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정계은퇴 번복·3김 청산 요구 뚫고 대권 쥐어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자영 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다음 대선까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지를 두고선 물음표가 따라붙습니다. 당대표직을 수행하는 와중에도 몇 번이고 재판에 출석해야 하는 그의 사법리스크가 가장 큰 요인일 겁니다.
그는 대선 이후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로부터 인천 계양을 지역구를 물려받아 국회에 들어올 때부터 적잖은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다수의 국민이 그의 사법리스크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민주당 전당대회에 출마해 당대표가 되기까지도 당을 방탄으로 이용한다는 등 사당화 우려도 컸습니다. 불체포특권 포기 약속 철회, ‘멋지게 지면 무슨 소용’ 발언에서 시사한 선거제 약속 번복 논란 등은 이 대표에 대한 신뢰도에 흠집이 갈 만한 행보였습니다.
하지만 대안은 부재합니다. 이 대표는 차기 지도자를 묻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로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윤석열 정부 국정 지지율 30%대에 갇혀 야당에 빈틈을 내주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실책을 물어뜯기 바쁜 적대적 공생관계입니다. 이 대표는 여러 불안 요소를 안고서도 대권을 목표로 끝까지 나아갈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해 <시사오늘>은 다른 세세한 차이점들은 배제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마지막 대권 도전기에서 승리하기까지 상황, 대권을 향한 끈기를 되짚어 보려합니다. 지금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위상도 높지만 1990년대만 해도 DJ의 집권 가능성에 대해 같은 진영 인사들도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DJ, 정계은퇴 번복 “일시적 비판 받더라도 제1야당 마비 못보겠다”
동교동계 중심 국민회의 창당, 이기택 등 민주당 비판…여론 비우호적
비호남 ‘반김대중 정서’ 불구, 김종필·김대중과 연합…대권 거머쥐어
김대중은 1971년, 1987년, 1992년 대선에 출마해 모두 낙선했습니다. 14대 대선에서 패했을 땐 “오늘로써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시민이 되겠습니다. 이로써 40년의 파란 많았던 정치생활에 사실상 종말을 고한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라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1995년 7월 13일 DJ는 “지난 1992년 12월 19일 정계은퇴를 선언할 때만 해도 내가 다시 정치를 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치 재개는 어찌 됐든 국민과의 약속을 못 지키는 것이고 이에 대해 어떤 변명도 하지 않겠다”며 “내가 도덕적으로 깨끗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여건을 버리고 일시적으로 비판을 받더라도 국정 혼란과 마비된 제1야당 정당기능을 바라볼 수만은 없다”는 말로 정계 복귀를 선언했습니다.
1995년 6·27 지방선거 이후 DJ 신당도 가시화됐습니다. DJ는 당시 상황에 대해 후에 회고록에 “신당 창당 이전까지 나는 민주당의 개혁을 간곡히 요구했다. (…) 그러나 나의 이런 요청을 당 지도부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나는 참다운 야당의 존립을 위해서는 새로운 집을 지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기택 당시 민주당 총재는 김대중의 정계복귀와 신당 창당에 대해 “우리 정치 불행을 잉태하는 것”이라며 “특정인의 정치재개를 위해 당의 질서와 구조를 무시한 채 당을 때려 부수려는 것은 잘못”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했습니다.
여론은 신당에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그해 7월 14일 <한겨레> 기사를 보면 여론조사에서 절반 넘는 51.6%가 김대중 신당을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찬성한다’는 사람은 전체의 31.9%로 나타났으며 ‘잘 모르겠다’는 응답자가 16.5%에 달했다. 신당 창당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이유로 60.6% ‘김대중 씨가 정계은퇴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응답했으며, 이밖에 ‘지역감정 심화’(21.6%), ‘야권분열’(7.2%), ‘김대중 씨에 대한 개인적 반감’(6.2%) 등을 들었다.
반면 찬성하는 사람들은 ‘김대중 씨에 대한 지지’(41.1%), ‘현 상태로는 민주당의 향후 집권이 불가능하기에’(18.8%), ‘새로운 정당의 필요성’(17.7%), ‘계파 갈등 없는 당 결속 강화를 위해’(14.0%) 등을 이유로 꼽았다.
