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조서영 기자]
그간 여러 기업인들이 정치권에 입성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과거 현대건설 회장이었다. 또한 △김호연 빙그레 회장(18대) △문국현 유한킴벌리 대표이사(18대) △원혜영 풀무원식품 창업자(14, 17~20대)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13~19대) △안철수 안랩 창업주(19~20대) 등 역시 기업인 출신 국회의원이다.
왜 이들은 엄청난 부(富)를 누리고도 정치의 가시밭길을 택했을까. 한 기업의 회장을 소환해낸 시대적 상황이란 또 무엇일까. 결과적으로 유권자들은 어떤 선택을 했으며, 경제적 요인은 선거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줬을까. 이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기업인의 출마가 처음 가시화된 29년 전 제14대 대선을 찾았다.
<시사오늘>은 과거의 인물, 그리고 과거의 사건에 대한 당대 신문들의 평가를 재조명하며, 보수와 진보 언론 양극단의 평가를 비교해왔다. 여기서 ‘어떤 평가가 옳은가’에 대한 가치 판단은 전면 배제한다. 판단은 ‘사상의 자유’를 만끽하면서도, 동시에 ‘과잉 이념’의 시대에 지쳤을 독자들에게 맡길 예정이다. 이번 아홉 번째 ‘옛날신문 보기’는 1992년 제14대 대선이다.
기업하기 위해 정치 찾은 기업인
1992년 제14대 대선은 ‘양 김(金) 구도’에 집중됐다. 또한 유권자들은 거주 지역과 출신 지역이 영남인지 아니면 호남인지에 따른 지역 투표 행태를 보였다. “우리가 남이가”라며 지역감정을 조장하려 했던 ‘초원복집 사건’이 선거를 3일 앞두고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후보(YS)가 8.2%포인트 격차로 김대중 민주당 후보(DJ)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공고한 구도에 변수로 등장한 이들이 기업인이었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했다. 반면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10월 새한국당 후보 추대 논란 끝에, 최종 불출마 선언했다. 두 사람의 최종 출마 여부는 달랐으나, 정치권에 발을 들인 배경엔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었다.
언론을 통해 공개된 두 회장의 발언엔 공통적으로 ‘정치의 한계’에 대한 시각이 담겼다. 이들은 ‘기업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정주영)’ 혹은 ‘정치 개혁을 위해서(김우중)’ 정치 참여를 고려했다.
정주영씨 일문일답
- 참여의 동기는 무엇이며 구상은 언제부터 했는가.
“지난 80년 산업 통‧폐합 당시 기업인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정치가 올바르지 못하면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때부터 기업을 제대로 하려면 언젠가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정치를 산다는 비난이 있는데.
“돈으로 정치할 것이라는 생각은 기우다. 정치자금을 내본 사람으로서 정경유착의 생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나서서 그러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겠다. 그래야 정치와 경제가 올바로 된다.”
- 정치의 가시밭길을 가려고 하는가.
“경제적 측면에서 나라가 이 지경인데 집권여당이 계속 정권을 잡으려고 한다. 5년 더 지나면 나라가 수렁에 빠질 것이다. 나라를 구하는 차원에서 정치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 지지계층은.
“중산층과 중소상공인이 될 것이다.”
- <경향신문> 1992.01.09. 3면
김우중씨 기자회견 내용
- 정치상황에 대한 견해는.
“지금의 정치인으로는 개혁이 될 수 없으며 그들은 개혁할 용기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기성정치인들도 늦지는 않았다. 사람을 키우고 개혁하면 잘 되어갈 것이다. 많은 사람이 나라 걱정을 하고 있지만 기회가 없어서 못 나서는 것이다.
나는 사업을 했으며 사업으로 끝나야 한다는 게 진심이다. 그러나 그런 여건이 안 될 때는 누구든지 나설 수 있는 것이다.”
