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놀라운 뉴스가 전해졌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DJ) 3남 김홍걸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서울시 마포구 동교동에 위치한 DJ 사저를 100억 원에 매각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김 전 의원은 “거액의 상속세 문제로 세무서의 독촉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작년에 매각을 결정했다”며 “어디까지나 사적인 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정치권은 이를 ‘사적인 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전병헌 새로운미래 대표는 8월 5일 DJ 사저 앞에서 현장 책임위원회의를 열고 “DJ 탄생 100년이자 서거 15주기에 DJ와 이희호 여사가 37년간 머무른 사저가 개인에게 100억 원에 매각된 사실은 온 국민에게 충격”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김 전 의원이 DJ 정신과 역사적 유산을 사유화해 상속세 부담을 이유로 민간인에 팔아넘긴 것은 국민 지탄을 받을 만행”이라며 “사저 매각을 백지화할 것을 요청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 역시 “DJ 사저가 팔려서 카페가 된다는 것은 황당한 느낌”이라면서 정치권이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라고 강조했습니다.
법적으로 보면 어디까지나 개인 재산인 DJ 사저가 정치권의 문제로 옮겨간 건 이 공간이 갖는 상징성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정치적 공간’ 하면 국회 또는 당사를 떠올리지만, 엄혹했던 군사독재시절에는 정치 지도자의 사저가 중요한 무대였습니다. 삼엄한 감시를 뚫고 정치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내밀한 공간이 필요했고, 사저는 그 조건에 부합하는 공간이었죠.
1979년부터 동양통신 정치부 기자로 일하며 김영삼 전 대통령(YS)을 취재했던 이병도 <시사오늘> 주필은 “기자들은 상도동(YS 사저)으로 바로 출근했다. 어떤 논의를 하기 위해서 오는 건지, 앞으로 민주화 투쟁 계획은 어떻게 잡고 있는지를 염두에 두고 취재활동을 했다”면서 “민주화 운동을 하는 정치인들이나 재야인사들과 형제처럼 친해지기도 했다”고 회고했습니다.
동교동에 있는 DJ 사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는 고(故) 이희호 여사 추도식에서 “동교동에서 아침마다 당직자들의 따뜻한 밥과 맛있는 반찬을 챙겨주신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습니다. YS 사저와 마찬가지로 동교동 역시 민주화 운동가들의 ‘아지트’였고, 목숨을 걸고 투쟁하던 이들을 가족으로 묶어내는 장소였습니다.
동교동은 교과서에 남을 만한 역사적 사건들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제7대 대통령선거를 석 달여 앞둔 1971년 1월 27일. DJ가 미국 출장으로 집을 비운 사이 동교동 사저 앞마당에서 폭발물이 터지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범인도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호사가들은 이 일을 두고 여러 추측을 쏟아냈습니다. 이 사건은 영화 <킹메이커>의 배경이 되기도 했죠.
27일 밤 9시 38분쯤 신민당 대통령후보 김대중 씨 집(서울 마포구 동교동 178의1) 마당에서 종류미상의 폭발물이 터졌다. 김 후보는 마침 지난 25일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도미 중이었으며 집에 있던 가족들도 다치지 않았다. 폭발물은 사제로 요란한 폭음만 내었을 뿐 유리 한 장 깨어지지 않은 점에서 살상용이 아닌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폭발물은 정문에서 15m쯤 안쪽으로 떨어진 현관 입구 시멘트 바닥에서 터졌는데 사방 6m까지 폭발물 찌꺼기가 날았다. 그러나 폭음은 90m 떨어진 곳에서까지 들을 수 있었다.
폭발물이 밖에서 던져진 것인지, 집안에 장치했던 것인지는 28일 새벽 4시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외부사람으로는 처음으로 폭음을 듣고 경찰에 신고한 동교동 파출소 소속 방범대원 조기환 씨는 김 씨 집에서 30m쯤 떨어진 초소에 전등을 내걸 때 듣고 달려왔으나 범인 같은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 씨 집 뒷담에 있는 가로등은 3일 전부터 고장이 나 있었다. 대문은 닫혀있을 뿐 빗장이 걸려 있지 않았다.1971년 1월 28일 <조선일보> 김대중 후보 집 마당서 폭발물 터져
DJ가 ‘민주화 투사’로서의 이미지를 얻게 된 곳도 DJ 사저였습니다. 유신 체제 선포 이후 해외에서 반(反) 유신 활동을 전개하던 DJ는 1973년 8월 8일 백주에 일본 도쿄 그랜드팰리스호텔에서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를 당합니다. 다행히 DJ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고 납치 129시간 만인 8월 13일 밤 동교동 자택 근처에서 풀려나게 되는데요.
다음 날인 8월 14일, 동교동 자택에서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는 그의 입술은 터져 있었고 손발이 묶였던 자리에는 멍자국이 선명했습니다. 이 사건은 국민들에게 박정희 정권이 DJ를 견제하고 핍박한다는 인식을 심어줬고, DJ 역시 앞장서서 박정희 정권과 싸우는 민주화 투사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 71년 7대 대통령선거 때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으며 전국회의원인 김대중 씨가 지난 8일 오후 일본 동경시내 그랜드팔레스 호텔에서 피랍된 지 만 5일 9시간 만인 13일 밤 12시20분쯤 서울 마포구 동교동 718의1 자택으로 돌아왔다. (중략) 김 씨는 이날 “8일 오후 5, 6명의 건장한 청년들에게 납치, 온몸이 묶인 채로 자동차로 5, 6시간 달려 오사카 부근에서 모터보트에 실려 큰 배에 옮겨진 다음 10여 시간 해상으로 끌려갔다가 천사일생으로 한국 해안에 회항, 11일 오후 7, 8시께 한국에 상륙, 초가와 양옥에 감금돼 있던 끝에 13일 밤 12시20분 쯤 붕대로 눈을 가리운 채 집 근방에 내려주어 돌아왔다”고 그동안의 경위를 밝히고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죽음 직전에서도 예수님께 꾸준히 기도하고 국내의 동포들과 일본을 비롯한 우방의 인사들이 걱정해준 덕택”이라고 말했다. (중략) 김 씨는 이날 밤 12시20분쯤 집 근처인 동교동사무소 앞에서 ‘크라운’ 같은 차에 실려 눈을 가리운 채 내려 청년들의 지시대로 삼분 동안 뒤로 돌아서 있다가 걸어서 집에 당도, 세 번 벨을 누르고 집안에 들어섰다고 말하면서 웃는 얼굴로 “나는 하도 겁나는 일을 많이 당해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놀란 가족들을 위로했다고 밝혔다.
1973년 8월 14일 <동아일보> 동경서 납치한 자칭 구국대원 김대중 씨 서울 자택에 데려다 놔
이뿐만 아니라 박정희·전두환 두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수차례 가택연금을 당했던 DJ가 은밀하게 민주화 투쟁을 전개했던 장소도 바로 DJ 사저였습니다. DJ 사저는 단순히 ‘DJ가 살았던 집’이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화의 발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는 역사적 현장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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