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노병구 자유기고가)
예상을 깬 유진산의 승리
유진산 후보를 비롯하여 공화당의 윤주영 그리고 백기완과 다른 후보 세 사람 등 모두 6명이 등록을 마치고 선거 운동이 시작되었다.
나는 유진산 선생의 지프차, 앞자리에는 후보자가 앉고 뒷자리에 후보자의 경호를 맡고 있는 이형호 씨와 함께 타고 다니며 하루에 7내지 8회씩 정견발표회를 했는데 며칠을 다녀도 연설회장에는 유권자는 없고 아이들만 모여들었다.
‘유진산은 사쿠라’라는 말을 다른 후보 진영에서 퍼뜨려 놓고, 경찰을 비롯한 공무원들의 선거개입과 압력으로 정견발표회장에는 어른은 한명도 없고 어린 아이들만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약속한 연설시간이 되어 아이들 몇을 상대로 허공에 대고 연설을 하려고 하면 맥이 빠졌다. 유진산 선생은 아이들을 향하여 “어린이 여러분, 내 이름이 유진산인데 오늘 집에 가거든 아버지 어머니께 유진산 할아버지가 아빠, 엄마를 만나러 왔다가 못 뵙고 간다고 안부를 전해주세요”라고 했다.
“집에 계신 유권자 여러분은 여기저기 숨어서 여러분을 감시하는 눈초리가 많으니 나오시지 마시고 창문을 열어 놓고 제 연설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이들과 허공에다 대고 자기가 하려고 한 말을 남김없이 한 시간 정도씩 꼬박꼬박 열변을 토했다.
참으로 맥 빠지는 연설회였지만 후보자 자신이 열성을 다하는 모습에서 함께 다니는 우리들도 감동을 받기 시작했다.
우신초등학교에서 첫 번째 합동 정견 발표회가 열렸다.
등단하는 후보자마다 유진산 후보를 공격하는데 특히 백기완 후보가 아버지 같은 유진산을 가장 혹독하게 공격했다.
“유권자 여러분, 나는 백기완입니다. 내가 여기서 입후보한 이유는 바로 저 늙은 멧돼지를 잡으러 왔습니다. 저 늙은 멧돼지는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으로 둔갑하는 배신자입니다.”
“저 사람이 우리나라의 정치를 망치는 사람입니다.”
“저 늙은 멧돼지를 이번에 여러분의 표로 때려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입에 담지 못할 험구로 욕설을 해도 아무런 표정 없이 자기 차례가 되면 “막중한 나라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나라 살림을 어떻게 하겠다는 정견도 없이 남의 험담만 늘어 놔서야 되겠느냐?”고 한마디 하고는 시종 국회의원으로서 해야 할 일과 현 국정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신민당의 정책을 설명하고 연설을 끝냈다.
그날 이후 개인 정견발표회의 사정은 완전히 바뀌었다.
“역시 유진산이 정치가다.”
“다른 후보들은 유진산에 비하면 족탈불급이다.”
그러면서 유권자들이 정견발표장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합동 정견발표회가 있던 날 저녁에 상도동에서 유진산 후보의 개인 정견발표회가 있었는데 그날따라 그 지역 출신 K씨가 찬조연사로 등록이 되어 있었다. 그분은 습관인지 또는 선거운동 시작 후 처음으로 수많은 청중이 모여 들어 흥분이 돼서 그랬는지 연설 시작 전에 소주를 큰 컵으로 한 컵 들고 연단에 올라섰다. 날은 덥기도 하고 술에 취해선지, 청중의 열기에 취해선지, 연설내용이 오락가락하며 시간을 끌어 지루하게 되자 일부 청중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빨리 끝내라는 쪽지를 여러 번 적어 연사에게 건넸지만 그때 마다 쪽지를 보고는 이제 끝내는가 하면 또 물을 들이키며 “뭔가하면” 하고는 연설을 계속했다.
