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노승환 前 국회부의장, 외길 野 정치인” “1955년 정통 野 뿌린 지킨 민주당 주인의식”
“마포 3대 100년 살아… 2세 정치인 오해 받기도” “부의장 내려와 구청장, 행정 경륜 다 쏟아내”
“하늘공원, 경기장 유치…마포 발전 30년 당겨” “주례만 1만 4000여회 서 세계 기네스북 올라”
“2세 정치인 명암 4번 당선서 3번 경선 치러” “아버지 비주류, 나도 비주류 민주당 떠난 적 없어”
“변화와 혁신 사회 가려면 신주류 나와야” “싸가지 없는 진보에 경고…무능 이전 태도 고쳐야”
“당 비호감 못 줄이면 정권 재창출 물 건너 가” “이념 경도되지 않는 실사구시 진보 노선 가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구술 노웅래 |정리 정세운·윤진석 기자]
“나는 콩나물국을 싫어한다.”
신혼 때 아내에게 ‘콩’자 들어가는 반찬은 밥상에 놓지 않으면 좋겠다고 부탁한 적도 있다.
콩나물은 집안의 아픈 사연과 얽혀 있다.
나는 마포에서 3대째 살고 있는 ‘마포 토박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심성이 곱고 부드러운 선비였다. 모시 바지 차려입고 글만 읽었다. 일본 순사가 오면 방에서 단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바깥일은 사리 분별이 분명한 어머니(며느리)가 도맡았다.
선친(故 노승환 전 국회부의장)은 29세 마포에서 초대 서울시의원에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서울시의원 두 번, 국회부의장을 포함한 국회의원 다섯 번, 마포구청장 두 번을 지낸 외길 야당 정치인이었다.
어린 시절은 선친의 화려한 정치 활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루하루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5·16 쿠데타가 터지자, 민주주의 신념이 강했던 선친에게 온갖 고난이 찾아왔다. 식구들은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해야 했다. 가난은 늘 죽음과 직결돼 있다. 바로 위 누나는 세 살 때 약 한 봉지 제대로 먹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밥상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밥상은 항상 전쟁터였다. 10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은 개다리소반 위에는 꽁보리밥에 간장, 대충 버무린 김치와 멀건 콩나물국이 전부였다.
돌덩이처럼 식은 보리밥을 콩나물국에 말면 알갱이들이 알알이 떠다녔다. 한 숟가락 더 먹으려고 콩나물 한 가닥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아이들은 치열하게 몸싸움을 했다. 집안 형편이 조금 나아진 후부터 밥상에 콩나물국은 금기였다.
(이상은 <노웅래의 공감정치> 중 일부다. <시사오늘>은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국회의원에게 시대산책을 청했다. 지난 5월 7일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만남을 가졌다.)
1. 아버지 노승환, 어머니 고정희
“어릴 때는 아버지와 별로 안 친했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하하하. 그건 아니고요.”
말을 이어갔다.
“가부장적이니까 엄한 가정이잖아요. 대화를 많이 하거나 따뜻한 잔정은 별로 없었어요. 아버지께서 정치하느라 밖으로 도셔서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근근이 살았어요. 학교 갔다 와 수제비라도 먹으려면 돈이 있어야 하잖아요. 어머니(고정희 여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 있겠어요. 봉투 붙이는 것, 구슬 꿰는 것….”
- 엄혹했던 시절이라, 고생이 더 많았겠네요.
“커오면서 어머니 목소리는 우리가 한 번도 못 들었어요. 아버지를 한마음으로 뒷바라지하셨어요. 지금 기준으로는 어떻게 저렇게 살았을까 싶어요.”
- 아버지 원망도 했겠습니다.
“평생 이웃을 위해 일하고 많은 도움을 주는 활동을 했잖아요. 손가락질 받기보다 칭찬받고 인정받는 측면에서는 떳떳한 분이었어요. 국회의원 하게 되면서부터 우리도 밥 좀 먹고 살게 된 것 같아요. 생전 더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게 후회됩니다.”
선친은 2014년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한 살 차인데 아직 정정하다.
- 어머니 연세는 어떻게 되나요.
“아흔넷이세요.”
선친께 살갑게 못 해드려 어머니께는 전화도 자주 하고, 식사도 모시고 더 잘하려 하고 있다고 한다.
“연세 때문에 그런지 그 얘길 하시더라고요.”
- 무슨 얘긴가요.
“‘난 죽어서라도 뜨거운 데 들어가기 싫어’ 화장을 원치 않고 조그만 데라도 매장했으면 좋겠다는 거지요. 아버지 때는 갑작스레 준비하느라 분당 납골묘에 모셨거든요. 한 평짜리라 절할 수도 없어 죄송스럽지요.
평소 서민 정치에 뜻을 뒀고 화려한 것을 싫어한 분이지만, 사회 기여도 많이 했잖아요. 저 말고도 자식이 다섯 더 있어요. 아버지 때 못 했는데, 어머니께라도 잘하자고 의견을 모았지요. 다행히 인연 된 곳이 생겼어요. 멀긴 하지만 충주에 공원묘역이 있어요. 한 7평 정도 만들었지요.”
