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2 대선 후단협 비화 단독공개
“김상현·정대철의 큰 그림 기획, 나는 앞잡이 역할 자처
노무현 대통령 만들려고 탈당해 후단협 성공시켰지만…
盧 눈 밖에나게 돼 정치 험로, 김민석과 나는 피해자 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지만 다가올 일은 쫓을 수 있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만약에, 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때 그랬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흥망성쇠도, 성패와 승패의 주역들 모두 바뀌었을지 모른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계승할 것과 청산할 것을 만들어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것. 그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시사오늘>은 그동안 역사적 증언을 모와왔다. 당대의 시사점을 오늘날에 반추하기 위해서다. 과오가 반복되지 않을 때 미래는 비로소 안개를 거둘 것이다. 오늘도 역사는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어느 시간 모퉁이에서 만난 한 사람 한 사건. ‘재발견’의 묘미가 있다. 시대산책이 현대사와 동행하는 이유다. |
시대산책 ‖ 송석찬 편
- 노무현·정몽준 후단협은 ‘작전’
- 의원 꿔주기 원조 창안은 ‘나’
- DJ 청년단 軍 끌려간 뒤 안 보여
- 6·10항쟁 산실 국민대회 주도 구속
- 반독재 투쟁 불똥, 가족 수난사로
- 전국 최초 무상급식 유성구부터
1952년 대전 유성구 출생, 부인 나경숙, 슬하 1남 2녀, 명지대 법학과 졸업, 고려대 경영대학원, 충남대 행정대학원 수료, 신민당 김대중 대통령후보 전국청년기동 유세반 연사, 6·10대회 주도혐의 구속, 평민당 대전서·유성구 지구당위원장, 대전광역시의회의원, 유성구청장, 16대 국회의원 등. |
송석찬 전 국회의원은 무상급식과 주5일제 선구자다. 민주화 운동가이자 동교동계다.
“정치요? 후회 없습니다.”
- 의원의 정치 행로를 보면 말이죠.
“아. 네.”
여유로운 미소가 감돌았다.
- 평민당 후보로 유일하게 대전광역의원에 당선된 바 있지 않습니까. 이후 제1기 민선에서 자민련 텃밭인 유성구 구청장 선거에 나가 국민회의 후보로 또 유일하게 승리해, 지역 구도를 깨트린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런 뒤 재선을 거쳐 승승장구하며 16대 국회의원이 됐잖습니까.
“그렇습니다(웃음).”
- 아쉬운 점은 2002년 후단협에 참여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말이죠.
“허허….”
쓴 웃음이 밀려왔다.
16대 대선 때였다. 여권에서는 노무현-정몽준 후보 간 대통령 후보단일화 추진협의회, 이른바 후단협 바람이 불었다.
- 이야기 좀 듣고 싶어요.
“나는 말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만든 공신입니다. 그런데 오해만 샀어요. 김민석 의원과 나는 피해자예요.”
6월 7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만난 그는 후단협 질문에 이 말부터 꺼냈다. 눈빛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읽혔다. 지금부터는 2002년 후단협 비화에 대한 단독공개다.
격동의 후단협 비화
“당시 여론조사를 해보면요…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후보가 43~45% 나오고, 우리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19%~20%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습니다. 또,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가 20~30% 정도였고요.”
우리나라 최초로 실시한 완전국민경선을 통해 노무현이 여당 주자로 선출될 때만 해도 파죽지세일 것 같았다. 하지만 김영삼(YS)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어필한 ‘YS시계 사건’으로 지지층 비토에 직면했다. 김대중(DJ) 대통령 아들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악재에 직면했다. 8‧8 재보선 실패는 설상가상이었다 지지율은 떨어져 3위로 밀려났다.
정몽준의 인기는 월드컵 개최에 힘입어 순풍을 타고 있었다. 보수 내 ‘이회창 한계론’이 일면서 대안으로 주목받았다.
