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방촉법, 2000년대 초반 발전소주변지역법
인센티브 제시했지만, 주민수용성 확보 번번이 ‘좌초’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권현정 기자]
21대 국회의 마지막 과제로 연일 ‘고준위 특별법’이 입에 오르내린다. 현재는 원전 내 임시저장시설에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사용후핵연료, 이하 고준위 방폐물)을 보관하고 있는데, 2030년이면 임시저장시설의 용량이 한빛원전을 시작으로 차례로 포화돼서다.
원전 내 임시저장시설을 추가 건설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미 건식저장시설인 맥스터(MACSTOR)의 월성 원전 내 추가 설치를 두고 한 차례 지역과 정부 간, 주민과 주민 간 갈등이 불거진 바 있다. 고리 원전이 자리한 울산에서도 최근 한국수력원자력의 건식저장시설 추진 사실이 알려지자 반대 결의가 나오는 등 원전 소재 지역의 반발이 커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정부와 원전 관련 산학연 등은 그 타개책을 특별법에서 찾고 있다. 법이 통과되면 유치 지역 지원 법적 근거 마련 등에 힘입어 방폐장 부지 선정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고 있는 것.
다만, 의문은 남는다. 비슷한 취지의 법이 있었지만 작동하지 않았던 전사가 있어서다.
방폐장 유치 지역 지원 근거, 단독법에서 하위법령으로
9일 국가법령정보센터 등에 따르면, 국회는 지난 1994년 1월 이미 방폐장 유치 지역의 지원을 적시한 방사성폐기물관리사업의촉진및시설주변지역의지원에관한법률(방촉법)을 제정했다.
해당 법(시행령 포함)은 유치 지역에 매년 30억~50억 원을 지원하고, 이를 위해 지원사업심의지역위원회 등을 둘 것을 정한다. 과학기술처(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장기 지원사업계획을 주민 의견을 수용해 정하고 매년 다음 해 상세계획을 정해야 한다고도 적시했다.
당시 주민투표 대상이 아니었던 원전 유치 사업과 달리, 시설지구를 지정하기 전 개발계획에 대해 공청회를 열고 주민 및 관계 전문가 등의 의견을 듣고 반영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것도 특징이다.
당시 정부는 유치 지역에 대한 지원과 민주적 의견 수렴절차 등을 법안으로 정한 만큼, 주민수용성 확보를 통해 주민 반발 없이 사업 추진이 가능할 것으로 자신했다.
부지선정 실무기구인 방사성폐기물 관리사업기획단 한영성 단장은 15일 “원자력환경관리센터가 추천한 10여 곳의 후보지 중에서 방사성폐기물관리사업추진위원회 심사결과에 따라 올해 안에 최종후보지 한 곳을 전택해 개발계획을 공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중략) 한 단장은 “충실한 지역개발 계획을 제시하면 주민 반발은 없을 것으로 본다”며 앞으로 개발계획이 공고된 후의 폐기물 관리시설 지구선정 절차는 신문공고와 1개월간의 주민열람, 지역협의회와의 개발계획 협의, 지역주민들이 참여하는 공청회 개최, 원자력위원회 심의가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1994년 11월 17일자 <조선일보> “방사성 폐기물 후보지 연내 결정”
다만,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당해 진행된 영일, 양산, 울진 등 3개 지역 대상 4차 사업(1993년~1994년)과 1994년~1995년 인천 굴업도 대상 5차 사업 모두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쳐 좌초됐다. 주민들은 정부의 설명회장 앞에서 농성했고, 인천 시장 후보들은 여야 가리지 않고 후보지 재선정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이날 예정된 영일지역 설명회가 주민들의 저지로 무산됨에 따라 이번 주말로 계획된 강원 고성 양양, 전남 장흥, 충남 태안 등 나머지 후보지역의 설명회가 불투명해졌다. 경북 영일·청하 핵폐기물 반대대책위 소속 주민 1백50여 명이 이날 오전 영일군청을 방문, 기획단의 설명회 개최예정에 항의하며 1시간여 동안 농성을 벌이는 등 거세게 반대했다.