- 나중엔 함께 이장하게 되는 건가요.
“그래야지요.”
- 노승환 국회부의장은 입지전적인 인물이잖습니까.
“그렇죠. 아버지 형제가 여덟인데 보통 가정에 밥 먹고 살 정도도 아니었어요. 홀로 자수성가해 정치를 시작했지요.”
2. 현대사 옛날이야기
(노웅래 의원은 서재 쪽으로 걸어가 아버지의 회고록이 담긴 책을 꺼냈다. <솔은 굽어도 꺾이지 않는다> 라는 제목이었다. 일대기도 일대기지만, 현대사를 꿰뚫는 데 요긴한 정치 참고서 같았다. 요즘 정치 면면과도 닮아있다. 개략해 옮겨본다.)
아버지 노승환의 시점에서
아래는 노승환 회고록 중
1927년, 정묘년(丁卯年) 9월 서울 마포 아현동 고개 밑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신공덕동을 거쳐 도화동에 이르기까지 서너 차례 거주지를 바꾸었으나 오로지 마포를 터전으로 삶을 누려왔다.
1949년 12월 해방정국에서는 민족 민주 반공을 기치로 청년단 활동을 했다. 대한민국청년동맹 소속이었다. 자발적으로 지역 치안을 위해 힘쓰는 한편 반탁운동과 미군정 연정 반대 운동의 선봉에 섰다.
6·25 전쟁에서 서울 수복 후 마을 재건이 관건일 때 동장을 맡아달라는 어르신들의 부탁을 받고 20대 중반 신공덕동 민선 동장으로 일하게 됐다. 전후 복구와 재건의 물결이 요동치는 시기였다.
反자유당
소속 정당은 민주당이었다. 정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종신 집권 음모에서 비롯된 3선 개헌안 4사 5입 정치 파동을 겪은 후 자유당의 횡포에 맞서 반자유당 세력이 자유 민주파를 중심으로 창당(1955년 9월 18일)해 반독재 투쟁을 전개하는 중이었다.
민주당은 창당 선언에서 “책임정치 구현, 민주세력 결집과 강화만이 국정쇄신의 방도임을 확신한다”, 정강은 “공정한 자유선거에 의한 대의정치와 내각책임제 구현”을 기치로 내걸었다. 정책은 “호헌 준법정신의 구현, 국민의 기본권 보장, 선거에 대한 관권 간섭 배제, 국방력의 확보” 등 26개 항이었다. 신익희 선생을 당 대표로, 곽상훈·백남훈·조병옥·장면 4인을 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1956년 정국은 5월 15일 치러진 3대 정부통령 선거가 절정이었다. 민주당은 3월 28일 신익희 대선후보, 부통령에 장면 후보를 내세워 민주당에 의한 정권교체를 확신했다. 신익희 선생은 “못 살겠다, 갈아보자” 구호와 책임정치를 내걸고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5월 3일 토요일, 서울시민 30만 명이 한강 백사장에 모였다. “대통령은 우리 국민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다. 심부름꾼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갈아치우는 것이 당연한 권리 아닌가?” 서울 지역 마지막 유세에서 신익희 선생이 사자후를 터트렸다.
하지만 선생은 유세를 마친 다음 날 호남선 열차에 몸을 싣고 떠나는 중 뇌일혈로 쓰러졌다. 신익희 선생을 잃어버린 민주당은 결국 이승만 정권 타도에 실패하고, 장면 박사가 부통령에 당선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민주당 분화
그해 나는 민선 동장으로 지방자치 경험을 살려 서울 시의원에 출마했다. 이승만 정부 마포 관내 최연소 시의원이 됐다. 5·15 선거와 신익희 선생 서거 후인 터라 나의 정치적 소신은 확실한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지방자치는 기둥뿌리 민주주의임을 체험한 5년이었다. 제2대 서울시의회 선거는 1960년 12월 12일 치러졌다. 재선에 당선됐다.
이 시기 민주당은 분화를 겪고 있었다. 구파(김산·민관식·이민우·윤제술·김영삼·유진산·소선규 등 23인)와 신파(김상돈, 홍익표, 이상철, 이철승, 양병일, 오위영, 정일형, 현석호 등 13인) 간 갈등이 컸다.
내가 서울시의원으로 활동할 당시 마포 지역구 국회의원은 민주당 내 신파 지도자인 김상돈 씨였다. 그는 제헌국회가 등원한 이래 3~5대 국회의원을 지낸 중진이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정치 초년 시절부터 따르던 마포 출신 선배 정치인들은 모두 구파에 속해 있었다. 이런 사정은 김재광(13대 국회부의장 역임) 형도 마찬가지였다. 그와는 인연이 각별했다. 민주당 청년 당원 시절 신익희 선생을 함께 보좌했고, 2대 서울시의회도 같이했다. 훗날 김재광과는 13대 국회 여야 국회부의장으로 만나는 인연도 있다.
우리는 중앙당 정치현장에서 신파 인사들에게 푸대접을 받으면서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네와 난 양파 하자고. 양파는 먹기라도 하잖아. 껄껄.”