“이회창 후보는 절대 안 된다고 봤어요. 여론조사해 보니까 확장력이 너무 없는 거예요. 반면에 정몽준 후보의 상품력에 굉장히 빠져 있을 때였어요. 보수를 대변할 수 있는 대통령이 될 수 있겠다, 확신이 있었어요.”
- 정몽준 캠프 김행 대변인 2023년 4월 본지인터뷰 중-
보수에서 갈려져 나온 정몽준의 등장은 민주당으로서는 기회이자 위기였다.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가 안 된다면 한나라당에 정권을 뺏기고 말 참이었던 거예요.” 송석찬은 긴히 할 얘기가 있다는 듯 몸을 앞으로 숙이고는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하루는 정대철 대표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이제부터는 그의 회고다.
# 작전을 세우다
“식사 좀 같이합시다.”
“네.”
저녁식사 약속 장소는 서울 중구 <조선일보사> 근처 코리아나호텔이었다. 정대철 외에도 김상현·이호웅 의원 등이 자리했다.
“정몽준, 노무현 후보를 모두 만났는데….”
정 대표가 입맛을 다시며 뜸을 들였다.
“노 후보는 단일화하려고 하는데 정 후보가 안 한다고 그래.”
반주를 들이키며 한숨을 푹 쉬었다.
“누가 좀 나서줘야 하는데….”
“뭘 나서야 한다는 말입니까?”
기다렸다는 듯 정대철이 전략을 설명해나갔다. 민주당 내부에서 노무현이 위기인 느낌이 들도록 저격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여기에는 노무현이 약체로 보여야 정몽준이 안심하고 단일화를 할 거라는 계산이 깔려있었다.
그렇다고 정대철이 딱히 누군가를 지목해 저격수 역할을 해달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송석찬은 집에 돌아와 낮에 있던 장면들을 떠올리며 ‘왜 나를 불러놓고서는 그 말을 했을까?’ 이 점에 주목했다.
사실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그 무렵 송석찬은 ‘이회창의 저격수’로 불리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노무현의 저격수’를 좀 해달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여기까지 미치자, ‘그래. 나라도 나서자’는 결심이 절로 섰다.
김대중 정부의 성공과 정권 재창출을 위해 선도적으로 총대를 메야 한다고 생각했다. 양김(김영삼·김대중) 단일화 실패로 87년 대선의 결과는 뼈아픈 한으로 남아 있었다. 그때처럼 돼서는 안 된다는 일념이 강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곧장 정대철·김상현 의원을 만나 결심을 전했다.
“알겠네. 그러나 절대로 후보 개인에 대해서는 상처를 내면 안 되네.”
신신당부도 잊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거사를 준비하듯 비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런 연유로 반노파의 선봉장 역할을 도맡게 됐다는 설명이었다.
- 한마디로 작전?
“작전이 들어간 거죠.”
- 큰 그림에는 누가 또 관여돼 있던 겁니까.
“정대철·김상현 두 분 외에도 김영배 국회부의장 등이 있었지요. 내가 앞잡이 노릇을 한 거고요.”
- 관련해서는 또 누가 알고 있었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몰랐어요. 철저히 비밀로 진행됐던 거예요.”
노 후보나 그 측근들도 알지 못했다.
- 그래서 뭘 했습니까.
“‘노무현 후보 사퇴’를 촉구했어요. 언론에 보여주기식이었지, 실질적 행동에 나선 것은 아니었어요. 빈 봉투를 들고 돌아다녔지요.”
사퇴요구 서명을 받는 시늉만 취했다고 전해왔다. 그가 선두에 서면서 후보 단일화 촉구 분위기는 한껏 달아오르고 있었다.
“송석찬(宋錫贊) 의원이 선두에 서서 강경론을 주도하고 있다. 송 의원은 6일 ‘통합신당 창당을 위한 노 후보 사퇴 요구서’를 작성해 서명작업에 돌입했다. 송 의원은 이날 본회의장에서 사퇴요구서를 배포하다가 김옥두(金玉斗)의원 등의 만류로 도중에 중단했으나 “14일까지 비공개 서명을 받아 당에 제출할 것이다. 60∼70명가량의 의원이 취지에 공감하고 있다”며 서명 작업을 강행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2002년 9월 6일 <동아일보> 기사 중-
“다른 의원들은 탈당 원서 받으러 다니고, 나는 계속 노무현 후보 사퇴하라고 언론에다 외쳤죠.”
