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노병구 자유기고가)
나는 어떻게 해서 이 글을 쓰나(내가 걸어온 길)
나는 1931년에 충청북도 보은군 내북면 이원리 산골 중의 산골에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심성 좋으신 할아버지가 동네 이웃들의 빚보증을 많이 서고 돌아가셔서 그 빚을 감당하고 난후 삶의 터전을 잃고 부모님은 할머니와 세 분의 고모, 삼촌 한 분과 어머니, 그리고 나까지 모두 8명의 식솔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한다고 청주로, 조치원으로 전전하다가 내가 여섯 일곱 살 때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겨우 방 한 칸, 부엌 그리고 툇마루가 한쪽 달린 초가집을 마련해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입학 때를 놓쳐 우신국민학교나 영등포국민학교에서 거절당하고 어린나이에 기차를 타고 통학하는 오류동에 있는 오류국민학교에 입학해 졸업할 때까지 기차통학을 했다.
이때는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해 성도 빼앗겨 ‘마스바라 (松原)’로, 말도 빼앗겨 일본말을 국어로, ‘구고고 조요(國語常用)’라고 우리말을 쓰다가 걸리면 조선말을 썼다고 호된 벌을 받았고, 매일 아침운동장 조회 때마다 동쪽을 향하여 일본천황에게 절을 하고, 하루를 시작하며 “고고꾸 심민노 지까이”라고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서하는 선서를 매일해야만 했다.
해방이 되었다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도 불렀고, 화신 앞과 을지로 입구에서 몽둥이로 치고 돌팔매로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는 좌우익의 난투극도 구경하고 중학교 고학년 때 6·25동란을 만나 걸어서 경북 청도까지 피난을 갔다 와서 그해 겨울에 징집영장을 받고 군에 입대해 휴전협정의 체결로 만 4년의 군 생활을 마치고 나와 지금은 만 70세가 넘은 6·25 참전 용사라고 국가보훈처로부터 매달 12만 원씩의 보상금을 받고 있다.
또 죽으면 대전 국립묘지에 내가 묻힐 곳이 마련되어 있다고 기재된 ‘참전 용사증’을 받았다.
종교혁명
해방 후 나는 경성공업중학교에 입학했는데, 한학(漢學)만을 공부한 아버지는 경제활동이 거의 없었다. 생계는 억척스러운 어머니가 봄과 가을에는 송편과 절편 등 떡 장사로, 여름에는 콩국수, 겨울에는 팥죽을 쑤어 머리에 이고 다니며 다리품을 팔아 이어가는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늘 어머니의 고생이 안쓰러웠다. 근본적인 삶의 변화가 있어야겠다고 고심하게 된 시점도 이때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 중에 신길동 성결교회에 다니는 김동규라는 친구가 있어 그를 통해 처음으로 교회에 가보았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1년에 10여 번의 제사를 모시는 유교 집안에서는 느껴 보지 못한 새로운 분위기에 나는 매료되었고 부모님 몰래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한명우 목사 내외분, 조희연 장로, 김진 집사, 서울 공대에 다니는 김점식 선생 등으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게 되었고 1년이 지나 나는 학생회를 조직하고 학생회장에 피선됐다.
그러다가 들통이 나서 아버지와 가족들에게 호된 야단도 맞고 교회에 다니지 말라며 여러 번 종아리도 맞았지만, 나는 아버지에게 “아무리 종아리를 맞아도 항복할 수 없습니다”하고 끝내 굽히지 않았다.
손자를 사랑하는 할머니를 시작으로 어머니를 교회로 인도하는데 성공한 나는 아버지까지 끝내 우리가족 모두를 교회로 인도하는데 성공했다.
나는 4~50명의 남녀 학생들의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참으로 값진 경험을 했고 많은 것을 배웠다.
6·25전란과 참전
1950년 6월 25일은 주일(일요일)이며 마침 학생회의 월례회 날이었다. 월례회의가 재미있게 끝날 무렵 처음 듣는 비행기 소리가 요란하게 나고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학생회원들은 무슨 일인가해서 모두 밖으로 뛰쳐나와 보니 여의도 비행장상공에 날개에 별판을 단 야크기 2대가 계속해서 폭탄을 투하하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른 우리들은 모두 뿔뿔이 헤어졌고 그날 이후 다정했던 친구들은 지금껏 소식이 끊겨 동족상잔의 비극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강 다리는 끊어졌고 28일부터 피난길에 들어 나는 젖먹이 여동생을 업은 어머니와 함께 간단한 피난 보따리를 등에 지고 남쪽으로 걸어 경북 청도군 매전면까지 갔다가 UN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9·28 후에 상경했다.