민주당 구파는 한민당 참여 후 민국당을 거쳐 민주당에 이른 정치 인맥이었다. 신파는 3선 개헌 4사 5입 파동 이후 신당 창립 운동에 참여해 민주당에 합류한 인맥이었다. 마침내 구파는 1960년 9월 22일 신당 발족을 선언하고 이듬해 신민당을 창당했다. 위원장에 김도연, 간사장에 유진산이 선출됐다.
하지만 일 년도 못 가 1961년 5·16 혁명정부가 내린 포고 제4호에 의해 당 활동은 정지됐다. 이후 30년간 대한민국은 암흑기였다.
단언컨대 민주 인사들이 모여 만든 민주당 분열은 결국 군사독재 쿠데타 집권을 가져왔다. 선배 정치인들의 분열 양상을 지켜보면서 내가 체득한 정치적 통찰력 한 가지는 통합이 이루어질 때는 한국 정당정치의 꽃이 피어나고 분열과 갈등에 빠질 때는 제3의 독재 권력이 민주의 피를 빨아먹었다는 것이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선배 정치인들의 세력 다툼에 멀쩡한 후배들의 앞길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더 안타까운 건 신구 갈등으로 빚어진 정당 내 분열 양상이 그 후로도 한국 정당정치의 중요한 국면마다 되살아난다는 점이었다.
3선 개헌
1967년 2월 17일 신민당이 출범했다. 전신인 민주당과 민정당 통합 후 민중당이 만들어졌고, 다시 민중당과 신한당으로의 분화를 거쳐 신민당으로 합해진 거였다.
1969년 9월 14일 박정희 정권은 3선 개헌안을 변칙으로 통과시키며 장기집권의 야욕을 드러냈다.
제1야당인 신민당은 유진산이 전당대회 2차 투표 끝에 이재형, 정일형을 누르고 대표위원으로 선출됐다. 진산 체제의 출범이었다. 김영삼·김대중·이철승 등 40대 기수론이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1971년 8대 총선을 맞아서는 내게도 국회의원 출마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마포구는 갑과 을로 나뉘기 전인 단일 선거구였다. 마포의 승환이로 사랑받았고, 바닥 표를 훑는 데 자신 있었다. 야당 투사로 한솥밥 먹어온 지구당 참모들이 정치적 자산이었다. 그들은 5월 봄볕 농군처럼 피부가 새까매지도록 훑고 다녔다.
선거일이 다가오니 예상했던 대로 여권의 조직적인 방해 공작이 뒤따랐다. 연설하면 어김없이 분뇨 처리 차가 유세장을 가로막았다. 개표 당일 후보자를 막아서기도 했다. 야당 참관인은 꼬박 사흘 동안 개표장을 지켰다. 부정선거를 걱정해 개표 상황을 감시했다. 나는 45세의 나이로 거물급 공화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박정희 정권의 집요한 방해에도 마포 토박이 노승환의 시대를 열었다. 8, 9, 10대 총선에서 연이어 당선됐다. 마포구는 명실상부 야권의 아성이 됐다. 독재 권력에 신성한 표로 맞서는 민주화 성지가 돼줬다.
황색 바람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섰다. 정치풍토 쇄신법을 만들어 정치 활동을 못 하게 규제했다. 대상자만 10대 국회의원 210명, 정당 간부 정치인 등 총 835명에 이르렀다. 헌법상 공민권이 유린 된 사상 초유 사태였다.
정치 규제법에 묶인 나는 삼엄한 감시 속에 살았다. 큰아들 광래는 신군부 방해로 변변한 직장조차 못 구했다. 둘째 웅래(노웅래 국회의원)는 모 언론사에 상위 성적으로 입사했으나 정치규제에 묶인 야당 중진의 아들인 것이 밝혀져 취소되는 불이익을 당했다.
신군부는 기존의 제일 야당을 해체하고, 짜 놓은 기획 속에서 관제 야당을 급조했다. 정통 야당이 숨을 죽인 것만은 아니었다. 1981년부터 85년까지 4년간 의회·정당정치가 질곡의 세월을 겪는 동안 얼어붙은 계곡 밑으로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영삼의 23일간 단식투쟁 끝에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조직됐다. 계파를 초월해 합류하면서 명실상부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 됐다. 1985년 2월 12일 12대 총선을 앞두고 신한민주당(신민당)이 창당해 대동단결 통합이 모색됐다. 총선 나흘을 앞두고 2년간의 망명을 마친 뒤 귀국한 김대중은 야권 대통합의 기폭제가 됐다.
나는 신민당 소속으로 12대 총선에 출마했다. 앞서 1984년 11월 30일 3차 해금 조치에 풀려나면서 다시 정치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마포의 소금, 마포의 승환이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4년 동안 와신상담할 날만 기다렸습니다. 신민당과 함께 신군부 독재를 종식시키는 선거 혁명을 이룹시다. 이 땅에 민주정권을 탄생시키는 데 마포가 힘이 됩시다.”
우레와 같은 환호 속 구민들의 눈빛을 읽었다. 5공 정권에 분노하며 심판하기를 벼르고 있었다. 정통 야당 신민당의 부활에 대해, 노승환과의 재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2·12 총선은 황색 바람(신민당 색깔) 돌풍이자, 민주 시민을 진원지로 하는 선거 혁명의 승리였다. 신민당은 여세를 몰아 이듬해 1986년 2월 12일을 기해 직선제 개헌 1천만 서명 운동을 추진했다.