겉에서 볼 때 민주당은 폭풍전야였다. 노무현 지지파와 후단협 파로 나뉘어 극심한 내분이 일어났다. 급기야 반노 세력 중심으로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가 10월 4일 공식 출범했다. 동교동계도 10~11월 초까지 노무현의 지지율이 나아지지 않으면 후단협에 힘을 싣겠다고 발표했다. 후단협을 명분으로 탈당 러시도 이어졌다. 외부에서는 분당 초읽기라며 예의주시했다.
- 실제 많이들 탈당했잖습니까.
“나도 그렇지만, 김민석‧신낙균 이런 분들도 가고 싶어 간 게 아니에요.”
역시나 정몽준을 후단협에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라고 강조했다. 탈당 예고만 수십여 명에 달했다. 당내 소장파로 불리던 김민석 전 의원과 신낙균 전 문화관광부 장관에 이어 송석찬·김영배·김원길·박상규·유재규·설송웅·이희규·김덕배·박종우·최선영·이윤수 의원 등이 집단 탈당을 선언했다. 모두 정몽준 캠프로 발길을 향했다.
당에서는 “기회주의자, 배신자, 철새”라고 비난했다. 특히 우상호·이인영·임종석·허인회 등 같은 386운동권 출신 정치인인 김민석을 향해 “다시는 동지라고 부르지 않겠다”며 절연을 선포했다.
김민석은 “나를 기회주의자라고 하는데, 한나라당에 갔다면 몰라도 나는 이기기 위해 온 사람이다.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대선이 끝난 뒤 한동안 정치 재개를 하지 못할 만큼 이 일로 그는 수난을 면치 못했다.
“최고 피해자였죠.”
동병상련을 느끼듯 송석찬이 읊조렸다. 어쨌거나 이런 일로 후단협을 위한 작전이 성공하기에 이르렀다는 설명이었다.
“盧, 눈길조차 안 줘”
마침내 11월 초 정몽준은 노무현과 후단협에 나설 것에 동의했다. 이는 민주당 내 전열을 가다듬는 기회가 됐다. YS시계 사건 이후 노무현에 등을 돌리거나 지지를 유보하던 진보 진영에서 다시 노 후보를 중심으로 결집하는 계기가 됐다.
반대로 정몽준 측에서는 덫에 걸린 느낌이 강했던 듯하다. 국민통합21의 김행 대변인은 다음과 같이 소회한 바 있다.
“낮에는 국민통합21, 밤에는 민주당하는 박쥐들이 너무 많았어요. 우리가 순진했고 저쪽이 노회했던 거예요. 여론조사도 정말 미스터리야. 친민주당 쪽 기관인데다…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과였어요.”
-김행, 2023년 4월 본지 인터뷰 중-
우여곡절 끝에 후보단일화 선출을 위한 여론조사는 노무현의 승리로 돌아갔다.
- 만약, 정몽준 후보가 이겼다면 어떻게 하려했습니까?
“이회창만은 안 돼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후단협을 한 거니까요. 정 후보가 됐어도 도왔겠지요.”
당시를 상기하던 송석찬은 “내가 있잖아요. 노 후보 당선시키려고 각 시군 단체장에 전화하고 가두방송하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실질적으로 조직을 움직여 대통령 만드는 데 애를 썼음을 강조했다.
- 근데, 정치 행로를 보면 그때가 패착이 아니었느냐는 거죠.
“한 번은 말이에요….”
인정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대선 투표 날 중앙당 개표상황실에서 노 후보랑 TV를 같이 보고 있었거든요. 근데 방송에서 ‘송석찬이 노무현 후보를 향해 사퇴하라고 했다’는 자료화면이 대문짝만하게 나온 거예요. 세상에 TV에서….”