그해 12월 4일 징집영장을 받고 육군에 입대해 육군 2사단에서 근무했다. 1954년 11월, 수도 육군병원에서 예편했다.
서울고등공민학교의 설립과 교장에 취임
제대 후에 복학해 서울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원래는 한국 신학대학교에 가서 목회자가 되려고 했으나, 당시 신길동 성결교회 김성추 담임 목사가 “한국 신학대학교는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이라며 총회신학교나 서울신학대학이 아니면 추천서를 써줄 수 없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1차 대학의 지원 기회마저 놓치고 2차인 중앙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에 입학하게 됐다.
가세가 어려워 입학 때부터 남의 도움으로 입학금을 내고 그때까지도 세상물정을 잘 모르던 나는 목회자의 희망이 무너진 후 교수가 돼 학자의 길을 가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여름방학 때는 그나마 노동판 뒷모도를 해서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었지만 겨울이 되어서는 노동판의 일도 없고 해서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학 1년을 마치면 고등고시 응시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고등고시에 응시해 법관이 되어 우선 집안을 경제적으로 도와야 하겠다고 생각한 뒤 고시준비에 들어갔다.
조용히 공부할 방하나 없어 나는 매일 중앙대학교 좁은 도서관에 자리 잡고 육법전서와 씨름을 했다.
점심은 거의 물로 배를 채우며 공부를 했는데 8개월이 지나 머리가 어지러워 쓰러졌다. 한참 후에 일어나서 겨우 집에까지 왔는데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도저히 공부를 할 수가 없었고 또 오른쪽 귀에서 소리가 계속 들리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오른쪽 귀가 먹통이 되었다. 동네 병원에 가보았지만 별수가 없었다.
할 수없이 군대에 있을 때 수도육군병원에서 큰 신세를 졌었고 나를 끔찍이 사랑해 주시던 서울대학교 이비인후과 과장인 김홍기 박사를 찾아가서 진찰을 받았다.
찬찬히 진찰을 하신 박사님은 귀에 고막이나 다른 이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극심한 영양실조로 청신경이 마비가 된 것 같다고 이 상태로는 책을 보거나 신경 쓰는 공부는 할 수가 없으니 이제 쉬는 방법 밖에 없다는 절망적인 처방을 내렸다.
나는 미칠 지경이었다. 어디 갈 곳도 마땅치 않고 멍청하게 앉아있을 수 없어 신길동 교회에 나가 기도도 하고 찬송도 부르고 조용히 사색하며 시간을 보내고 또 주일날이면 내가 맡은 고등부 학생예배를 인도하고 그들과 지내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그러던 중 교회 안에 대학생 중에 박선용 선생이 당시 6·25전란 후 모두 살기가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안 되어 부랑하는 아이들을 모아 교회에서 중학교 과정의 야간 고등공민학교를 개설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상의해 왔다.
중학교 과정의 공부라면 내가 특별히 공부를 따로 하거나 머리를 많이 쓰지 않아도 가르칠 수 있을 것 같고 또 교회 마당이 비어있으니 군용천막 하나만 있으면 가능할 것 같아서 내가 목사님을 찾아가서 그 취지를 설명했더니 군용천막 하나는 구해줄 수 있으나 교회 형편이 어려워 다른 도움은 줄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느냐고 하면서 미군부대에서 군용천막 하나를 구해서 교회 마당에 쳐 주었다. 나는 대학생 친구들과 상의를 했는데 극빈 아이들을 가르치는 고등공민학교 교사로 여러 사람이 자원해 주었다.