나는 당의 부총재 겸 직선제 개헌 경인지부장, 박종철 고문 살인사건 진상조사위원장을 맡았다. 민주화 바람은 6월 항쟁 승리로 이어져, 6·29 선언을 이끌었다.
1987년 6월 29일 민정당의 노태우는 시국수습안 8개 항을 발표했다. 직선제 개헌,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는 대통령 선거법 개정, 국민 화해와 대단결 위한 김대중 사면 복권, 국민 기본권 강화, 언론 자유 창달을 위한 관련 제도 개선 등이 골자였다.
하지만 야권은 분열했다. 이민우 구상에 따른 신민당 내분으로 김영삼과 김대중이 통일민주당을 창당했지만, 김대중 진영이 통일민주당에서 갈라져 평화민주당을 새로 창당하는 2차 분열이 일어났다.
이 일로 오랜 동지였던 김재광은 김영삼 진영의 통일민주당으로, 나는 평화민주당으로 본의 아니게 이별을 하게 됐다. 결국, 야권 분열은 단일화 실패로 이어졌다. 13대 대선에서 노태우가 당선됐다. 40여 년 만에 맞은 정권교체의 꿈을 앗아갔다.
野 통합의 길
1988년 4월 26일, 13대 총선에 당선된 후 5선 의원으로 국회에 등원했다. 위상이 높아져 국회 전반기 야당 쪽 국회부의장이 됐다. 나는 평민당과 통일민주당이 재결합하는 민주세력 간 통합에 노력했다. 그래야 14대 대선에서 민주 인사가 당선되고, 갈등과 반목을 거듭해온 분열의 정치에서 통합의 정치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9시간에 걸친 회의 끝에 3당 통합(민정당, 통일민주당, 공화당)을 선언하는 정치적 변고가 생기고 말았다. 민자당이라는 거대 여당이 생겨났다. 평민당은 3당 합당이야말로 반민족적, 반국가, 반역사적, 수구반동 야합이라고 비판했다.
이때 노무현 등 합당을 반대해 통일민주당에 잔류한 의원들이 독자노선을 선언했다. 민자당이 생겨난 마당에 나는 평민당과 이들 잔류파와의 야권통합으로 야권 세력이 강화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내 야권 세력을 묶는다는 대의와 박정희 정권에 의해 중단됐다가 부활하는 지자체 선거의 승리를 꾀했다.
다수 열망에도 불구하고 통합은 이뤄지지 않았다. 통일민주당 잔류파와 무소속 의원들은 6월 15일 민주당(꼬마민주당) 창당을 별도로 선언했다. 이후 두 당은 각자 재야세력을 흡수해 세 불리기에 나섰다. 평민당은 재야세력과 연합해 신민주연합당(신민당) 이라는 이름으로 통합전대를 가졌다.
정발연 발족
야권통합이 안 됨에 따라 1991년 6월 20일 실시한 제1대 지방의회선거에서 야권은 참패를 겪었다. 나는 1991년 7월 당내 통합파 의원들을 주축으로 정치발전연구를 발족시켰다. 정발연은 창립 목표를 범야권 통합과 당내 민주화 제도개선에 뒀다. 회장은 내가 맡고 간사장은 정대철, 홍보 간사는 이상수가 맡았다.
우리는 야권통합 실패 시 정계 은퇴까지 각오했다. 전원 탈당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김대중 총재 측근 주류는 정발연의 순수한 동기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데 골몰한 나머지 13대 공천 비리 문제가 도마에 오르자 조윤형 국회부의장(13대 후기)과 이형배 의원을 근거 없는 사실을 유포했다는 명목으로 제명 조치 할거라고 엄포했다.
정대철·이상수 의원이 청년 당원들에게 집단으로 구타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정발연 소속 의원들이 탈당서를 제출하는 등 파란이 많았다. 비판·견제가 가능한 당내 민주화가 왜 시급한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우여곡절의 진통을 겪으면서 마침내 1991년 9월 10일 그렇게 염원하던 꼬마민주당과의 통합이 이뤄졌다. 정발연이 내걸었던 출범 당시 목적이 이뤄진 셈이었다.
정발연 활동을 중심으로 나는 야권통합에 대한 내 정치적 소신과 철학을 충분히 폈다고 생각한다. 이승만 박사의 제1공화국 시절부터 노태우 정부의 제6공화국 이르기까지 내게 몰아친 질곡과 수난을 맨몸으로 이겨내며 의로운 길을 걸어왔다고 자부한다.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 권총을 들이대며 변절을 강요하는 폭압에 맞서서도 무릎을 꿇지 않았고, 회유와 협박, 공작정치로 점철된 전두환 신군부의 서슬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칠흑 같은 시대의 어둠 속에서, 내 갈 길을 북극성처럼 밝혀준 신조는 지조와 강직, 청렴이었다. 국회와 지방행정가로 헌신하는 동안 내게 주어진 소명을 다할 수 있던 것은 다 이러한 철학과 신조 덕분이었다.