다시 생각해도 오싹한지 도리질을 쳤다.
“내가 혀가 잘 돌아갈 때였거든요. 그냥 거침없이 사퇴하라고 하는데….”
본인이 방송으로 봐도 자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착착 감길 정도로 생생한 듯했다.
- 정치 행보로 봤을 때 거기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거죠.”
주거니 받거니 했다.
“노사모(노무현을사랑하는사람들모임)하던 분들한테 나는 완전히 죽일 X이었어요. 거기서부터 끝난 거예요.”
- 열린우리당 창당도 주도했는데 말이죠.
“나와 이해찬·송영길·배기선·이미경 의원 이렇게 다섯이서 창당을 기획했어요. 처음엔 신당 창당에 대한 찬성 여론이 20%밖에 안 될 정도로 매우 안 좋았어요. 어떻게든 돌파해내겠다.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내가 있는 대전에서 몇천 명 모아놓고 토론을 벌였어요. 그때 탄력받은 것에 힘입어 창당이 진행됐던 거예요.”
- 정작 과실은 못 얻지 않았습니까. 재선도 하지 못했고 말입니다.
“내가 봤을 때 동교동계 정리 차원에서 그리된 것 같기도 해요.”
참여정부 시절 동교동계는 수난 시대였다. 새천년민주당 잔류파나 열린우리당 합류파나 마찬가지인 처지였다. 정대철만 해도 후단협 판을 깐 것부터 단일화가 불발됐던 투표 전날 노무현이 정몽준 자택을 찾아가게 기획한 주인공이다. 그렇게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호시절을 누리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그러니 나는 어떻겠어요.”
대놓고 사퇴하라고 한 장본인이니 미움만 사지 않았겠냐는 말로 들렸다.
“한번은 과학의 달을 맞아 노무현 대통령이 내 지역구인 대전 유성구의 연구단지를 찾았거든요. 길을 안내하려는데, 내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더라고요.”
- 아예 멀어진 거네요?
“그렇죠. 예전에는 가깝게 지낸 분이었는데 말이죠.”
- 사실을 말해주지 그랬습니까. 대통령 만들려고 악역을 자처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나라고 왜 안 그러고 싶었겠어요. 안 그래도 김상현 의장을 찾아가서는….”
# 김상현과의 대화 송석찬 : “지난번 내막을 노 대통령께 얘기하겠습니다.” |
- 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렇지요.”
그도 말년을 바라보고 있고, 김상현은 고인이 됐다. 시간도 많이 지났다.
“원래는 노무현 대통령 퇴임 후 적당히 기회를 봐서 얘기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얼마 안 가 서거했다는 비보가 들려오지 뭐예요.”
눈빛이 흔들렸다. 오해를 풀지 못한 게 한으로 남아 보였다.
“자민련에 의원 꿔주기”
화제를 돌렸다.
- 2000년에 있었던 ‘의원 꿔주기’ 얘기 좀 해주죠. (김대중·김종필의 DJP연합으로 연립정부가 된 자민련이 국회 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하자, 새천년민주당에서 공조를 확고히 하고자 의원을 꿔준 사건으로 송석찬이 주도해 진행됐다. 의원 꿔주기의 첫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이후 지난 4·15 총선에도 비례위성정당에 의원을 꿔주는 일이 나타났다)
“나는 무엇보다도 김대중 정부가 역사적으로 성공하기를 바랐어요. 근데 16대 총선에서 충청도에 새천년민주당 바람이 부는 바람에 자민련(자유민주연합)은 17석밖에 확보를 못 했어요.”
교섭단체를 만들기엔 3석이 부족했다.
“자민련이 공동여당이라고는 하지만 교섭단체를 만들어주기 전까지 국회에서 모든 협조를 하지 않겠다는 게 기본 입장이었어요.”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133석)보다 열세이던 새천년민주당(115석)은 자민련의 공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의원총회 할 때마다 우리당 의원들이 힘들어하는 거예요. 안 되겠다 싶어서 내가 그랬어요. ‘옛날에 큰 집이 자식을 못 놓으면 작은 집에서도 양자 보냈다. 우리도 양자를 보냅시다.’”
