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원을 다녀와서 [이순자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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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을 다녀와서 [이순자의 하루]
  • 이순자 자유기고가
  • 승인 2023.06.1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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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이순자 자유기고가)

오늘(6월 6일)은 현충일이다. 

서울 동작구 현충원 국립묘지에 묻혀 있는 동생을 만나러, 집에서 오전 7시 반에 출발했다. (동생은 1977년 경기 문산에 있는 군대에서 지뢰 설치 작업 도중 순직했다) 둘러메는 가방에다가는 이미 소주 한 병과 참외 한 개를 넣어놓았다. 행길로 나와서 우선 떡집부터 들렸다. 노란 인절미 한 팩과 꿀떡 한 팩, 그리고 찹쌀떡 한 팩 이렇게 3가지를 샀다. 그리고 김밥집으로 가서 한 줄도 샀다. 

모두 메는 가방에, 다른 한 손은 가방을 추켜들어주며 한 걸음 한 걸음 걷는다. 몇 년 전만 해도 손수 집에서 밥도 짓고 탕국도 끓이고 전도 부치고 조기도 구워서 제법 제사음식을 만들어 카트에다 실어 끌고 갔었지만, 지금은 허리가 너무 아파서 엄두가 안 난다. 그래도 일 년에 두 번, 설날과 추석에 집에서 손수 만든 음식으로 제사를 지내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다. 

시내버스에 올라타니 시간이 오전 8시 10분이었다. 여느 날 같으면 이 동네에서 시내버스로 국립현충원까지 약 50분 정도 걸리지만, 오늘은 현충일이라서 제시간에 도착될는지 모르겠다. 시내버스가 국립현충원 정문 앞까지 갔는데도 교통은 비교적 복잡하지 않았다. 수십 명의 교통경찰이 분주하게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현충원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현충원 정문을 향해서 걸으니 꽃장수들이 즐비하다. 꽃다발과 꽃바구니를 만들어 진열해 놓고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몇 발짝 걸어가다가 마음에 드는 꽃다발이 있어서 만 원을 주고 샀다. 

그때 동생의 영혼이 환하게 웃으면서 “누나 왔어?” 하고 반기는 모습이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에그. 홀로 계시던 아버지도 20여 년 전에 돌아가시고, 큰 누나도 세상 떠나고, 이제 혈육이라고는 작은 누나, 그것도 지팡이 짚고 늙고 병든 누나 한 명 살아남았으니 얼마나 반가울까?’ 

현충원 정문에는 ‘제68회 현충일’이라는 현수막이 크게 걸려 있었다. 벌써 분위기부터가 다르게 느껴졌다. 국립현충원을 괄시하던 전 정부가 끝이 나고 이제는 국립현충원을 떠받드는 자유우파 정부가 들어섰으니 현충원 분위기마저 180도 바뀐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나는 사실 문재인 정부 시절 현충원 동생 묘지에 오면 절로 통곡이 나와 온몸으로 오열했었다. 어린 꽃송이 동생과 같은 호국영령들이 목숨 바쳐 지킨 대한민국을 천대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헛된 희생이 아니었나? 하는 허망하고도 분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문 정부는 현충원에 더는 군인들을 묻지 않겠다고 하고 있었다. 6·25 영웅인 고 백선엽 장군의 묘도 현충원이 아닌 대전으로 보냈고, 집권 기간 대통령은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는 발언을 해대기 일쑤였다. 

나는 그때 동생의 묘지 앞에서 이렇게 울부짖었다. “동생아, 네가 목숨 바쳐 지킨 이 나라를 끝까지 지켜다오.” 그렇게 몸부림쳤었다. 간절함이 통했는지 과연 좌파정부가 물러나고 자유 우파 정부가 들어섰다. 

또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몇 년 전부터 동생의 묘비 위 이름을 새긴 글자가 흐려져서 인터넷이라도 할 줄 알면 다시 진하게 새단장을 해달라고 나라에 건의라도 할 텐데, 하며 엄청나게 고민을 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현충원에 가보니 동생의 묘비 위 글자가 깨끗하고 선명하게 고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새삼 국가가 너무 고마웠다. 역시 국가는 자유우파 국가가 최고라는 생각이 들면서 윤석열 대통령께도 고마움을 느꼈다. 

대한민국! 감사합니다! 윤석열 대통령 감사합니다! 
 

※ 시민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이순자 씨는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사는 77세 할머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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