1957년 늦은 봄 천막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석유를 쓰는 남포를 몇 개 구해서 이름을 서울고등공민학교라 하고, 교회예배 시에 한 광고와 전단지를 보고 찾아온 학생 20여 명으로 시작했는데 내가 교장이 되고 남자선생은 김길수, 박선용, 김택준, 여자선생은 맹경옥, 김경옥, 김순영, 이정열 선생이 낮에 학교에 가서 교수들의 강의를 듣고 난 다음 교수가 칠판에 떨어뜨리고 간 백목을 주어 모아가지고 와서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것이 미담으로 교회와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진로소주 회사의 부사장 장학섭 씨의 부인이자 중앙 성결교회 권사인 홍대실 씨가 우리교회 대학생 청년들이 이토록 헌신적인 봉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홍 권사는 학생들이 땅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공부하는 것을 보고 “노 교장, 내가 교회 청년들이 좋은 일을 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어 우리 회사에 소주병을 넣는 소주상자 짜는 조그만 제재소가 있는데 학생들이 책상에 앉아서 공부할 수 있도록 간단한 책상과 걸상을 만들 목재를 지원해 줄 터이니 만드는 것은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서로 도와서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다량의 목재를 치수에 맞게 제재를 해 주었다.
선생들과 학생들은 톱과 망치를 가지고 책상 하나에 세 사람씩 앉는 긴 책상과 의자가 붙박이로 붙은 책걸상을 여러 날에 걸쳐 만들었다.
그때가 자유당 정권의 끝자락쯤 되는 때인데 지방자치제도를 시행하고 있어서 각 동회의 동회장을 동민의 직접 선거로 선출했었는데 마침 교회가 있는 신길동 동회장 우범식 선생이 나의 아버지와 친한 사이였는데 나를 불러 무척 대견해하며 칭찬하면서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마침 동회장 선거가 실시되어 하루에 몇 차례씩 선거연설을 하는데 그때만 해도 입후보자들도 연설에 익숙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찬조 연설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더욱 구하기 어려워 우범식 후보자가 나에게 찬조 연설을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해 왔다.
나는 나이도 어렸고 학생들에게 공민과 사회과목을 가르치는 정도의 경험 밖에 없는데 마이크를 잡고 하는 대중연설을 부탁하니 황당하고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공민학교 선생들이 그분의 신세도 지고 있는데 한번 해보라고 강권하다시피 해 대략 원고를 써가지고 단상에 올라 연설을 하긴 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우범식 동회장을 비롯해서 선거 참모들이 잘했다고 칭찬해 주어서 그 바람에 여러 번하다 보니 차차로 자신감도 생기고 그럭저럭 무난히 선거가 끝났는데 우범식 씨가 꽤 많은 표차로 당선이 되었다.
우범식 씨가 당선되고 나서 더욱 서울고등공민학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협조해주기도 했지만 인근 동회장들, 대방동 동회장 박중호 씨, 신풍동 동회장 최재석 씨, 대림동 동회장 조승준 씨, 신광동 동회장 서도요 씨 등 5개동의 동회장들이 서울고등공민학교에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게 되었고, 서울고등공민학교와 나의 이름도 영등포 일원에서 제법 알려지기 시작했다.
겨울이 되어 추위를 견딜 난방 대책이 있을 턱이 없는 천막학교에서 도저히 수업을 할 수 없게 되었는데 우범식 동회장이 동회 사무실을 신축 건물로 옮긴 후 먼저 쓰던 동회사무소 건물을 빌려 주어 그곳으로 이사해 수업을 하도록 편의를 봐 주었다.
하루는 성남 중고등학교 김석원 이사장께서 사람을 보내 나를 성남 중고등학교로 오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나는 대방동에 있는 학교 이사장 실을 찾아갔다.
나를 만난 김석원 이사장께서는 “노 교장, 많은 사람들에게서 노 교장과 서울고등공민학교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돕고 싶어서 오라고 했어요. 교육 기자재도 없이 어렵게 수업을 한다는 말을 듣고 내가 우리학교에서 쓰던 책걸상과 칠판 그리고 백묵을 학교 트럭에 실어 놨으니 노 교장이 함께 타고 가서 요긴하게 써주었으면 좋겠네. 봉사하는 교사들에게도 수고한다고 전해 줘요. 그리고 앞으로도 내가 도울만한 일이 있거든 언제든지 와서 말해주면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은 힘껏 도와주겠네.”
그 후에도 학교에서 웅변대회, 문학의 밤 행사 등을 학부형과 인근 유지 동민들을 초청해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마이크와 앰프시설을 보내주고 자가 발전기까지 보내 주어서 훌륭하게 아주 성대한 행사를 잘 치를 수 있었다.