6월 의총 때였다.
“다들 관심을 안 두더라고요. 언론에서도 내 주장에 관심조차 없었어요. 신문 끝머리에 보일락 말락 내보낸 게 전부였어요. 12월 되자, 예산안 문제가 딱 걸린 거예요. 통과를 못 시키면 진짜 큰일이잖소. 나하고 송영진 의원이 예결위원이었는데 둘이 천장만 쳐다보다가 한숨만 쉬고 있었어요. 그러다….”
# 의원 꿔주기를 거듭 제안 송석찬 :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아니요. 그러나 국민의정부가 실패하면 국회의원도 없는 거예요. 송(영진) 의원, 우리가 자민련으로 갑시다.” |
하지만 복병이 생겼다.
“우리 쪽에서 3명이 가면 교섭단체가 될 줄 알았는데 자민련의 강창희 의원이 정도에 벗어난 것이라며 국회교섭단체 등록 서명을 거부한 거예요. 열아홉 명으로 한 명이 부족하게 된 거예요. 하는 수없이 나중에는 장재식 위원장이 자민련으로 오게 됐었죠.”
2020년 12월 송석찬·송영진·배기선에 이어 이듬해 1월 장재식도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해 자민련으로 당적을 옮겼다. 의원 꿔주기 파동으로 불렸다. 야당에서는 정략적 꼼수라며 맹비난했다. 언론의 시선도 곱지 못했다.
- 연어라는 별명을 얻었잖습니까.
“‘연어’로 언론에 많이 났었죠(웃음).”
송석찬은 탈당 회견에서 “연어처럼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는 영광의 날을 지켜봐 달라”며 민주당 복당을 시사해 그 같은 별명을 얻었다.
“내각제 못한 것? 정치는 현실”
- 좀 회고를 해보면 DJP연합이 깨진 이유는 뭔가요. 내각제 때문인가요.
“내각제를 안 해서죠.”
JP(김종필)가 97대선에서 DJ(김대중)와 손잡은 데에는 집권 2년 차에 내각제 개헌을 한다는 약속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행되지 못했다. DJP연합도 흔들렸다.
- 내각제를 하는 게 옳은 것 아닌가요.
“그 당시 정치 상황이 지금처럼 극심한 내전 양상이었다면, 내각제도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지요. 하지만 그때는 대통령직선제를 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예요. 국민이 볼 때는 내각제를 하면 권력 나눠 먹기로 비췄어요. 내각제가 좋다고 하더라도 국민이 반대하는 데 시행하기 어렵죠.”
- 사실상 DJP연합이라는 게 말이죠. 대국민 앞에서 내각제를 하겠다고 선언한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정권을 잡은 거잖아요.
“두 분의 약속이 있었지만, 국민이 반대하니까….”
매듭을 지을 요량으로 “정치는 현실이잖아요.”
“군대 끌려간 뒤 사라진 청년들”
굵직한 정치적 사건을 뒤로하고 그의 얘기로 넘어왔다.
1952년 대전 유성구에서 태어났다. 동교동계와의 인연은 명지대학교 재학 시절인 1969년부터 시작된다.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에 분개해 정치에 뛰어들 결심을 한 그는 종로 상가에 있는 한국변론연설학원을 찾았다. 수줍은 성격이었으나 일 년 정도 학원에서 열심히 훈련하면서 대중 연설하는 법을 터득했다.
1971년 8대 총선이 다가오자 국회의원 출마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지금과 달리 합동연설이 있던 때였다. 공화당 후보, 신민당 후보가 번갈아 연설하며 실전 연습을 했다.
하루는 신민당의 고병국 선전부국장이 찾아왔다. 그는 1971년 7대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 후보를 돕는 전국청년기동유세반을 모집하고 있었다. 눈여겨보던 송석찬을 비롯해 13명의 연사가 꾸려졌다.