정치가를 평가하는 잣대는 여러 가지일 수 있겠다. 그 잣대가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일편단심의 민주 투쟁과 올바른 정당정치를 위한 헌신의 정도를 보는 것이라면 마포의 터줏대감 노승환도 말석의 자리에라도 이름을 올릴 수 있다고 믿는다.
3. 현실로 돌아와,
다시 노웅래의 시점
2세 정치인의 ‘명암’
선친은 50년 정치 역정을 걷는 동안, 이렇듯 한 길을 걸어온 분이었다.
-국회부의장에서 내려온 뒤에는 마포구청장을 했잖아요. 쉽지 않은 일인데요.
“외국 같은 경우엔 수상을 지낸 사람이 기초의원 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우리는 처음 있는 일이니 기사도 많이 났었고, 굉장히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죠.”
선친은 격식이나 틀을 안 좋아했다. 백범 김구 선생이 국민께 봉사할 수 있다면 ‘문지기 청지기라도 하겠다’고 했는데 같은 마음이었다.
- 어떻게 결심하게 된 건가요.
“정계 은퇴한 후 4년인가 있다가 지방자치가 시작됐어요. 주민들이 ‘큰 정치만 했지, 마포를 위해 한 게 뭐 있냐’, ‘내가 구청장에 나오면 되는 것 아니냐’ 이리된 거지요. 당시 마포 구도는 민자당 분위기였지만, 아버지가 민주당으로 다시 출마해 구청장이 됐지요.”
선친은 1995년 7월 제38대 마포구청장에 취임했다. 금의환향 이상의 감격이라고 회상한 바 있다. 지방자치가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기둥뿌리라고 역설해왔던 분이다. 현실 정치에서 쌓은 경륜으로 고향 마포를 살찌우는 목민 행정을 실천하고 싶어 했다.
- 재선 기간 난지도 공원, 월드컵경기장을 유치한 것이 가장 큰 성과로 꼽힙니다.
“마포 발전이 30년 앞당겨졌어요. 쓰레기 냄새 가득한 곳에 하늘공원, 노을공원이 들어서고, 월드컵경기장이 유치되면서 살기 좋은 대표적인 곳이 됐지요. 국회부의장 경륜이 없으면 유치하지 못했을 거예요. 마포의 변화를 처음 만들어낸 겁니다.”
- 정재문, 정대철, 노웅래 등이 대표적인 2세 정치인들로 불립니다. 2세 정치인 명암 좀 얘기해주죠.
“명암이 따랐지요. 국회의원 4선 하면서 아버지가 도와준 거 아니냐는 등 오해도 받았어요. 그런데 나는 사회 경력을 갖고 출마했잖습니까. 매일경제신문을 거쳐 MBC 등 기자를 21년간 했고, MBC 노조위원장과 언론노조 수석부위원장을 지냈지요.”
(노승환 전 부의장도 회고록에서 2세 정치인들의 명암과 아들의 첫 총선 출마 당시 어려움을 전했다. 정치도 존경받는 가업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17대 국회 들어 아버지 대를 이어 정계에 진출한 경우도 부쩍 늘었다. 내 아들 웅래도 마찬가지 경우다. 이른바 2세 정치인으로 일컬어지는 일군의 면면들이다.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인 김한길 의원의 선친 김철 씨는 4·19 혁명 후 진보당에서 갈라진 통일사회당 당수로 활동했던 혁신계 정치인이다.
한나라당에는 2세 정치인이 유독 많아 보인다. 남평우 의원(재선)의 아들 남경필(수원팔달), 정재철 의원(4선) 아들 정문헌 초선 의원, 대구 출신의 변호사인 유수호 의원의 아들 유승민 의원의 이름이 눈에 띈다. 이종구 의원은 야당 중진으로 나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이중재 의원의 아들이어서 각별하게 관심이 간다. 정석모 의원(6선)의 아들인 정진석 의원은 국민중심당에서 활동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정가의 소식에 밝지 못한 탓에 이 정도 떠올리지만, 이들 외에도 많을 것이다. 2세 정치인들을 두고 배지 세습이라는 용어를 써가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는 것도 안다. 선대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정치에 뛰어들었으니 가문의 명예나 조직 기반에 힘입어 유리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비판의 빌미가 되는 듯하다.
나는 둘째 아들 웅래가 MBC 기자를 그만두고 정계 진출 뜻을 보였을 때 ‘권고하고 싶지는 않다’ 이 한마디 했을 뿐이다.
야당 생활 40년 동안 국회부의장까지 지냈다고는 하지만 용마루의 옛집밖에는 가진 재산이 없어 금전적으로도 도울 형편도 못 됐다. 열 번 선거를 치러봐서 아는 일이지만 금권이나 관권의 도움 없이 밑바닥부터 표를 훑으면서 득표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아들 선거를 위해 유일하게 해준 것은 용마루 언덕의 옛집 사랑채를 선거사무소로 내준 것이 전부였다.”
- 노승환 회고록
<솔은 굽어도 꺾이진 않는다> 중-
4. 어깨너머로 배운 정치
나는 국회에서 네 번 당선됐지만 세 번 당내 경선을 통해 본선에 나갔다.
