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치 50년 史>"공화당에 입회하지 않으면 집에 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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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치 50년 史>"공화당에 입회하지 않으면 집에 갈 수 없다"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2.08.28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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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9 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노병구 자유기고가)

4·19 혁명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가 터져, 이에 항거한 4·19 학생혁명으로 자유당정권이 무너지고 1960년 7월 29일 총선거일이 공고 되었다.

김석원 이사장이 사람을 보내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이번 제5대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영등포 갑구에서 출마하기로 했는데 수고스럽지만 노 교장이 나의 정견 발표회에 나와서 찬조 연설을 해 주고, 젊은 사람들을 상대로 한 선거운동을 맡아 수고해 주어야 하겠네, 부탁하네.”

“먼저 번 동회장 선거에는 제가 억지로 찬조연설을 했지만 민의원 선거는 차원이 다른데 제가 어찌 감당을 하겠습니까? 자신이 없습니다.”

“아니 자네는 할 수 있네. 또 자네 혼자 하는 게 아니고 전몰 학도의용군 유족회 회장인 윤남하 목사가 아주 연설을 잘 해서 그분에게 부탁을 했으니 너무 부담 갖지 말고 꼭 해 주기 바라네.”

“상대방 후보는 민주당 현역의원인 유홍인데, 이번에도 민주당 공천을 받고 나와서 그쪽은 민주당의 현역 정치인들이 나와서 찬조 연설을 하는데 나는 무소속으로 나와 찬조 연설을 해줄 사람이 윤남하 목사와 자네 아니면 없어, 그러니 우리 셋이 한 번 열심히 해 보자고 부탁하는 것이니 사양 말고 수고해 주게.”

당시는 한여름인데도 국민들의 정치 열기가 대단해서 연설을 시작하면 장소가 비좁을 만큼 많은 인파가 모여 들었다.

서울시내 민의원 선거구가 16개였는데 전국에서 민주당 열풍이 불어 민주당 공천자는 막대기를 꽂아도 당선되는 선거였다. 서울에서도 민주당이 싹쓸이를 했는데 유일하게 영등포 갑구만 무소속의 김석원 후보가 많은 표차로 당선이 되었다.    

김석원 의원의 영광은 말할 것도 없지만 한 달 동안 찬조연설을 한 나도 영등포 사회에서 제법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해보지도 않았고 하려고도 안 했는데 정치하는 사람들과 만나게 되고 또 팔자에 없는 정치연설을 하게 되어 나도 모르게 정치판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나의 연설도 능숙해지고 내용도 성숙해져갔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고 곧 이어서 서울시의회 선거가 시작 됐는데 서울시의회 후보로 우범식 동회장과 형제처럼 지내며 서울고등공민학교를 열심히 도와주었던 이원옥 선생이 출마해 또 찬조연설을 부탁했다. 이 또한 거절할 형편이 아니어서 찬조 연설을 하게 됐다. 이원옥 선생은 무소속으로 있다가 자유당 말기에 그들의 압력을 뿌리치지 못하고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긴 것이 흠이 되었으나 원래 인품이 훌륭하고 덕망이 있는 분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민주당 장길효 선생에게 아슬아슬한 표차로 낙선하는 고배를 마셨다.

이원옥 선생 자신이야, 낙선의 쓰라림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찬조 연설을 한 나도 처음으로 패배의 쓰라림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이원옥 선생과 5개동의 동회장들이 합심해서 도와줘 우여곡절 끝에 서울고등공민학교를 제법 넓은 집으로 이사할 수 있게 됐다. 적으나마 선생들이 대기하면서 쉴 사무실도 만들고 교실도 셋을 만들어 아이들을 학년별로 나누어 수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소문이 퍼져 한국일보와 시사신문이 서울고등공민학교의 현황을 크게 기사화 해주어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많은 분들의 격려로 새로운 희망에 부풀게 되었고 더욱 활기차게 전진하게 되었을 때 박정희의 쿠데타를 맞게 되었다.
 

▲ 필자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은 5.16 쿠데타 직후 공화당 입당을 권유받았다. ⓒ노병구

5·16 군사 쿠데타

참으로 어려운 중에도 큰 보람을 가지고 희망찬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인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모처럼 민주헌법을 만들고 그 헌법에 의한 공정한 선거로 민주당 정권이 세워지고 불과 9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인들이 국가와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향해서 총부리를 겨누고 서울로 진격해왔다.

사회가 너무 혼란스럽고 부정부패가 심하고 무능하다는 구실을 내세워 민주당 정권을 무력으로 무너뜨리고 합헌적으로 구성한 국회를 해산하고 자기들이 임의로 만든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불법기구를 만들어 그들이 국권을 좌지우지하기에 이르렀다.

군사 쿠데타에 반대하거나 비협조적인 사람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도 아무데도 호소할 수조차 없는 살벌한 세상이 되었다.

서울고등공민학교는 쿠데타 세력이 가장 경계하는 대학생들이 운영하는 학교이기 때문에 영등포 경찰서 사찰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담당 형사가 찾아와 군부를 지지하고 협조하라고 압력을 가해 왔지만 “나는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가세가 어려워 진학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적으나마 새 희망을 주는 것이 우리 선생님들의 일치된 뜻이니 도와주시기 바랍니다”고 말했다.

솔직히 무법으로 국권을 유린한 그들을 환영하고 찬양하며 따를 수가 없었다.