김상현도 그때 만났다. DJ 비서실장이었다. 김상현은 “이 나라 민주화를 위해서는 공부도 해야겠지만, 전국을 다니면서 국민을 설득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로 청년들을 설득했다. 연사가 돼 사회를 변혁시키겠다는 꿈으로 부풀어 올랐다. 신순범 전 의원이 반장을 맡고 전국 5일장을 쫓아다녔다. 그 시절에는 유세 소식 하나에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청년들은 연단에 서서 있는 힘껏 DJ 지지를 호소했다.
하지만 대선은 박정희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해 10월 유신이 선포됐다. 송석찬은 청년 유세단이었다는 신분이 드러나면서 군대에 끌려갔다.
“1973년 1월 15일 입대했어요. 옷 정리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송석찬’ 하면서 불러요. 무조건 따라오라고 해서 갔더니 난롯가에 앉아 불을 쬐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어요. 상병 한 사람이 나를 알고 있다는 듯 이름을 부르더니 다짜고짜 무릎과 발목 사이를 후려치더라고요. 쓰러지니까 뭐 이런 새끼가 있느냐면서 차고 또 차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곡괭이 자루나 개머리판으로 나를 두드려 패대는 거예요.”
어느 때는 까무러칠 때까지 머리를 발로 차기도 했다.
- 왜 그런 겁니까.
“내가 DJ 지원유세단이었던 것을 알고서 고문한 거였죠.”
자대 배치도 5번이나 옮겼다. 어느 한곳에서라도 적응하지 못하게 하려는 심산이었다. 가는 곳마다 구타는 계속됐다.
“지금도 오른쪽 다리를 못 쓰고 끌고 다녀야 하는 장애를 겪고 있어요. 치료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 맞으니까 신경이 죽어버린 거예요. 군에 있던 어느 때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철조망까지 도망갔다가 되돌아오기도 했어요. 아마 넘어갔다면 죽임을 당했을 거예요.”
- 다른 유세단 청년들도 군대에 끌려갔습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이후로 다들 얼굴을 볼 수가 없어요. 소식도 끊겼고 찾을 수도 없고….”
- 무슨 말입니까. 죽었단 말입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생사를 알 길이 없다고 했다. 서늘한 말이었다.
“나는 청년유세단 동지들을 생각하면 비통한 생각뿐이에요. 2019년도에 <민추협과 6·10민주항쟁, 그리고 송석찬>이라는 사진전을 개최한 적이 있어요. 행사 전문을 쓰는 것만 3개월이 걸렸어요. 1970년대 같이 연설하다, 끝내 못 본 친구들이 생각나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나는 살아남았는데….”
눈시울이 붉어졌다. 숱하게 억장이 무너져 갔던 세월이었다. 그렇지만, 민주화 대장정만큼은 멈추지 못했던 걸까. 1984년 김상현을 따라 민주화추진협의회 창립에 가담했다. 12대 총선에서는 신한민주당(신민당) 창당에 나섰다. 선전국에서 문화부차장을 맡았다.
6·10민주항쟁을 향해
송석찬은 주로 식전 연설과 가두행진을 이끌었다. 천만인 개헌 운동부터 전국 각 지역 개헌추진위원회 결성 및 현판식을 돌았다. 서울과 부산, 광주, 대구, 대전, 청주 등 가는 곳마다 최선봉에 섰다. 핏대를 세우며 “독재타도” “직선개헌”을 선창했다.
“서울의 봄은 피의 능선을 타고 전두환 군사 독재에 무참히 짓밟혀…!”
“와아아아아….”
뜨거운 여름날 한줄기 소낙비를 맞듯 우렁차고 거침없는 연설에 청중은 시원함을 느꼈다.
5·3 인천 개헌 현판식에 앞서 DJ를 만나러 갔다. 그날의 중요한 지침을 받는 시간이었다. 동교동계 자택을 나오는데 경찰차가 가로막아 섰다. 송석찬이 연설을 하지 못하도록 연행해 가려는 것이었다. 그때 송천영 의원이 차 위로 올라탔다. “끌려가면 송석찬이는 못 돌아온다.” 직감한 그는 앞뒤 제지 않고 얻어터지면서도 온몸으로 막았다.
