너무도 불평등했다. 외국인 주식 투자 한도를 50퍼센트로 올리고, 은행과 증권 등 금융 시장을 개방해야 했고, 수입선 다변화제도 앞당겨 이듬해 폐지해야 했다. 경제 신탁 통치라고는 하지만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669쪽.
김대중 후보는 IMF 합의 상황에 대해 재협상을 주장하고 나왔다. 이것은 바로 외국의 언론과 금융기관들의 부정적 반응을 불러 일으켰고 과연 한국 정부가 IMF 합의를 지킬 수 있겠느냐는 의혹이 일게 만들었다. (중략) 이런 주장은 나라가 어찌되든 국민의 불만에 영합해 선거에서 덕을 보려는 포퓰리즘에 지나지 않았다.
- 이회창 회고록 2권, 177쪽.
두 인물의 입장 차는 언론의 상반된 평가로 이어졌다. <조선일보>는 11일자 1면에 정치권의 재협상 발언이 외화난을 악화시킨다고 비판했다. 반면 같은 날 <한겨레> 1면은 ‘IMF 시대 쟁점과 해법’ 기획을 통한 책임론 논쟁으로 채워졌다. 이들은 재협상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 대신, 2면에 자체 여론조사 결과를 통해 우회적으로 재협상 공감론이 높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정치권 “IMF 재협상” 발언 外貨難 악화 부채질
IMF가 한국 정부의 경제개혁 약속이행 여부에 불안한 시각을 갖고 있는데다, 정치권의 재협상 발언, 국내 언론의 감정적인 보도 등이 겹치면서 국제 금융계가 한국에 자금지원을 더욱 꺼리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 금융기관의 외화난이 갈수록 악화, IMF 지원을 받고도 다시 지급 불능 위기에 몰리는 상황이 현실화되고 있다.
- <조선일보> 1997.12.11. 1면
IMF 시대 쟁점과 해법① 경제난 책임
한국 경제를 ‘부도 상태’로 이끌고 간 책임소재를 가려야 한다는 경제난 책임논쟁이 한창이다. (중략) 경제난 책임논쟁이 경제위기의 근원인 재벌가 재벌 체제 옹호론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추궁 없이 진행되는 등 핵심을 벗어나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책임론의 1차 대상은 아무래도 김영삼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와 관료다. (중략) 정부에 책임이 있다면 역시 최종 책임자는 최고 국정책임자인 김 대통령과 경제난이 불거진 시기에 경제 정책을 맡은 강경식 전 부총리와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 등 3명을 지목할 수밖에 없다.
- <한겨레> 1997.12.11. 1면
아울러 <한겨레>는 2면에 자체 여론조사 결과를 담았다. 조사 결과, ‘대선 뒤 재협상해야 한다’는 주장에 69.5%가 공감했으며, ‘IMF가 협상 과정에서 부실금융기관 정리와 금융시장 조기 개방 등 요구’에 대해 58.1%가 적절하지 않다고 답변했다. 뿐만 아니라 경제 악화 책임 문제에 대해서는 54.9%가 한나라당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답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13일,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3당 후보의 4자 회담이 열렸다. 외국의 불신을 종식시키고, 후보들의 의견을 일치하기 위한 자리였다. 결국 이 자리에서 네 사람은 IMF와의 합의사항을 준수할 것이란 합의문에 공동 서명을 했다. 일종의 두 번째 각서였다.
1997.12月~1998.3月. 그럼에도 우리는 방법을 찾았다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선 결과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그로부터 4일 뒤 미국 재무부 차관 일행이 한국을 찾았다. 이들은 △정리해고제 수용 △외환관리법 전면 개정 △적대적 인수·합병(M&A) 등 ‘IMF 플러스’를 요구했다. 모두 협약에는 없는 내용이었다.
김대중은 이를 “우리에게 당시의 협약 이상의 개혁적 조치를 요구하고 있었다”며 “어느 것 하나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2권 20쪽)”고 회고했다. 그는 “이를 수용한다면 노동계의 반발은 불 보듯 뻔했다”면서도, “몇 십만 명의 실업자를 구하려다 4천만 명이 살고 있는 나라 전체가 부도를 맞을 수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로써 미국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13개 선진국과 IMF로부터 100억 달러를 조기 지원하겠다고 통보했다. 김대중은 “눈 앞의 부도 위기를 넘겼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눈 앞의 부도 위기를 막았을지언정, 눈 앞의 노동자들을 구하지는 못했다. 대의를 위한 것이라던 정리 해고는 수많은 가장과 가정을 무너뜨렸다. 각자도생의 신자유주의가 도래한 것이다.
한편 새마을 부녀회는 “경제가 살아야 나라도 살고, 우리 모두가 산다”며 ‘애국 가락지 모으기 운동’을 열었다. 이들은 12월 11일 △금 2445돈 △은 133돈 △현금 593만 원을 중소기업청장에 전달했다.
이후 크리스마스, 김대중은 소비자보호원 방문 후 ‘금 모으기 운동’을 제안했다. 그는 “순수한 아이디어 차원의 얘기”라면서도, “민간단체들이 모든 금을 달러로 바꿔 외채를 갚는데 쓰고, 3년 정도 후에 국민들에게 사들인 시가에 이자를 보태 돌려주면 될 것 같다”고 방법론을 제시했다.
그의 생각은 현실이 됐다. 시민 단체와 방송사들이 참여해, 350만여 명이 227톤의 금을 내놓았다. 국민 개개인의 희생과 노력이 모여, 2001년 8월 IMF로부터 지원받은 195억 달러 전액을 모두 상환했다. 이는 예정보다 3년 앞당긴 결과였다.
이후로도 위기는 반복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어 2020년 코로나19 발(發) 경제위기가 찾아왔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앞선 두 위기보다 코로나에 따른 경제적 충격이 더 크다고 분석했다. 2008년 충격을 100이라고 했을 때 1997년 위기는 130.2, 코로나는 149.5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 5월 경총이 전국 4년제 대학 경영·경제학과 교수 22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또 다시 찾아온 위기 앞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한국은행은 21일 현안 보고서를 통해 “코로나19 위기는 과거 위기와 비교할 때 국가·부문 간 더 극명한 형태로 차별화돼 나타나고 있다”며, 취약 계층에 정책 여력을 집중하고 안전망 구축해야 함을 강조했다.
반면 경총의 조사에 참여한 교수진은 규제 개혁을 주장했다. 진입규제 폐지 및 신산업 규제 완화 같은 규제혁신(73.4%)과 ‘노동시장 유연화 같은 노동시장 개혁(57.2%)’이 가장 높았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한국의 선택은 ‘각자도생(各自圖生)’이었다. 그로부터 23년이 흘렀다. 방역과 경제 사이의 줄다리기를 넘어, 우린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 이 기사에 나온 여론조사에 대한 자세한 조사개요와 결과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nesdc.go.kr)를 참조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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