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오세훈, 지역·이념 확장성 바탕으로 대역전극
非영남·중도보수·탄핵과 무관한 후보, 돌풍 일으킬 수도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보잘 것 없는 지지율이다. 하지만 노풍(盧風)을, 오세훈의 대역전극을 기억하는 그들에게 ‘미약한 시작’은 중요치 않다. 오로지 ‘창대한 마무리’만이 관심사일 뿐이다. 그러나 우연한 승리는 없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오세훈 서울시장에게는 ‘역전의 비결’이 있었다. 과연 야권 대권주자들 가운데 ‘승리의 조건’을 갖춘 후보는 누구일까. <편집자주>
위기는 계속된다. 4·7 재보궐선거 압승에도, 국민의힘의 고민은 현재진행형이다. 차기 대선이 300여 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제1야당 대선주자 중 지지율 5%를 넘는 인물은 아무도 없다. 현 추세대로라면, 아직 정계 진출 여부조차 불확실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게 ‘정권 심판론’ 기수를 맡겨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윤 전 총장이 대선에 나설지, 설사 출마하더라도 긴 시간 동안 이어질 정치권의 무자비한 검증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을 옹립해 대선주자로 삼으려던 바른정당이 ‘불출마 폭탄’에 사실상 해산 수순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장외 주자’에 대한 ‘올인’은 리스크가 지나치게 큰 전략이다.
그렇다면 국민의힘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자강(自强)이다. 내부에서 윤 전 총장과 맞설 수 있을 만한 ‘유력 대권주자’를 키워내야 ‘만약의 사태’에 대한 대비가 가능하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힘으로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정당이라는 사실이 증명돼야 윤 전 총장을 비롯한 장외 주자들에게 매력적인 행선지로 비칠 수 있다.
차기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홍문표 의원은 4월 27일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정당이 되면 윤 전 총장은 들어오지 말라고 해도 우리 당에 들어올 것”이라며 “스스로 강한 정당이 돼야 대권 후보들에게 매력적인 행선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1% 후보’ 돌풍의 세 가지 조건
문제는 지지율이다. <리얼미터>가 <오마이뉴스> 의뢰를 받아 4월 26일부터 30일까지 실시해 5월 3일 발표한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조사 결과에 따르면, 보수 야권 후보 가운데 지지율 10% 이상을 기록한 후보는 윤 전 총장밖에 없었다. 무소속 홍준표 의원(5.0%), 오세훈 서울시장(4.5%),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2.1%), 원희룡 제주도지사(1.3%)는 한 자릿수에 머물렀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군소 후보’도 얼마든지 돌풍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대선 1년 전까지 지지율 1.6%에 머물렀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당내 경선 통과조차 불투명했던 오세훈 서울시장처럼 우리 정치에는 저조한 지지율을 딛고 대역전극을 일군 전례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민의힘 군소 후보들이 ‘돌풍의 주인공’이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노 전 대통령과 오 시장 사례에서 얻은 교훈을, 전문가들은 세 가지로 요약한다. 비(非) 영남, 중도보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의 거리감이다. 노 전 대통령이 그랬듯이 ‘영남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역적 확장성과 오 시장처럼 중도층을 품을 수 있는 이념적 확장성을 가졌으면서, 전통적 지지층의 이탈을 방지할 수 있도록 박 전 대통령 탄핵에서 자유로워야만 국민의힘 차기 대선주자로 우뚝 설 수 있다는 설명이다.
1. 노무현 돌풍의 비결…‘호남을 넘어라’
2002년 새천년민주당 경선에서의 노 전 대통령은 지역적 확장으로 군소 후보의 한계를 뛰어 넘은 대표적인 사례다. 제14대 대선에서 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호남에서의 압승과 수도권에서의 우위에도 그 외 지역으로의 확장에 실패하면서 완패했다. 제15대 대선에서는 DJP 연합을 통해 충청권에서의 지지를 확보했음에도 보수 분열에 힘입어 39만557표차 신승(辛勝)을 거두는 데 그쳤다.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 ‘영남 후보론’이었다. 제16대 대선 당시 유권자 수는 영남이 호남의 두 배에 달했다. 투표자 수만 봐도, 영남이 648만여 명이었던 반면 호남은 290만여 명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영남권에서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내가 후보로 선출돼야 차기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며 영남 후보론을 설파하고 나선 건 이런 이유였다. 유권자 수 차이를 고려하면, 영남 출신 후보가 나서 영남 표를 분산시켜야만 정권 재창출이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당시로서는 파격(破格)이라고 할 수 있는 노 전 대통령의 주장에 민주당 당심(黨心)도 반응했다. ‘호남이 미는 영남 후보’라는 아이디어는 호남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도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던 민주당 입장에서 해볼 만한 도박이었다. 그 결과 노 전 대통령은 ‘이인제 대세론’을 넘어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될 수 있었고, 본선에서도 부산(29.9%)과 울산(35.3%), 경남(27.1%)에서 선전하며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꺾고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제16대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 캠프에서 일했던 정치권의 한 노정객은 5월 6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영남 후보론은 허주 김윤환 선생이 제일 먼저 내세웠던 논리인데, 현실적으로 호남 사람은 대통령이 되기 어려운 환경이었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며 “노 전 대통령의 당선이 반드시 영남 후보론 덕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민주당 지지자들 입장에서 영남 사람인 노 전 대통령을 밀어야 하는 이유가 돼준 건 맞다”고 회고했다.