“덕분에 간신히 풀려나 인천시민회관 단상에 오를 수 있었지요.” 자신을 구해준 의원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 5·3사태 때는 어땠습니까.
“‘민주주의를 위해 총궐기하자’고 외쳐댔어요.”
송석찬은 자신의 목소리가 옥외 고성능 스피커를 통해 뜨겁게 물결쳐 갔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별안간 경찰이 행사장을 뚫고 들어와서는 난데없이 최루탄을 쏘아대기 시작한 거예요. 밖도 아니고, 안으로 밀고 들어와 쏴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되고, 곳곳에서 비명이 들려오고….”
유례없는 진압이라고 했다.
신군부는 12대 총선 이후 신민당을 중심으로 민주 세력이 결집하고 있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재야와 학생운동 시위를 용공으로 몰아 강경 진압해나가고 있었다.
누르는 힘이 클수록 반작용도 커지는 법이다. 5·3 인천사태를 시발점으로 이듬해 6월 항쟁이 일어났다. 민추협은 6월 10일 성공회 서울대성당에서 박종철군 고문 치사 은폐 규탄 및 호헌철페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범국민대회를 개최했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정권은 대회 3일 전부터 성공회 외곽을 철저히 봉쇄하기 시작했다.
송석찬은 민추협 주요 인사들과 성공회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국민운동본부의 양순직 상임의장과 한영애, 신하철, 김현수 의원과 모의해 6월 9일을 D-데이로 잡았다. 비교적 경비가 허술한 <조선일보사>를 이용해 수녀원 담을 넘는 데 성공했다. 지붕을 타고 뛰어내리면서 어렵게 성공회에 진입할 수 있었다.
“다음날 박종기 신부의 안내를 받아 종탑에 올라갔어요. 분단과 독재의 세월을 뜻하는 마흔두 번의 장엄한 종소리를 울리며 6·10민주항쟁 국민대회 시작을 알렸지요.”
이 일로 송석찬을 비롯해 6·10 국민대회를 주도한 인사들은 제일 먼저 강제연행 대상이 됐다.
“우리는 ‘죄인이 아니니 경찰 호송차에 끌려갈 수 없다’며 저항했어요. 성공회 봉고차에 올라타 문을 잠갔더니, 경찰들이 차 유리창을 깨려고 시도하데요. 그러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성공회 밖으로 차를 밀어서는 우리가 타고 있던 차를 견인하기 시작하더군요.”
결국, 송석찬을 비롯해 주요 인사들은 남대문과 동대문, 성동경찰서 등으로 분산 수감되고 말았다.
“대공분실로 끌려가 조사를 받는데 밤낮을 구분하기조차 어려웠어요. 내 경우는 대중연설을 많이 한 터라 따로 신분도 묻지 않더라고요. 이후 국가전복, 내란음모, 전국시위주도, 6·10 항쟁 주도, 급진좌경의 죄목으로 서대문형무소 독방에 구속되고 말았지요. 다행히 6·29가 선언되면서 얼마 안 가서 풀려났어요.”
“아픔 있지만…민주화투쟁, 후회 안 해”
그러나 이번엔 집안에 우환이 생겼다. “반독재 투쟁 시절 요시찰 대상이다 보니 가족들은 하루도 편치가 못했어요. 전두환 정권에서 내게 좌경 딱지를 붙이자, ‘빨갱이 새끼들 다 죽이겠다’는 협박 전화가 걸려왔어요.”
익명의 사람들로부터 받는 위협은 그 정도가 점차 심해갔다.
아내(나경숙)는 그와 동향이었다.
“내 정치활동 홍보물도 멋지게 만들어줬던 명민한 사람이었어요. 그런 아내가 집안이 빨갱이로 몰리면서 변해가기 시작했어요. 한밤중에 일어나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를 흔들자며 나와 아이들을 깨웠어요. 그래야 빨갱이로 몰리지 않고, 나도 안 붙잡혀 간다면서요. 점점 불안이 심해가더니 병원 진찰 결과 신경분열증이라면서….”