- <한겨레> 1992.10.28. 3면
시대적으로도 경제가 선거 이슈로 부각됐다. <신동아>와 <월간중앙>은 여론조사에 근거해 ‘물가문제’와 ‘경제회복(성장)’을 중요한 선거 이슈라고 밝혔다. 1987년 민주화 달성 이후, 상대적으로 비(非)정치적인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한국정치학회보>에 실린 학술저널에 따르면, “과거의 선거에서 절대적 중요성을 지녔던 민주화나 정권의 정통성과 같은 정치적 사안들이 사라짐에 따라 비정치적이고 구체적인 정책을 둘러싼 논의가 부각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제6공화국에 들어선 이후 약화된 국내외적 경제여건과 한국경제의 장래에 대한 어두운 전망 등이 겹치게 됨에 따라 국민들의 경제문제에 대한 우려는 한층 높아졌다(박경산‧1993)”고 설명했다.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투표
중요한 것은 민심이다. 유권자들의 관심은 정치에서 경제 이슈에 옮겨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투표는 정치적 요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중앙일보>는 9월 경제문제를 위해 대통령이 됐으면 하는 후보와 실제로 대통령이 됐으면 하는 후보는 일치하지 않다고 보도했다. 경제문제를 잘 해결할 것으로 보이는 후보로 김영삼과 정주영 후보는 각각 12%와 34%이었으나, 대통령이 됐으면 하는 비율은 각각 22%와 8%로 뒤바뀌었다.
이에 대해 <한국정치학회보>는 “과반수의 유권자가 투표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두 가지 문제 중 하나 이상으로 경제문제를 들고 있지만, 각 후보들의 경제 정책에서의 차이성보다 지역과 같은 비경제적 측면에서의 차이가 두드러지기 때문에 경제적 요인들의 중요성은 사라진다”며 “한국경제가 정치와 관련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한국정치의 종속변수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선거 결과에 영향을 주는 것은 제한적(김재한‧1993)”이라 분석했다.
뿐만 아니라 같은 기업인들의 투표 역시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을 비롯해 거의 모든 계급에서 정주영 회장이 아닌 YS를 택했다. 그나마 회사관리층에서 정 회장이 DJ를 앞섰다. 왜 자본가들은 정 회장에게 표를 주지 않았을까.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그에게 투표하는 것이 자본가로서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이는데 말이다.
정영태 인하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현 정부와 정치인의 경제적 무능과 과도한 간섭 그리고 정치인과 관료들의 과도한 정치자금이나 뇌물요구와 같은 부정부패로 인한 현 정부와 정치인에 대한 강한 불신이 있었다”면서도, “영남출신과 중부출신 자본가의 헤게모니를 내용으로 하는 현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심리상태의 표현”이라 분석했다.
기업인의 ‘정치 돌풍’이 가진 의미
결과적으로 정주영 회장은 ‘경제 대통령’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정치라는 벽을 뛰어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대기업 회장의 출마는 정치권에 작지 않은 울림을 줬다.
14대 총선으로 국민당이 31석을 획득하자 언론은 이를 ‘돌풍’이라 칭했다. <한겨레>는 4월 4일자 지면에 “민자당에 대한 거부의 몸짓”이라고, <조선일보>는 같은 날 “다수의 중산층 보수파가 1노2김에 등을 돌린 것”이라 평가했다. 정 회장의 창당이 국민들에게 새로운 하나의 대안으로 부상했으며, 민심은 총선 결과에 의해 증명됐다는 설명이다. 이는 24년 후, 제20대 총선에서 38석을 획득한 국민의당의 부상(浮上)과도 닮아있다.
[칼럼] 14대 총선을 보고
이번 14대 총선의 최대변수는 흔히 국민당이라고 일컬어졌는데 총선 결과는 이러한 예상을 사실상 웃도는 것이었다. 국민당의 이러한 선전 혹은 승리를 가능케 한 지역은 바로 대구‧경북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이것을 민자당에 대한 거부의 몸짓으로 받아들여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난공불락 민자당의 아성으로서의 대구라는 고정관념은 이로써 깨어진 것이다.
(중략) 그러나 이것은 국민당에 대한 적극적 긍정, 즉 국민당을 정치적 대안으로 선정한 것은 아니다. 이보다는 현실적으로 민자당 후보를 낙선시킬 수 있는 유효한 수단으로서 국민당에 표를 몰아주었다고 보아야 하며, 이점에서 그것은 성공적이었다.