2. 오세훈 돌풍의 비결…‘보수를 넘어라’
오 시장의 서울시장 보궐선거 승인은 이념적 확장성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국민의힘(당시 자유한국당) 내에서는 ‘우클릭’ 열풍이 불었다. 탄핵을 계기로 중도보수가 이탈하면서 강성보수의 발언권이 강해지자, 당권 혹은 대권을 원했던 정치인들이 앞 다퉈 강한 발언을 쏟아낸 탓이었다.
문제는 강성보수가 일반 여론과는 유리(遊離)된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강성보수는 제19대 대선과 제7회 지방선거, 제21대 총선에서 ‘선명한 후보’를 내세우는 데 성공했지만, 선거에서 이기는 데는 실패했다. 당심을 얻는 과정에서 분출된 메시지가 중도층의 표심을 사로잡아야 하는 본선에서 발목을 잡았던 까닭이다.
오 시장은 이 틈을 파고들었다. 오 시장은 강성보수가 당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중도보수라는 자신의 브랜드를 잃지 않았다. 경쟁자였던 나경원 후보가 출마 선언 자리에서 ‘빠루(쇠지렛대)를 든 투사’ 이미지를 소환하고, ‘짜장면론’을 내세우며 선명성을 강조하는 와중에도 “본선에서 이길 수 있는 확장성 있는 후보를 선택해 달라”는 태도를 유지했다.
이념적 확장성을 강조한 오 시장의 승부수는 위기 상황에서 힘을 발휘했다. 2016년 제20대 총선부터 2017년 제19대 대선, 2018년 제7회 지방선거, 2020년 제21대 총선에 이르기까지 5년 동안 열린 전국단위 선거에서 4연패를 당한 보수는 ‘본선 경쟁력’을 우선시하기 시작했다. 선거 캠프에서조차도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나왔던 오 시장이 대역전승을 거둔 건 그의 확장성이 보수 유권자들에게 어필한 결과였다.
박상헌 공간과미디어연구소장은 “기존의 강성보수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감이 큰 상황에서 야권의 중도 확장성 문제가 화두로 떠오른 국면에 오세훈 후보가 기회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며 “나경원 후보에 비해 불리할 것으로 예상됐던 오세훈 후보가 승리할 수 있었던 건 중도 확장성”이라고 분석했다.
3. 지역과 이념, 그리고 박근혜
노 전 대통령과 오 시장의 공통점은 ‘주류’가 아니었다는 데 있다. 노 전 대통령은 호남 세력이 중심인 민주당에서 ‘영남’을 내세웠다. 오 시장 역시 강성보수가 헤게모니를 장악한 국민의힘에서 ‘중도보수’를 말했다. 이는 두 사람이 ‘대세 후보’가 될 수 없는 원인으로 작용했지만, 한편으로 누구도 생각지 못한 ‘뒤집기’를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이렇게 보면, 국민의힘 후보들에게 필요한 ‘돌풍의 조건’ 윤곽이 드러난다. 주류는 아니지만, 지역적·이념적 확장성을 가진 후보다. 대한민국 선거를 움직이는 두 축은 ‘지역’과 ‘이념’이다. 현재 국민의힘은 지역적으로 ‘영남’, 이념적으로 ‘강성보수’에 포획돼 있다. 때문에 영남 출신 후보, 강성보수 후보는 상대적으로 당내 경선에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결집’에는 유리할지언정 ‘확장’에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노 전 대통령의 영남 후보론이 ‘호남 출신 민주당 후보는 호남 표를 결집하는 데 그치지만, 영남 출신 민주당 후보는 호남 표에 영남 표 일부를 더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였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영남 출신 후보는 기존에 국민의힘이 갖고 있는 영남 표 외에 ‘플러스 알파’를 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하다.
강성보수 후보도 마찬가지다. 오 시장은 서울시장 보궐선거 경선에서 ‘강성보수 후보를 내세우면 강성보수 표밖에 못 얻지만, 중도보수 후보를 내세우면 강성보수 표 위에 중도보수 표까지 더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렇다면 현 국민의힘에서 돌풍을 일으킬 수 있는 후보의 조건은 ‘비(非) 영남, 비(非) 강성보수’로 압축된다.
여기에 국민의힘은 특수한 고민거리를 한 가지 더 안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유승민 전 의원을 비롯해, 현재 거론되고 있는 보수 대권주자들은 박 전 대통령 탄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윤 전 총장이 벌써부터 ‘과거사 사과’를 요구받고 있는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결국 국민의힘 후보 중 지역적·이념적 확장성을 가지면서, 박 전 대통령 탄핵에서 자유로운 인물만이 ‘돌풍의 조건’을 갖췄다는 결론이다.
정세운 정치평론가는 “지금 국민의힘은, 영남 후보는 ‘영남당’ 논란에, 강성보수 후보는 ‘도로 한국당’ 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국민의힘 후보들 중 영남 출신이 아니면서 중도보수 성향이 강하고 박 전 대통령 탄핵에서 자유로운 인물이라면 언제 유력 후보로 떠올라도 이상할 게 없다고 본다”고 했다. 차기 대선에서 돌풍이 허락될 ‘1%의 후보’는 과연 누구일까.
* 본 기사에 인용된 여론조사의 자세한 조사개요와 결과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http://www.nesdc.go.kr)를 참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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