4·19후 7·29 민·참의원 선거가 실시됐는데 당시는 민주당 천하인데 성남중고등학교 이사장 김석원이 무소속으로 민의원 선거에 출마해 찬조 연설을 간곡하게 부탁해 와서 한 달 동안 영등포 갑구 넓은 지역을 돌며 연설을 했는데 서울시내 16개 선거구중 유일하게 영등포 갑구만 무소속인 김석원 이사장이 압도적인 표차이로 당선됐다.
동회장 선거와 달리 민의원의원 선거에서 찬조 연설을 한 나는 영등포구 전체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그 후 5·16박정희의 군사반란이 일어나 대학생들이 운영하는 서울고등공민하교가 경찰서 사찰계의 주목을 받게 되고 군사정권의 혁명과업완수를 위하여 무조건 충성하기를 기대했지만 나는 반란이 싫었고 또 정치를 할 힘도 마음도 없었다. 고등공민학교는 만 7년 만에 문을 닫았다.
함께 아이들을 가르치던 약사인 맹경옥과 결혼해 약국을 운영하고 있을 때 공화당이 사전조직을 하면서 나도 그들에게 이끌려 공화당 창당에 함께 하기를 강요받아 서명은 하고 물러나 왔지만 실제 공화당 창당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5·16후 처음인 6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한통숙 전 상공부 장관이 영등포 갑구에 출마해 역시 찬조연설을 부탁 받고 연설을 했는데 많은 표차로 당선됐다.
이재형의 권유로 민주당에 처음 입당원서를 내고 당원이 되었다. 당원들의 권유로 민주당 영등포 갑구당 부위원장이 됐다.
6대 대통령 선거에서 영등포 갑구는 동대문 을구와 함께 윤보선 대통령 후보가 박정희에게 져서 그 책임을 물어 한통숙이 공천에서 탈락되고 유진산이 신민당 공천을 받고 입후보 했다.
영등포 갑구에 전혀 인연이 없던 유진산은 김석원 이사장을 찾아 도움을 간청했지만 김석원은 웃기만하고 “잘해보라”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는데 유진산이 끈질기게 도움을 요청하자 옆에 있던 김석원의 부인 서달순 여사가 “우리 영감은 그런데 안 나갑니다. 노병구를 찾아 도와 달라고 하세요. 노병구가 연설을 하면 우리영감이 유 선생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겁니다” 하는 말을 듣고 곧바로 나에게 찬조연설을 부탁했다.
나는 그 이후로 유진산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됐고, 또 정치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유진산의 인격에 매료되어 영원한 나의 스승으로 간직하고 산다.
제8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고흥문의 요청으로 도봉구에서 찬조연설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를 도와 당선되었다.
그 후 신민당 중앙상무위원과 중앙당 선전국 문화부장 공보부장 정책위원을 거쳐 박정희의 유신 후 제9대국회의원 선거 때는 “노병구 너는 죽어도 서울에서 출마해야 되겠다고 하여 공천은 주었지만 너는 당선이 어렵다. 박정희가 수도 서울에서 공화당이 별짓을 다해도 하나의 의석도 차지하지 못하자 공화당을 당선시키기 위하여 한 선거구에서 두 사람씩 뽑는 선거법을 만들어 놓고 어떻게든지 한 사람씩은 당선시키려고 별짓을 다할 것이니 나머지 한자리를 놓고 김수한과 갈라먹어야 하는데 김수한은 현직국회의원에다가 대변인이 어서 네가 당선되기는 어려우니 다음번 선거에 대비한다는 생각으로 이번에는 많은 유권자와 악수를 해라” 라고 말하고 “돈도 네 돈은 쓰지 말고 내가 얼마를 줄 터이니 이 돈만 쓰고 사무실도 본동에 있는 내 사무실을 써라”하고 적지 않은 돈을 싼 보따리를 내게 주었다.
나와 아내는 성심을 다해서 유권자들과 악수를 하고 다녔지만 결과는 2만여 표를 받고 낙선했다.