그런 눈치를 챈 그들은 점차 학원설립 조건 등을 내세워 인가를 받아야 한다고 압력을 넣으면서 괴롭히기 시작했다.

맨손으로 무보수로 희생하는 우리들이 그들이 제시하는 인가조건을 하루아침에 맞출 수는 없었다.
 

오랫동안 시달려야 했고 또 그동안 우리학교를 돕던 동회장들을 비롯한 유지들에게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그분들의 발걸음도 점차 뜸해지기 시작했다.

또 선생님들도 학교를 졸업하고 자기들의 갈 길을 가는데 새로운 봉사자를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선생들도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어서 하는 수없이 영등포에 있던 명신전수학교를 찾아가 우리 학교에 남아 있는 30여 명의 학생들을 졸업할 때까지 우리가 하던 대로 무료로 해 줄 것을 요구하고, 그동안 우리 학교에서 쓰던 책걸상과 칠판 등 교육 기자재를 명신전수학교에 넘겨주고 만 7년간 운영해온 서울고등공민학교의 문을 닫았다.

참으로 애석하고 원통한 일이었다.

나는 서울고등공민학교를 함께 세우고 함께 봉사하며 수고했던 약제사인 맹경옥과 결혼해 신길동 95번지에 백운약국을 열었다. 병도 많이 회복되어 중앙대학교에 복학도 해 분주한 생활을 했다.

"가보시면 압니다 "

공정하고 당당하게 군정에서 민정으로 정권을 이양한다고 해놓고, 모든 국민의 정치활동을 철저하게 금지시켜 놓고, 박정희는 불법으로 공화당 사전조직을 시작했다. 

여러 번의 선거에서(동회장·서울특별시의회·민의원) 찬조 연설을 한 나도 저들이 보기에 영등포 사회에서는 제법 알려진 사람으로서 그들의 포섭대상으로 지목됐다. 하루는 신길동 백운약국 앞에 검은 지프차를 세워놓고 4명의 기관원이 약국에 들이닥쳐 잠깐 가자고 했다.

“당신들은 누구고 무슨 일로 어디를 가자고 하는 겁니까?”

“가보시면 압니다.”

당시에는 가자고하면 안 갈수 없는 살벌한 때여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차를 탔다. 새파랗게 질린 아내에게 걱정 말라는 말을 남기고 차를 탔다. 지프차는 노량진 어느 골목길 안의 큰 대문 앞에 나를 내려놓았고, 그 곳에 들어가 보니 음식상을 잔뜩 차려 놓고 여러 명이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반겨 주었다.   

“반갑습니다. 혁명 완수에 노 선생의 협력이 필요해서 노 선생을 여기 모신 겁니다. 정당을 만드는데 노 선생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입회원서를 내어 놓고 입회하고 서명해 달라고 했다.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켜 놓고 자신들은 공화당의 사전조직을 하는 것이다.

나는 몹시 불쾌했지만 “나는 가까운 분들의 찬조 연설은 했지만 정치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정치를 하지 않을 사람이 무슨 정당을 만드는데 입회를 합니까?”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꽤 오랜 시간을 끌었는데 분위기는 험악해지고 통행금지 시간이 다가오는데 “이 일은 극비로 하고 있는데 비밀 유지를 위해 노 선생이 여기 온 이상 입회를 하지 않으면 집에 보낼 수가 없습니다”하면서 협박을 했다.

“오늘 입회를 하면 바로 정당에 입당이 되는 겁니까?”     

“아니요 정당이 창당 되면 또 입당원서를 내야지요.”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들이 내 놓은 서류에 서명을 하고 통행금지 시간이 다되어서야 집에 돌아 왔다.
나는 그때부터 박정희의 쿠데타를 적극적으로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때 못이기는 척 따라갔더라면 제법 출세도 하고, 물질적으로는 풍요한 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부터 김영삼 총재가 구국적 결단이라고 노태우의 민정당과 합당할 때까지 30년간 군정종식을 외치면서 험난한 야당의 길을 걸었다.

사람의 팔자도 순간의 선택에 좌우하는 것인가? 그러나 나는 후회는 없다. 

제 6대 한통숙 민주당 후보의 찬조연설을 하다    

군사 쿠데타에 찬성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모든 정치인을 정정법으로 묶어놓고 스스로 위법행위를 하는 공화당의 사전조직에 가담할 것을 강요당했던 나는 철저한 반(反)쿠데타 정신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애당초 정치할 생각이 없던 나는 군부세력의 협조요청을 오직 정의감만으로 모두 거절했다.
1963년 11월 26일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민주당 공천으로 영등포 갑구에 출마한 전 산공부장관 한통숙 선생의 요청을 받고 찬조연설을 하게 됐다. 나는 서슴없이 군사정부의 부정부패와 쿠데타의 부당성을 공격하며 한통숙 선생의 당선에 힘을 보탰다.   

내 연설을 들은 많은 유권자들이 열렬한 격려를 보내주어 한통숙 후보도 나도 크게 고무 되었다.

한통숙 의원이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지구당 개편대회가 열렸는데 그때까지 나는 정치할 생각이 없어서 지구당 인사에 관심이 없었는데 많은 당원들이 ‘노병구도 지구당 부위원장을 시켜야한다’고 나를 부추기기도 하고 한통숙위원장을 압박하기도 했다. 그래서 약간의 곡절은 있었지만 난생처음 영등포 갑 지구당 부위원장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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