(중략) 이러한 구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번 총선에서 나타난 대구‧경북 및 대전‧충청권에서의 민자당 지지의 이반이다. 그간의 민자당 정권의 실정과 부도덕성이 이러한 전통적지지 기반의 부분적 이반을 가능케 하였다.
- <한겨레> 1992.04.04. 5면
[칼럼] 민심은 떠나고 있는데…
지난 14대 총선 결과가 가장 확실하게 말해주는 것, 그것은 민심이 특히 수도권과 중부권에서, 민자당을 현저하게 떠났다는 사실이다. (중략) 말하자면 다수의 중산층 보수파가 ‘1노2김’에 등을 돌리고 정주영씨에게 기운 셈이며, 진취적인 중간층과 이른바 서민층 다수는 통합야당의 간판으로 출마한 참신한 신진 후보들에게 표를 던진 것이다.
(중략) 대망하는 것은 건실한 대안 세력의 성장이다. 많은 국민들이 대안이 없다며 아쉬워하고 있다. 그래서 그중의 상당수가 정주영씨 당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런 그룹이 젊음의 이상주의를 충족시켜줄 리는 만무하다. (중략)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해 밤낮 ‘청와대 의중’만 쳐다보는 사람들 그러나 우리들 민주시민은 ‘국민의 의중’을 더 중시하는 참신한 대안 세력을 만들어주고 키워주는데 온 힘을 다할 때이다.
- <조선일보> 1992.04.04. 5면
그러나 대선에서 국민당은 총선 때만큼의 돌풍을 일으키지 못했다. 정 회장은 16.3% 득표율에 그쳤다. 선거 결과에 대해 <경향신문>과 <동아일보>는 “정치와 경제(기업)는 서로 다른 것”이라고 평가했다.
정치와 경제는 역시 달랐다.
그는 이번 대선에서 ‘경제대통령’의 깃발을 흔들며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 3년 안에 3백억 달러 흑자, 5년 안에 통일, 아파트 반값 공급 등의 청사진을 들고 국민들의 눈과 귀를 모았다.
허나 정주영씨는 경제에서는 원로이며 거인이지만 정치에서는 초년병이었다. 정주영씨와 두 김씨와의 싸움은 바둑에 비유하자면 9급과 9단의 싸움이었다.
(중략) 대통령 선거는 어디까지나 정치지 경제는 아니다. 경제쪽에서 보면 정치는 경제의 일부일는지 모르나 정치쪽에서 보면 경제 또한 정치의 일부일 뿐이다.
- <경향신문> 1992.12.22. 5면
[사설] 국민당에 바란다
첫째 문제는 기업과 정치의 혼동이다. 기업운영식 정치가 가능할 것인가를 지켜보는 것이 국민의 관심이었다. 현대라는 방대한 기업 조직이 없었다면 국민당의 당세가 그처럼 빠른 속도로 확대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국민당에 대한 지지폭을 좁혀버린 큰 원인의 하나였다. 역시 기업과 정치는 달랐다. 정치에는 기업운영 방식과는 전혀 다른 정치 특유의 속성과 논리가 있음이 판명됐기 때문이다.
국민당이 건전한 야당으로 발전되기를 바란다. (중략) 대선 후 짐작되는 새로운 정치구도를 예상해보면 국민당의 견제 역할이 중요해짐을 감지할 수 있다. (중략) 이를 위해 국민당은 정책정당의 면모를 과시하고 정책정당의 면모를 과시하고 잡다한 구성성분을 하나로 녹여 떳떳한 국민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 <동아일보> 1992.12.27. 3면
이후로도 정치권의 경제 정책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기업인들의 출마는 계속됐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경제 성장’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구태한 정치권의 새로운 ‘대안 세력’으로서의 기대의 의미가 더 컸다.
역설적으로 1992년 제14대 대선 역시, 정 회장에게 경제 문제 해결 가능성을 믿고 지지한 경우는 낮았다. 대신 국민들은 ‘양김 청산’이라는 정치적 관점에서 그에게 표를 던졌다.
경제 위기와 기업들의 위축은 기업인들의 출마를 결심하게 했다. 이는 국가의 경제 정책에 대한 시장의 반응을 대신한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정치가 부패했다고 느끼는 민심의 결과다.
좌우명 : 행복하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