청중이 모이지 않아서 계속 실망하다가 모처럼 유권자에게 제대로 된 정견발표를 하게 된 호기를 놓치는 후보자의 가슴은 타고 있는데 술 취한 연설은 계속되고 청중은 계속 빠져나가니 천하의 유진산 후보도 “이 사람아 웬 물은 그렇게 먹어, 뭐가 뭔가하면이야, 이 사람아 이제 그만 끝내 이 사람아”하며 독촉을 했다. 후보자는 답답하겠지만 그것을 보는 우리들은 답답하면서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늦게 연설이 끝나고 상도동 집에 오자마자 유진산 선생은 연설회를 관장하는 J씨를 불러 “내일 연설회 계획서를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거기에도 K씨가 연사로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그 계획서를 내던지면서 J씨에게
“야 네가 후보를 해라”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후 K씨는 선거가 끝날 때까지 연단에 서지 못했다.
다음날부터 유진산 후보의 연설회장에는 유권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이제는 확실한 승리를 잡은 것 같았다. 진산 선생도 나도 마이크를 잡으면 저절로 힘이 나고 나 스스로도 평상시에 생각지 못했던 좋은 말들이 튀어나와 청중의 갈채를 받기도 했다.
나는 매일 아침 7시에 후보자와 마주앉아 어제의 유세 결과를 반성하고 새로운 연설 내용을 검토하는 것으로 그날의 연설회를 시작했다.
아침마다 유진산 선생은 나를 보고 어제의 나의 연설 내용을 지적하며 “자네는 목소리도 좋고 제스처도 나무랄 데 없고 연설 내용도 참 훌륭했어, 그런데 혹시 자네가 말한 어제의 연설내용 중에 이 대목은 이런 말로 대체하면 어떨까하고 내가 생각해 봤어.”
그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무릎을 쳤다.
그러면서 나는 성숙한 연설이 어떤 것인가를 보고 배우며 나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한 달의 선거운동 기간에 사람의 도리에서부터 인생철학까지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아들 같은 나에게도 결코 억압을 하거나 핀잔을 주지 않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잘못을 인정하게 하는 참으로 민주적인 교육을 실천했다.
윤주영 후보도 그렇지만 특히 백기완 후보는 자기 아버지 같은 연배의 유진산 후보를 인정사정없이 비난하고 다녔지만, 특히 개인 정견발표회에서는 한 마디 대꾸도 없이 국가 경영에 관해서만 한 시간 이상씩 참으로 진지하게 호소하고 다녔다.
하루는 재일 교포 대표 김재화의 전국구 공천을 문제 삼아 유진산 후보를 연행하려고 기관요원 몇 명이 연설회장까지 지프차를 몰고 왔다.
“지금 보다시피 유권자들이 연설을 듣기 위해서 이렇게 많이 나와 있는데 인사도 없이 그냥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않느냐, 단 10 분간만 인사를 하고 가자”고 타협을 해 나를 보고 약 7분이 되거든 신호를 하라고 지시를 하고 연설을 시작했다.
평상시와 한 치도 차질 없이 침착하게 연설을 하는데 늘 한 시간 이상을 하던 연설을 단 10 분으로 줄였는데도 평상시에 하던 연설 내용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끝을 냈다. 나도, 듣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혀를 내두르며 그 실력에 감탄했다.
제7대 국회의원 선거는 자유당 말기에 저질렀던 부정 선거에 버금가는 금권타락 선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 초반에 공화당 윤주영 후보의 당선이 확실하다는 예상을 완전히 누르고 유진산 후보가 만여 표 차로 당당하게 압승했다.
7대 국회의원 선거를 6·8 부정 선거라고 해 야당 의원들이 약 6개월이나 국회 등원을 거부하며 박정희 대통령으로 하여금 부분적으로나마 선거에 부정이 있었다는 자인을 하게하고 여야 합의로 ‘합의 의정서’를 만들어 앞으로는 부정선거를 못하도록 입법을 하기로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등원을 했다.