순간 그의 목소리가 깊게 잠겨 들어갔다. 인터뷰 내내 부인 얘기가 나올 때면 금세 목이 메어버렸다.
“병이 발발한 지 3년쯤 지났을 때였다. 어느 정도 아내의 병세가 호전된 것 같아 시장에 보낸 적이 있었다. 아내는 만 원을 주고 콩나물 500원어치를 사 오는가 하면 무엇을 사와야 할지조차 잊어버리곤 했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성혼 선언을 한 뒤로 세 아이의 엄마가 될 때까지, 난 아내에게 칠흑처럼 어두운 고통만을 안겨주었다.”
-송석찬 저서 <하루를 새벽처럼 달리는 바람돌이> 중-
- 어떻게 호전은 좀 됐습니까.
“….”
말을 잇지 못하다, “남편을 잘 못 만난 탓이죠.”
- 그런 것 생각하면 후회 들지 않습니까. 괜히 민주화 투쟁했다고 말입니다.
“아니요.”
고개를 저었다.
“민주화가 안 됐으면 후회할지 모르지만, 6·10 민주항쟁을 통해서 6·29선언을 받아냈고 대통령직선제를 관철하지 않았습니까. 김영삼 문민정부, 김대중 국민의 정부가 나왔습니다. 대한민국이 민주화된 나라가 됐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후회 안 합니다. 물론 어려움을 겪고는 있지만, 이건 나의 역사적 흔적, 훈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보다 더한 경우도 많아요. 피워보지도 못한 채 그냥 간 분들도 있고요.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영광이지요.”
마무리 즈음에는 1995년 전국 최초로 지방자치단체에서 무상급식을 추진하게 된 일화가 전해졌다. 유성구청장 되기 전 지방선거에 임할 때였다. 부인이 아프니 그가 대신 초등학생 아이들의 도시락을 챙겼다.
“여느 때처럼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짓고는 도시락을 쌌는데 선거 운동하고 돌아와 보니 먹은 흔적 없이 그대로 있는 거예요. 안 되겠다 싶어, 큰 애에게 야단을 쳤어요. 그랬더니… ‘아빠 밥이 쉬어서 가져갈 수가 없었어요’ ….”
다시 목이 메어왔다.
“하물며 우리 아이들도 그런데 맞벌이 가정의 아이들은 어떻겠어요.”
구청장이 되면 유성구만이라도 복지 좋은 유럽처럼 학교 무상급식을 추진하겠다고 다짐했다. 당선돼 막상 실시하려니 예산 문제를 이유로 정부의 반대에 부닥쳤다. 하지만 뜻을 굽히지 않고 밀어붙였다. 언론에 떠들썩하게 날 정도로 당시의 초·중·고등학교 전체 대상의 무상급식 추진은 파격적이고도 큰 화제였다.
“의정활동에서는 주5일 근무제를 대표발의 한 것이 보람에 남습니다.” 덧붙여 강조하고 싶은지 이 점도 소개했다. 지금이야 5일제가 보편화돼 있지만, 그가 대표 발의할 때만 해도 실험적인 일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스스로가 자랑스러운지, 깊게 팬 주름을 따라 호탕한 웃음소리가 번져갔다.
- 주4일제 얘기도 나오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나는 찬성입니다. 일자리가 부족해지는 세상 아닙니까. 나눌 필요가 있어요.”
여담을 나눈 뒤 함께 건물 밖으로 나왔다. 배석해 있던 조찬옥 민추협 사무총장이 안내한 대로 다 같이 걸음을 옮겼다. 앉아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군대 안에서 구타를 당해 망가졌다는 그의 다리는 걸을 때마다 뒤뚱뒤뚱 뒤틀어졌다. 밥을 먹으려면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햇살도 비틀비틀 정오를 지나 향해갔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좌우명 : 꿈은 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