-1995년 7월 14일 자 <한겨레> ‘“신당반대” 51.6%’
DJ의 새정치국민회의는 15대 총선에서 79석을 얻으며 개헌저지선(100석)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총선 직후 <동아일보>가 여론조사기관 <동서조사연구소>와 실시해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김대중의 거취 관련, 응답자의 61.1%가 ‘김대중 총재가 은퇴해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거취에 대해 응답자들은 출신 지역별로 뚜렷한 시각차를 보였다. 대구·경북 출신의 78.5%와 부산·경남 출신 77.5%가 김 총재 은퇴에 긍정적인 반면, 호남권 출신은 30.7%만이 김 총재의 은퇴에 동의했다. 그 밖의 서울 출신 66.5%, 인천·경기 출신 68.8%, 강원 출신 56.2%, 충청 출신 72.1%, 이북 출신 56.9%가 김 총재 은퇴에 동의했다.
- 1996년 4월 13일 자 <동아일보> ‘고학력일수록 정계개편 긍정적’
1997년에도 여전했던 지역주의도 DJ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는 호남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은 반면, 대구·경북 등 영남 지역에선 그만큼 ‘반김대중 정서’도 강력했습니다. 유시민 작가는 저서 <97 대선 게임의 법칙>에서 ‘비호남 유권자들의 반김대중 정서로 DJ 당선이 어려우며, 제3후보가 필요하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습니다.
“과반수의 유권자들이 김대중 총재가 대통령이 되는 데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반 김대중 정서’의 기초는 비호남 유권자들의 ‘전라도 혐오증’과 과거 정권의 집요한 용공 조작이 남긴 편견, 그리고 이른바 ‘명문대’ 출신이 지배하는 언론의 차별 대우라는 것 역시 공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반김대중 정서가 이처럼 장기적인 치료를 요한 발병원인을 가진 현상이기 때문에 금년 12월까지는 사그라들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비록 여권이 분열한다고 할지라도 정권 교체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신한국당 후보가 누가되든, 비호남 지역의 ‘김대중 견제심리’를 자극해 ‘반 김대중 성향’을 가진 유권자의 ‘전략적 투표행위’를 유발함으로써 당선에 필요한 ‘여권 고정표+알파’를 끌어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 1997년 5월 20일 자 <한겨레> ‘유시민 “왜 제3후보인가” 문제는 반DJ정서…또 다른 선택 할 수밖에’
대선이 다가오자, 국민회의 내에서 작은 반란도 일어났습니다. 김상현 당시 국민회의 지도위의장이 ‘김대중 사당화’를 지적하고 정대철 당시 부총재가 이에 부응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황해도 출신 신한국당의 강력한 대선 주자 이회창은 ‘3김 청산’을 말하며 치고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김대중은 충청의 맹주 김종필(JP)과 단일화에 합의해 호남 ·충청 연합을 만들어냅니다. 신한국당을 나온 박태준도 자민련 총재로 DJ를 돕습니다. 반대로 여권은 분열했습니다. 신한국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회창에 패한 이인제가 당을 나와 국민신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것입니다. IMF 외환위기로 문민정부에 대한 지지도 낮아졌습니다.
정세운 시사평론가는 2일 통화에서 “DJ가 97년 대선 도전할 때 빨갱이 콤플렉스, 대권 4수생 등 긍정보다 부정적 이미지가 많았다. 거기에 은퇴를 번복하고 동교동계 중심의 국민회의 창당해 같은 진영 내 반발도 있었다”며 “현재 이재명 대표의 사법리스크로 인한 부정적 이미지나 친명 중심 사당화 논란 등 정치적 상황에 유사한 점이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재명 대표 사법리스크와 김대중의 레드 콤플렉스가 비교가능 한 것이냐’는 질문에 “사법 리스크는 아직 판결이 나지 않았고, 이미지가 ‘부정적’이라는 공통점에 주목한 것”이라며 “결국 정치라는 것은 끝에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여야간 대립이 날로 심화되는 상황입니다. 정치권에서 왜 저런 선택을 했을까 의문이 든 적 한 번쯤 있을겁니다. 이들의 선택은 과거 정치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학습효과 아닐까요. ‘김자영의 정치여행’은 현 정치 상황을 75년간의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를 비춰 해석해 봤습니다. 다음주 금요일에 찾아 뵙겠습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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