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순 시사평론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7인의 역대 대통령 평가를 해보는 의미 있는 판이 열렸다. 2022년 대선특별기획 ‘기적의 나라 대한민국, 7인의 대통령’ 이라는 제목의 세션이다.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과 시대전환 조정환 의원의 공동 주최로 6월 8일부터 7월 20일까지 매주 1회 오후 7시 여의도 하우스카페에서 진행된다. 대한민국 대통령 7인의 분투사 속에서 이 시대의 과제와 지도자의 덕목을 찾고 시민과 함께 기억과 망각의 역사를 넘어서고자 마련됐다.
각 세션은 △이승만(6월 8일) △박정희(6월 14일) △전두환(6월 22일) △김대중(6월 29일) △김영삼(7월 6일) △노태우(7월 13일) △노무현(7월 20일) 순이다. ‘역사는 그들을 왜 선택했고, 그들이 남긴 것은 무엇인가?’ <시사오늘>이 따라가 봤다. <편집자 주>
역사의 공백. 6월 22일 강연에 나선 황태순 평론가는 전두환 시대를 이렇게 표현했다. 여전히 아물지 않은, 아마도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상처 탓에 함부로 꺼낼 수 없었던 기억이기 때문일 터다. 하지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쓰라린 흉터까지 되짚어야 하는 것이 살아남은 사람들의 운명이다. 황 평론가는 전두환 시대를 ‘산업화에서 민주화로 가는 격랑의 다리’로 정의하며 조금씩 역사의 공백을 채워나갔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12·12부터 5·18을 거쳐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전두환 장군과 그 이후의 전두환 대통령은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5·18을 일으킨 전두환 장군과 대통령 전두환을 연결시켜버리면 5공화국 정부를 냉정하게 평가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우리 현대사를 보면 대한민국 근대화의 터전을 다진 이승만·박정희 시대와 민주화를 정착시킨 김영삼·김대중 시대 사이에 공백이 있습니다. 이 7년 반의 공백, 산업화에서 민주화로 가는 격랑의 다리를 설명하려면 전두환 장군과 대통령 전두환을 먼저 분리시켜야 합니다.”
12·12 군사반란으로 군부를 장악하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참혹하게 진압한 장군 전두환은 공과(功過)를 논할 수도 없고 논해서도 안 되는 대상이다. 그러나 대통령 전두환의 공과를 균형감 있게 살펴보지 않으면, 산업화와 민주화를 연결하는 ‘역사의 고리’는 이어질 수 없다. 황 평론가는 이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대통령 전두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두환의 머리를 지배했던 세 가지 키워드를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 키워드는 박정희입니다. 전두환은 끊임없이 자신이 박정희와 경쟁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두환이 각별히 아꼈던 박철언 전 의원이 수첩에 메모해놓은 것을 보면, ‘박정희는 힘으로 다스렸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뿐만 아니라 여러 기록을 봤을 때, 전두환은 박정희를 뛰어넘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가까울 정도의 경쟁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 키워드는 88 서울올림픽입니다. 1979년 박정희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서울올림픽 유치 신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전두환이 정권을 잡고 난 다음, 서울이 나고야를 꺾고 올림픽 유치를 하게 된 겁니다. 전두환은 덜컥 횡재를 한 거죠. 특히 88년 서울올림픽은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12년 만에 동서(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가 모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전두환이 군부를 동원해서 판(민주화)을 엎으려고 했던 일이 두 번이나 있었지만, 그 충동을 막은 게 88 서울올림픽이었습니다.
세 번째 키워드는 5·18 광주의 비극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전두환은 임기 중에도 판을 엎을 정도의 강경 조치를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1987년 호헌조치 이후에 김영삼·김대중이 목숨을 걸고 반발하고, 재야까지 들고 일어났을 때가 대표적이죠. 하지만 전두환 스스로도, 군권을 쥐고 있는 장군들도 강경 조치를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전두환은 7년 반 동안 단 한 번도 계엄령과 위수령을 내린 적이 없습니다. 박정희 때는 툭하면 계엄령과 위수령을 내렸는데 말이죠. 광주의 비극이 임기 내내 전두환과 군부를 지배하고 있었던 겁니다.”
본격적으로 전두환 시대를 살펴보기 전, 황 평론가가 ‘배경 설명’에 공을 들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장군 전두환을 평가했던 렌즈로 대통령 전두환을 들여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은 까닭이다. 황 평론가는 이를 ‘장군 전두환과 대통령 전두환은 다르다’는 말로 정리했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 키워드를 염두에 두고 대통령 전두환을 봅시다. 우선 전두환은 박정희 정권 때 ‘아웃사이더’였던 김재익을 경제수석으로 발탁합니다. 그리고 박정희 시절 경제팀을 이끌었던 성장론자들이 계속 압박을 가하는데도 3년 반 가까이 김재익을 믿고 맡겼죠. 그 결과 전두환 시대에는 고도성장과 물가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게 됩니다. 물론 3저(저달러·저유가·저금리)현상이라는 호재 덕을 본 것도 사실이지만, 당시 ‘아시아의 4룡’이라고 불렸던 한국·타이완·홍콩·싱가포르 중 유일하게 한국만 고도성장과 물가안정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낮게 평가할 일은 아닙니다.
또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자율과 개방 정책을 씁니다. 1950년 6·25 전쟁 이후 30년 동안 계속됐던 12시 통행금지를 푼 게 전두환이고, 교복과 두발도 자유화시킵니다. 제한적이나마 해외여행도 자율화했습니다. 이게 다 88 서울올림픽 덕분입니다. 정치·사회적으로는 연좌제를 없애고, 경제적으로도 빗장을 풀면서 우리가 지금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기본 틀을 만들었습니다.
엄숙주의도 약화됩니다. 흔히 3S(Sports·Screen·Sex)정책을 갖고 전두환을 비판하는데요. 사실 박정희 시대의 엄숙주의가 지나친 면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북한보다도 컬러TV 도입이 늦었을 정도입니다. 당시 우리 경제 수준으로 보면 컬러TV를 보고 프로야구를 가질 수 있었는데도 엄숙주의 탓에 미뤄졌던 게 전두환 시대 때 풀린 거죠.
IT 강국의 초석을 다진 것도 5공 정부입니다. 당시 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 때 1등을 도맡아했던 김성진이라는 사람을 체신부 장관으로, 오명을 차관으로 앉혔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몰랐던 전두환은 이 사람들 말을 잘 들었습니다. 본인이 뭘 하는지도 모르고 초기 인프라 투자에 돈을 들이부었죠. 그게 1메가·4메가, 나아가 64메가 D램 개발의 초석이 된 겁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대통령 전두환의 업적을 나열한 황 평론가는, 전두환 시대의 어둠을 보여주면서 강연을 마무리했다.
“반면 전두환 정부는 물가 안정을 위해 임금을 억제하면서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전두환 정부 핵심 세력들은 노조를 ‘빨갱이’로 봤습니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중산층이 형성되고 있었지만, 노동자들의 인권은 처절하게 탄압됐습니다.
정경유착과 천문학적 비자금 문제도 있었습니다. 흔히 하는 표현으로, ‘박정희는 마름을 시켜서 돈을 걷어 썼고, 전두환은 직거래를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직접 돈을 받아서 쓰면 기업의 비리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줘야 합니다. 이런 식의 정경유착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한 측면이 있습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