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지난 4년 간 보수를 괴롭혔던 건 ‘극단파 딜레마’였습니다. 박 전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새누리당(現 국민의힘)이 여론과 동떨어진 태도를 취하자 중도파가 이탈했고, 중도파가 이탈하자 극단파가 당의 주도권을 장악했는데요. 당이 ‘극우화(極右化)’의 길을 갈수록 여론은 더 새누리당과 멀어져 갔습니다. 이렇게 새누리당은 극단파가 당을 좌지우지하는 ‘극단파 딜레마’에 직면합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진 건 보수가 전국단위 선거에서 4연패(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선, 2020년 총선)를 한 뒤였습니다. 보수가 궤멸 직전까지 떨어지고, ‘흑묘(黑猫)든 백묘(白猫)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인식이 공유되고서야 보수는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즉 중도층에 어필할 수 있는 중도보수 후보를 선택합니다. 4·7 재보궐선거 승리는 바로 이런 흐름에서 나타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더불어민주당도 과거 새누리당과 유사한 종류의 고민을 떠안게 된 것 같습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정부여당에서는 여러 차례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자녀 입시비리 의혹, 윤미향 의원의 위안부 피해자 이용 의혹, 박원순·오거돈 전 시장의 성비위 의혹 등 굵직굵직한 사건만 해도 한 손에 꼽기 어려울 정도였고, 법적 문제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비판에 휩싸인 사건들은 셀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극단적인 보호반응이 나왔습니다. ‘조국 사태’ 때는 거리로 나와 ‘조국 수호’를 외쳤고, 윤미향 의원 논란이 있을 때는 문제를 제기한 이용수 할머니에게 ‘배후 세력’이 있다는 음모론을 설파했습니다. 박원순 전 시장의 성추행 피해자에 대해서는 ‘2차 가해’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극단주의로 줄달음치던 당을 막아보려던 조응천·박용진 의원, 금태섭·김해영 전 의원 등은 오히려 ‘앞으로 공천을 받기 어려울 것’이라거나 ‘당을 떠나라’는 등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극단파의 목소리가 과대 대표되자, 민주당의 대응도 같은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검찰이 ‘과잉수사’를 한다거나, 언론이 ‘가짜뉴스’를 보도한다는 식이었습니다. 민주당의 ‘이상한 해명’에 의문을 느낀 중도파가 시나브로 ‘촛불 연합’에서 이탈했지만, 극단파의 강경한 주장에 휩싸인 민주당은 이를 애써 무시했습니다.
그렇게 중도파는 민주당을 등졌고, 중도파가 빠져나간 민주당에서는 강경파의 목소리가 더 커졌습니다. ‘그래도 국민의힘은 좀…’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마저 국민의힘에 표를 던진 건, 극단파의 목소리로 뒤덮인 민주당이 국민의힘보다 나을 게 없다고 판단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일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4·7 재보궐선거 결과는 극단파에 포획된 민주당을 ‘심판’하는 성격이 강합니다. 그렇다면 민주당이 이 위기를 극복할 방법은 단 하나, 극단파의 요구를 잘 갈무리해서 중도파와 조화시킬 수 있는 길을 찾는 겁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새누리당에서 나타났듯이, 한 번 주도권을 잡은 극단파의 힘을 빼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중도파가 이탈하면서 이미 당은 극단파가 ‘다수파’로 등극한 상황이므로, 당권을 잡으려면 극단파의 표심에 호소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2017년 대선을 앞두고 잠재적 대선주자였던 이인제 전 의원,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등이 광화문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실제로 선거 직후 민주당 2030 의원들이 ‘조국 사태’ 등에 대한 대처가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았던 것을 반성한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내놓자, 이른바 친문(親文) 커뮤니티에서는 ‘뒤통수를 친다’, ‘서초동 집회에 나선 국민들을 모욕한다’는 등의 반발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당원으로서, 또 오피니언 리더(opinion leader)로서 당권주자와 대권주자를 선택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할 공산이 큽니다.
입장문 발표에 참여했던 장경태 의원이 곧바로 “조 전 장관이 잘못했다는 의미가 아닌데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며 고개를 숙인 것은 이들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방증합니다. 이러니 당권·대권주자들 입장에서는 극단파의 입맛에 맞는 정책을 제시할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중도층은 다시 한 번 민주당에서 멀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극단파 딜레마’에 빠지는 겁니다.
이번 선거에서도 나타났듯, 선거 승리는 ‘누가 중도를 잡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당권 경쟁 과정에서는 중도층의 호감을 살 수 있는 후보보다 ‘선명한 후보’가 당원들의 지지를 받는 경향이 강합니다. 4·7 재보궐선거에서 민심을 확인한 민주당은 과연 이 문제를 풀어낼 수 있을까요. 민주당이 해답을 찾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다음 대선의 향방도 바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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