중앙 상무위원이 되고, 정치는 내 운명이라고 정치를 하자고 결심했다
선거가 끝나고 지구당 조직을 마무리하면서 노병구도 부위원장 직을 맡으라는 유진산 선생의 지명으로 김유근, 최종식, 상덕식 등 5명이 부위원장에 임명됐다.
위원장이 거물이다 보니 우리나라의 거물급 정치인들은 거의 유진산 선생 댁으로 밀려들었다. 영등포 갑구 부위원장이라고 하면 저절로 그 집에 드나드는 분들과 인사도 나누게 되고 또 친절하게 대해주어 그들로부터 정치권의 모든 것을 들으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기왕에 다니던 이재형 선생 댁을 이범수와 함께 종종 드나들었다.
1968년 5월 20일 신민당 전당대회가 열려 유진오 박사가 총재가 되고 유진산이 수석 부총재 그리고 이재형과 정일형이 부총재가 되었다.
당의 최고 의결기관인 전당대회의 권한을 위임받은 중앙 상무위원회 위원은 국회의원과 지구당위원장, 그리고 전당대회 의장단을 비롯한 주요 당직자를 포함해 전국에서 300명뿐인데, 정치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상무위원이 되고 싶어 했다.
그날은 아침 일찍 사직동 이재형 씨 댁을 방문했는데 이종린 비서와 장 비서가 “노형은 대단한 실력자군요. 어제 밤늦게 운경(이재형씨의 호) 선생이 유진오 총재 댁에서 총재단 회의를 하고 오셨는데 대문을 들어오면서 하늘을 보고 한참을 서 있더니 ‘진산이 노병구를 중앙 상무위원에 추천을 해서 오늘 노병구가 중앙 상무위원이 됐어, 부총재 한사람이 불과 15 명씩을 추천하는데 진산의 추천자 명단에 그것도 중간쯤 들어 있었어’하면서 심히 놀라워하더라”고 전해주었다. 나는 농담으로 알아들었다.
나는 중앙당 부장이나 차장도 한 적이 없는데 중앙 상무위원이라니 상식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들은 정색을 하며 오늘 아침 신문에 이미 났을 텐데 신문도 안보고 다니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나는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바로 나와 신문을 사보니 발표된 중앙 상무위원 명단에 분명하게 노병구라는 이름이 찍혀 있었다.
나는 곧바로 상도동 유진산 위원장 댁으로 달려가니 거기에 와 있던 많은 선배들이 내손을 잡으며 축하 인사를 해주었다.
곧바로 유진산 선생 앞에 나가 “뜻밖에 중책을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했더니 “무엇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맡겨진 책임을 잘 하느냐 하는 것이 더 문제인거야, 이제부터야 잘해봐”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많은 사람을 상대해 봤지만 누구에게 예정된 은혜를 베풀 때나 베풀고 난 후에 미리 알려주거나 자랑삼아라도 자기의 공을 나타내는 것인데, 유진산 선생은 아무 사전 예고나 사후에 통고도 없이 신문을 보고 찾아간 나에게 너무도 담담하게 말씀하셔서 그 분의 인품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지구당 간부들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 당시 부위원장 중에는 내가 30대로 제일 나이도 어리고 또 정당 경력도 일천하여 위원장이 노병구만 사랑하고 특별히 돌봐준다고 불평이 많이 나왔다.
이재형은 나를 중앙당 부장이나 차장 정도를 추천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유진산 부총재가 먼저 중앙 상무위원으로 추천을 했으니, 나는 그날부터 유진산계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부터 나는 자연스럽게 진산계가 됐고 이재형 하고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
약국에 전화를 걸어 내가 중앙 상무위원이 된 것을 이야기하며 집에 있는 신문을 찾아보라고 했더니 아내도 몹시 기뻐하며 축하 한다고 하며 즐거워했다.
내가 무엇이 되고자 한 것도 아니고 또 그 자리를 얻기 위해 노력한 것도 아니었다. 나와 아내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고 본격적으로 정치를 하자고 뜻을 모으고 험난한 정당생활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