- 당에 서운한 점도 있었겠습니다.
“근데 더 단단해지죠. 조직 점검도 할 수 있었고요.”
조직 관리는 안대희 전 대법관과 겨룬 지난 20대 총선에서 빛을 발했다. 나는 1만 5000표 차로 이겼다. 다들 만만치 않겠다고 했지만, 적어도 만 표 이상 이길 줄 알았다. 18대 총선서 한 번 떨어져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평소 열심히 준비했다. 안대희 전 장관이 와도 걱정 안 했다.
- 아버지는 선거에서 패한 적이 없잖습니까. 주민 친화력이 남달랐다고 평가됩니다. 바닥 스킨십은 아버지랑 닮았네요.
“그거야 뭐 어깨너머로 배우는 거죠. 중학교 때부터 아버지 선거 전단을 뿌리고 다녔으니까요. 너희 아버지가 시켰냐. 혼도 나고 그랬지요.”
(같은 상황이 노승환 전 부의장 회고록에도 담겨 있다)
“눈치를 보니 까까머리인 큰아들과 작은아들도 종일 선거 전단지를 돌리는 모양이었다. 관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합동 유세장이 열리던 어느 날 큰딸은 교복은 입은 채 찬조연설을 하는 것으로 아버지의 선거를 도왔다. 아내의 고생도 남달랐다. 용마루 집에 복작대는 손님들을 치르는 일은 아내의 몫이었다. 조그만 체구이지만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낮에는 손님 접대, 밤에는 선거운동원으로 나와 함께 거리를 누볐다.”
-노승환 회고록
<솔은 굽어도 꺾이진 않는다> 중-
- 노승환 의장은 주례를 많이 선 것으로도 유명하잖습니까.
“세계 기네스북에도 올랐죠. 다 합하면 1만 4000여 회 정도 하셨을 겁니다.”
(독특한 이력이다. 1997년 신문에 따르면 노 전 부의장은 29세 때인 1957년 1월 9일 첫 주례를 시작으로 1995년 6월까지 기준 38년 6개월간 1만 1700여 회의 주례를 서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나와 있다. 2대에 걸쳐 주례를 보거나 한 집안 5남매의 주례를 맡기도 했다. 1995년 7월 민선 마포구청장으로 취임 후 재임 기간에는 일절 주례를 서지 않았다. 그는 “구청장에 물러나면 다시 주례를 맡을 생각”이라고 당시 신문에 전했다.)
5. 민주당 뿌리라는 주인의식
“정대철 전 민주당 고문을 만났을 때 말이죠.”
기자는 이렇게 운을 떼며 질문을 던졌다.
- 정대철 고문 본인은 DJ보다 YS가 호감이 훨씬 더 갔는데 아버지 때문에 민주당을 떠날 수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2016년 총선 앞두고 국민의당이 창당됐잖아요. 사람들이 막 나갈 땐데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나더러 탈당할 거냐고 물어요. ‘아 저는 안 갑니다’, ‘당을 비판하는 거는 조직에 대한 애정 때문이지, 나가려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내 뿌리는 민주당입니다’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요.”
- 민주당 외길에 대한 자긍심 때문입니까.
“주인의식이죠. 대물림했다는 측면에서 비판받을 여지가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소명의식과 책임감이 커요. 나는 생계형 정치인이 아니에요. 국회의원이라면 입법 정책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책임의식이 있어야죠. 2세 정치인에 대해서는 옥석을 가릴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나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부연 설명했다.
“민주당으로 따지면 난 뿌리죠. 대깨문(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 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난 대깨민 (대가리가 깨져도 민주당)이지요. 민주당 당원들은 대깨민이 돼야 한다고 봐요. 우린 단지 민주당 안에서 국민을 위한 정권 재창출을 위해 복무할 뿐이죠. 수단이지, 목적일 수 없어요. 문재인 대통령도 수단인 거고요.”
- 민주당 내 비주류잖습니까. 아버지도 비주류였는데 말이죠.
“21년 전직 기자 출신 아닙니까. 시시비비를 가리면 비주류가 돼요. 좋은 평가는 받을 수 있지만, 저 사람은 우리가 뭘 하는 것에 시비를 건다는 주홍글씨가 있다 보니 주류가 될 수 없던 거죠. 비주류에 세력이 붙는 건 아니잖아요. 뭔가를 집행하고, 책임지는 역할을 맡기가 어려워요. 서울시당위원장, 사무총장, 당 대표 비서실장 등을 했지만, 잠깐일 뿐 오랫동안은 못 하는 거죠.”
- 당이 변한다면 좀 바뀔까요.
“나라가 변화하고 혁신해 따뜻한 사회가 되는 데 앞장서려면 신주류가 되도록 노력해봐야겠죠.”
- 지난 전당대회에서는 비주류인 송영길 당 대표가 됐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혁명에 가까운 일이 생긴 거예요. 송영길 대표는 운동권이고 호남의 도움을 받았지만 특별한 세력은 안 갖고 있어요. 0.59%로 (친문 주류를) 이겼지만, 이겨낸 거 아니에요. 국민과 당원들이 민주당의 변화를 선택한 거죠. 바뀌지 못하면 정권 재창출은 물 건너가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국민이 또 한 번 기회를 준 거로 생각해요.”