1994년 12월 20일 <동아일보> “핵폐기물 처분장 연내 선정 어려움”
특히, 인천의 경우 활성단층 발견으로 지역에 상처만 남기고 사업이 최종 무산되고 말았다.
‘첫술에 배부르랴’는 말을 할 법도 하지만, 이후에도 정부의 방폐장 유치 사업은 여러 차례 좌초됐다.
방촉법은 1997년 1월 단독법으로서는 폐기됐지만, 각 항목은 발전소주변지역지원에관한법률(발전소주변지역법)로 흡수됐다. 발전소주변지역법엔 2005년 개정 전까지 법의 대상이 원전뿐 아니라 방폐장 주변지역이기도 하다는 항목이 줄곧 남아있었다.
하지만, 5차 사업 이후 2005년까지 정부가 추진한 6차(2000년~2001년), 7차(2003년~2004년) 역시 주민수용성 확보에 실패하며 중단됐다. 6차는 신청한 지방자치단체가 없어서, 7차는 주민 반대가 그 이유였다.
중·저준위 성공도 “유치 지역엔 고준위 안 들어와” 약속 영향
발전소주변지역법에서 방폐장 주변 지역 지원의 근거 조항이 사라진 지난 2005년 이후에도 해당 조항은 살아남았다. 당해 신설된 중·저준위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의 유치지역지원에 관한 특별법(이하 중저준위 특별법)에서다.
정부가 한 지역에 중·저준위 방폐장과 고준위 방폐장을 모두 건설한다는 기존 기조를 포기하고 중·저준위부터 유치한다며 한발 물러난 해인 만큼, 대상은 전체 방폐장에서 중·저준위 방폐장으로 줄어들었지만, 한 발 물러났다가 두 발 나선다는 정부의 계산은 유효했다.
당해 진행된 9차 사업에 이르러 정부는 중저준위 방폐장을 경주에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이전 사례와는 달리 경북지역 내 여러 지역이 조사를 신청했기 때문에 주민투표 시 찬성률이 높은 지역을 ‘선정’하는 권한이 정부에 생겼다는 점도 성과였다.
다만, 이때 확보된 주민수용성으로 방폐물에 대한 수용성 확보 가능성을 넘겨다보는 데는 한계가 있단 목소리가 나온다. 중저준위특별법은 중저준위 방폐장 유치 지역엔 고준위 방폐장을 유치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기에, 고준위 방폐장을 피하는 선택을 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당시 가장 높은 찬성률(89.5%)을 보인 경주시에는 월성원전이 위치하고 있다. 2005년 당시 월성원전 내 고준위 방폐물 보유 비율은 전국의 51.6%에 육박했다. 경주시가 한수원 이전 등 경제적 지원에 대한 기대와 함께 고준위 방폐장 유치를 최종적으로 막기 위해 중저준위를 유치했단 평이 나오는 이유다.
지난 2005년 방폐장 부지 확정 후 백상승 전 경주시장의 발언을 담은 기사 역시 이 같은 분석에 힘을 싣는다.
그는 “고준위 핵폐기물을 가져가겠다는 곳이 있다면 신월성원전 1, 2호기 특별지원금 697억 원의 몇 배라도 얹어줄 수 있다”며 원전 소재지가 방폐장을 유치한 것은 당연하다고 강조했다. (중략) 그는 “중저준위 방폐장이 들어서는 곳에는 고준위폐기물처리장은 건설하지 못하도록 해 월성 원전의 고준위폐기물을 처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점도 큰 성과”라고 강조했다.
2005년 11월 3일자 <한국일보> 이슈추적/방폐장 부지 경주확정
N번째 고준위특별법…이번엔 다를까? ②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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