“내가 20년은 더 산다. 다음선거에는 단수공천으로 네가 꼭 국회의원이 되도록 밀어 주겠다”며 대비하라던 유진산은 1년 후 암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유진산 타계 후 나는 8대국회의원 선거 때 찬조연설을 했던 고흥문의 간청으로 고흥문과 함께 했으나 많은 좌절을 맞보고 정치를 그만두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박정희가 10·26으로 기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지고 전두환 시대가 왔다. 김영삼 등 야당의 거물 정치인들은 정정법에 묶어놓고 정치는 완전히 전두환의 마음대로 판이 짜지기 시작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나는 정정법에서 제외되었다. 전두환의 꼭두각시 노릇을 할 수밖에 없는 정치형태지만 묶이지 않았으니 국회의원에 도전하여 야당성을 발휘하면 되지 않느냐고 아내도 주변도 출마하자고 강권했다.
무소속은 안 된다면서 민한당 공천을 받아야한다고 김수한 이중재 등 정치선배들의 조언과 염려로 평소 절친했던 유치송 총재와 신상우 사무총장을 찾아 호의적인 약속을 받고 공천신청을 했지만 그들의 의사는 존중되지 않았고 나는 탈락했다.
나는 포기하려고 했지만 나의 아내부터 주변이 모두 너무 분하다면서 출마를 고집하여 김태룡 의원의 협조로 민권당의 김의택 총재의 부름을 받아 영등포 을구에서 민권당 공천으로 출마 했지만 역시 무리였다.
전두환의 의중에 없던 민권당은 완전한 들러리였다.
민권당은 전두환의 테두리를 벗어나야 하겠다고 전두환 하야등 강경한 김의택 총재의 기자회견이 문제가 되어 문안작성위원인 나와 이영권 최인영 송요욱 등이 남산 안기부 취조실에 연행되어 며칠씩 잠을 안 재우고 신문하고 1주일동안 남산 지하 3층에 갇혀있기도 했다. 정치는 맞지도 않고 할 시기도 아니라고 판단하여 여주에 내려가 돼지를 키우는 목장을 시작했다.
지나는 길에 상도동 김영삼 총재 댁을 찾았다. 두 번째 방문했을 때 김영삼 총재는 ‘민주광복(民主光復)’이라는 붓글씨를 주면서 몇 사람이 등산을 하는데 함께 다니자고 권하여 그때부터 가끔 산에 갔다.
민주산악회 조직을 하면서 조직위원장, 광명시지부장, 감사, 연수원장을 거치고 민주화추진협의회 상임운영위원, 신한민주당 당기국장, 신한민주당 전당대회부의장, 통일민주당 전당대회부의장, 통일민주당광명시 지구당 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전두환 노태우의 6·29 항복 후 13대 국회의원 선거 때 광명시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선거 며칠을 남겨놓고 김대중이 평민당을 만들어 야당표의 분산으로 또다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합당 후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으로 문민정부가 탄생하고 바로 광명시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윤항열이 국회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타계하여 보궐선거가 있어 공천신청을 하고 꼭 당선될 것이라고 자타가 믿었는데 막 정권을 잡은 김영삼 대통령이 정치개혁을 위해 새사람을 수혈하여 새바람을 일으켜야 하겠다고 나에게 양해를 구하며 나는 한국마사회 임원으로 보내지고 대학교 교수인 손학규를 공천하여 나는 의회진출의 꿈을 접어야했다.
나는 문민정부와 함께 5년1개월 동안 한국마사회에 봉직하다가 부회장으로 끝을 냈다
김영삼 문민정부가 임기를 마치고 2년쯤 흘렀을 무렵, 수십 년 동안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 투쟁을 한 많은 동지들이 너무 무료하다고 점심값을 각자 지참하고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자고 하여 거기서 나이가 많은 노병구가 회장을 맡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그 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김영삼 대통령 입석 하에 모임의 이름을 ‘민주동지회’라고 지어 두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고 해마다 년 초에는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모시고 6~70명의 전현직의원과 장차관, 그리고 전국에서 모여든 역전의 민주투사들이 많게는 6~7백 명이 모여 신년회를 갖고 험난했던 옛날을 되새기고 돈독한 결속력을 다지고 있다.
2000년에 시작하여 근 10여 년간 나는 민주동지회 회장직을 마치고, 지금은 2년 전부터 김봉조 전 의원이 회장직을 맡아 수고하고 있다. 무궁한 발전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