6. 진보의 길
-시대정신은 뭐라고 봅니까.
“공정과 정의죠.”
- 내로남불 논란의 민주당이 공정과 정의 이런 거 들고 나오면 대선정국에서 밀리지 않을까요. 뺏긴 공정과 정의를 어떻게 들고 나오겠습니까.
“우리가 공정과 정의를 윤석열한테 빼앗긴 거죠. 찾아와야죠.”
- 민주당에 우선해야 할 당면과제는 뭐라고 보나요.
“국민 비호감도를 극복하는 문제예요. 지금 굉장히 심각한 상황인 게 우리 당 비호감도가 높아졌다는 겁니다. 비호감도는 우리보다 국민의힘이 높았어요. 지금은 거꾸로 됐어요. 호감도가 30%면, 비호감도는 60%에요. 호감도는 매우 잘하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안 바뀌어요.”
- 비호감도가 왜 높아졌다고 보나요.
“<싸가지 없는 진보>라고 강준만 교수가 쓴 책이 있어요. ‘쟤네들은 한마디로 싸가지가 없어.’ 사실상 4·7 재보선에서 싸가지 없는 진보에 대한 경고를 한 거 아니에요. 심판까지는 아니고요. 주택담보대출 완화하고, 공시지가 재산세 낮춰달라고 했지만, 안 들은 거잖아요. 합리적인 얘기면 들어야죠. 자기네들이 다 옳대. 왜 가르치려고 그래 국민을? 이런 거 아니에요. 공정과 정의라 해놓고 불통과 내로남불 하면서 말이죠. 바로 세우지 않으면 마음 돌리기 어려울 거예요.”
- 무능의 문제 아닙니까.
“부동산 정책 스물다섯 번 바꾼 것도 무능이지만, 이건 태도의 문제예요. 무능 이전에.”
- 왜 그렇게 됐다고 보나요.
“우리도 기득권화된 거죠.”
- 어떤 진보로 가야 한다고 봅니까.
“실사구시형 진보로 가야 해요. 난 그렇게 봐요. 이념에 경도될 필요도 없고요.”
7. 실사구시 진보
대화는 정책 현안으로 넘어왔다.
- 비트코인 가상화폐 문제가 내년 선거의 시한폭탄이 될 거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외국에서는 금융상품으로 보고, 투자하는데, 우리만 못 하게 할 수는 없어요. 큰 손해날까 봐 위험성을 경고하는 건 좋지만, 금융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면서 왜 세금을 받아요. 기타소득 하는 데는 일본밖에 없어요. 이게 뭐가 문제냐면 이익이 많든 적든 똑같이 21% 세금을 내야 하거든요.”
- 실사구시적으로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누진제로 가야 해요. 더 많이 버는 쪽은 높이고, 조금 벌면 낮춰야죠. 세금을 올리더라도 최소한의 허위공시나 사기를 막는 기본적인 장치는 만들어야 쫄딱 망하는 피해자가 안 생기잖아요. 손해 왕창 보면 결국 책임은 누구한테 가나요. 대통령 책임으로 가잖아요.”
- 언론개혁 미디어 상생 TF 단장인데요, 언론개혁은 뭘 의미하는 건지요.
“기자를 21년 했잖아요. 그동안 언론개혁 소리만 질렀지, 한 번도 없었어요. 정쟁 될 만한 것도 아니고, 미디어 피해를 구제할 수 있는 (허위·왜곡 정보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법, 언론 중재 피해구제법 등) 6개 법안을 하자는 거지요.”
- 징벌적 손해배상법이 우려스럽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대기업 등에서 진실을 은폐하려고 일부러 소송 거는 부작용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징벌적 손배법은 사법부가 보수적이기 때문에 입증하기가 어려워요. 정상적인 언론이라면 여기에 들어가지 않겠죠. 기업들 경우 부작용이 생길 수 있지만, 일반 국민은 피해가 났을 때 발만 동동 구르지 구제받을 길이 없어요. 지금은 기사가 나면, 한 신문에 나가는 게 아니고 퍼지잖아요. 피해 규모는 말도 못 하는 거죠.”
- 정무적으로 봤을 때 TF 단장은 언론과 척을 질 수 있다는 점에서 손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발 빼는 게 어딨어요.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죠.”
- 정책으로 들어가서 포스코 저격수로 유명하잖습니까. 계속 때리는 이유는 뭔가요.
“포스코는 대일청구권으로 만든 회사예요. 우리 선조들이 독립운동하다, 목숨 바쳐서 받은 돈 아니에요. 그런 회사인데 노동자의 안전은 경시하면 말이 되겠어요? 포스코는 대표적인 산업재해 1위 기업이에요. 세계적인 철강 회사고 국민 기업인데 말이죠. 5년 동안 45명이나 목숨을 잃은 회사면 확실히 문제 삼아야 한다고 봐요. 노동자의 안전을 지키지 못하는 기업은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안전을 존중하는 기업이 되도록 계속해서 문제 삼을 겁니다.”
- 최정우 포스코 회장이 귀담아들을까요.
“국회에서 산재 청문회를 처음 하긴 했지요.”
- 일각서는 청와대와의 교감을 통해 최정우 회장을 낙마시키려 했다는 소문도 돌았는데 말이죠.
“최정우 회장이겠지요.”
8. 차기 대선과 역할
(노웅래 의원과의 인터뷰 후반부는 차기 대선에 관한 얘기로 넘어왔다. 사실상 대선 출마를 시사한 이재명 경기지사, 이낙연 전 대표, 정세균 전 총리 외에도 이광재 의원, 양승조 충남지사 등이 출마를 선언했다. 최문순 강원지사도 조만간 대선 출마를 선언할 예정이다. 김경수 경남지사,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김두관 의원 등이 자천타천 대선주자로 거론되고 있다.)
- 여당에서 볼 때 야당 대선주자 중 누가 제일 대적하기 어렵다고 보나요.
“야당은 누가 나올지 확실치 않잖아요. 일단은 윤석열 전 검찰총장 같은 사람이 자리를 잡는다면 강력한 후보 아니겠어요?”
- 윤석열 전 총장이 대선에 나올 수 있을까요. 의원께서도 그동안 비판을 많이 해왔습니다.
“배신자 프레임을 극복할 과제가 있어요. 검찰총장인데 비판하고 나갔잖아요. 야당 쪽에서 보면 박근혜 탄핵의 행동대장을 한 거고요.”
- 민주당은 이재명 독주체제입니다. 문재인 정부가 선하다지만 소득주도 성장 등에서 실패해왔잖아요, 무능 논란과 대비되는 대선주자가 이재명 지사 아닌가 싶은데요.
“뭔가 해결해내고 성과를 내기 때문에 지지율이 높은 거겠지요. 근데 대선은 끝까지 가봐야 해요. 작년만 해도 이낙연 전 대표가 40%대였잖아요.”
- 이재명 지사가 친문을 대체할 거다, 이런 분석도 나옵니다.
“분화가 되고 있다는 말 아니겠어요?”
- 대선주자가 될 시 분당 가능성도 나오는데요, 과연 친문이랑 동행할 수 있을까요.
“친문과의 감정의 골이 지난 대선 경선 때 커졌잖아요. 극복해야 할 과제죠.”
- 이 지사를 두고 포퓰리즘 비판이 있습니다. 지난번 대학 안 간 청년에게 해외여행경비 1000만 원 지급한다고 해서 논란도 있었잖습니까.
“예를 들어 얘기한 것인데, 공약인 것처럼 된 거잖아요. 이낙연 전 대표는 군 제대 후 3000만 원, 정세균 전 총리는 사회초년생 통장 1억 원 주겠다고 하고…. 재원 마련 대책을 같이 내놔야죠. 대통령 될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처럼 하면 안 됩니다.”
- 역할이 필요하겠네요.
“그렇죠. 그런 걸 지적해줘야죠.”
- 어떤 역할을 맡고 싶은가요.
“주어진 어떤 역할이든 해야죠.”
돌아보면 나는 평생 진보의 가치를 추구해 왔다. MBC 노조위원장을 신설해 비정규직 차별철폐, 2013년 이마트 12000명 비정규직 직원의 정규직 전환에 노력, 국회 과학기술 방송통신위 상임위원장을 맡아 일하는 국회를 만드는 데 앞장선 것 모두 정의와 공정 실현이라는 진보의 가치를 견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감해야 공정하고, 공감해야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약자를 위한 정치라고 생각한다. 양극화 해소의 공감하는 정치인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솔은 굽어도 꺾이지 않는다는 마포 용마루 토박이 아버지처럼 그도 자신의 뿌리를 지키는 민주당의 소나무 같은 인상이다. 인터뷰 내내 힘주지 않고, 격의 없이 담백한 입담이 인상적이다.
1957년생 올해 63세다. 중앙대 철학과,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을 졸업했다. MBC 기자와 노조위원장을 거쳐 17, 19, 20, 21대 국회 4선째 당선됐다. 사무총장, 서울시당, 국회 과방위원장 외에 민화협 공동의장, ‘통일을 넘어 유라시아’ 공동대표, 중앙당 선거관리위원장, 문재인 대선 캠프 유세본부장 등을 맡았다. 현재는 이재명 지사 지지 포럼단체 ‘성장과 공정’에 참여 중이다.
아버지는 국회부의장을 했다. 아들의 끝은 어딜까. 궁금해진다.)
※<시사오늘>의 ‘시대산책’은 인터뷰이의 구술을 화자의 시점으로 재구성해 정리하는 형식의 코너입니다. 기술상의 이해를 돕고자 화자의 심리적 기법을 가미하거나 배경 상의 설명을 부연한 점 말씀드립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좌우명 : 꿈은 자산!
민주당의원들이 스스로 자처한것.
그 댓가는 참혹할거라보고 고난의 10년 준비해야지.
대통령 인질잡고 야이 그래서 국짐찍을거냐고 또 협박하겟지만
당근 국짐찍어서 민주당의 썩은 뿌리는 차단해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