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진석 기자)
이 이야기는 영남대 전신인 대구대가 어째서 삼성그룹 창업자 故 이병철 회장에게 넘어갔는지,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 故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옮겨가게 됐는지, 그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뒷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히 대구대 설립자인 경주 최씨 부잣집 후손인 故 최준 선생이 집안의 가보인 단계연을 어떤 이유로 이병철 회장에게 줄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이런 노력 끝에도 눈앞에서 대구대를 뺏기게 된 사연 등 그간 일부 언론에 알려졌으나 소상히 나오지 않은 대목에 관해 풀어냈다.
이곳의 화자는 경주 최씨 중앙종친회 회장이자 성균관 고문인 최염(80)씨로 그는 대구대 설립자 최준 선생의 손자이다. 최염씨와의 인터뷰는 지난 대선 기간 서울 종로 근처 종친회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종합 기사 겸 1차 기사는 2012년 12월 18일 <시사오늘>에서 게재된 바 있다.
영남대 환수를 통한 정상화 시민대책위는 24일 성명서를 내고 "박 대통령이 진정 영남학원의 발전을 원한다면 올바른 정체성과 소유구조 위에 학교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거듭 당부했다.
또 “영남대 총장인 노석균 총장은 취임사에서 영남대 설립자를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 명시했지만 진정 기억해야 할 존재는 참된 민족사학, 애국사학 건설을 위해 전 재산을 희사한 대구대와 청구대의 설립자”라고 지적했다.
유시신대 장물에 대한 정체성 확립 요구가 박 대통령 취임 후 재차 불거지는 가운데, 영남내 전신인 대구대 설립자 후손인 최염 씨의 증언을 통해 그 시절 장물 사건에 대해 들어봤다.
백산과 함께 백산무역 차려
임시정부 자금줄 대…
최염 씨 말로는 그의 할아버지 최준 선생은 일제강점과 삼일운동 이후 대한 광복회, 국권 회복 단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다. 1919년 5월 1일에는 독립운동자금을 공급하기 위해 만석의 재산을 바쳐 (주)백산무역을 설립했다.
백산이라는 회사명은 독립운동가 안희재 선생의 호에서 따온 이름이다. 1914년 백산 상회를 설립했던 안 백산은 삼일운동 이후 1918년 8월경 최준 선생을 찾아가 독립운동 자금으로 쓸 무역회사를 설립, 수출하고 남는 돈으로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자고 제안하게 된다.
"할아버지는 고심 끝에 백산과 얘기하면서 '내 재산은 우리 대(代)에서 끝내고 이것을 활용해서 무역회사 차리고 독립운동 하자'고 약속했지요. 독립운동을 돕던 부자들은 재산을 지키기가 어렵던 때였어요."
당시 최준 선생은 만석 부자로 불렸다. 그러나 제아무리 경주 최부잣집이라고 하나, 회사를 설립하려니 돈이 이만저만 드는 게 아니었다. 하는 수없이 산업은행 전신인 조선식산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식산은행은 1918년 10월 산업개발을 목적으로 종래의 농공은행을 통합해 만들어진 일제강점기의 특수은행이다.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식산은행에서는 회사가 파산 날 경우를 대비해 할아버지에게 담보를 요구했어요. 할아버지가 만석꾼이니까 개인 보증을 하라는 거였지요. 할아버지는 전 재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어요."
왜경의 눈 피하고자
복면 쓴 강도에 뺏긴 연극하기도
처음에는 그럭저럭 사업을 꾸려나갔다. 독립운동 자금 조달 방법은 최준 선생이 회사를 운영해 안 백산을 통해 임시정부 자금을 대는 방식을 썼다.
“임시 정부와 연락 관계를 취하던 할아버지는 왜 경(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고자 경주 남산에 자리 잡고 있던 별장을 사찰로 만들었지요. 그런 뒤 부처님 불상 밑에 요즘 말하는 무인 포스트를 설치해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고는 했습니다.”
임정과 연락하는 일은 목숨을 내거는 일만큼이나 어렵고 긴장되는 일이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안 백산과 최준 선생에 대한 재미난 일화도 있다.
임정운영자금의 60%의 자금을 책임졌다고 전해진 백산은 위험한 일을 하는 만큼 여러 계책을 써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했다. 그 일환으로 하루는 최준 선생과의 관계가 들통 나지 않도록 왜경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복면을 쓴 강도로 위장, 최준 선생의 집에 침입해 돈을 요구하는 것처럼 꾸민 일도 있었다.
3만 석 부도액…조선 식산은행에서 관리
이 과정에서 백산무역은 십여 년 운영 끝에 파산하게 된다. 신용을 얻어서 하다가 돈을 떼이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1928년 문을 닫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가 무한책임을 져야 하자 은행에서 전부 압류가 들어왔지요. 부동산 압류부터 집안까지 곳곳에 딱지 붙는 등 완전히 망했던 거죠. 백산무역 회사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우리 가족은 흰 버선이 새까맣게 돼버렸습니다. "
부도액은 당시 기준으로 130만 엔이었다. 곡식으로 치면 어느 정도 되느냐는 질문에 최염 씨는 "3만 석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말했다.
곡식 3만 석의 채무를 지게 된 최준 선생의 집과 재산은 이후부터 식산은행의 신탁 관리를 받게 된다.
"생활비는 은행에서 주고, 저희가 수매하는 소작료는 은행에서 받고 그랬습니다. 식산은행이 이런 방식으로 신탁관리 하면서, 할아버지는 원금에 대한 이자를 일부씩 갚아 나간 셈이죠. 그렇게 수수료 떼고 하니까 원래 있던 1만 석에 가까운 재산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김구 선생이 친일 논란 벗겨줘
백산의 낡은 장부 읽고 대성통곡
시간은 흘렀고, 다행히 해방됐다. 조선식산은행이 물러나자 최준 선생 역시 5천 여석 정도는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광복이 되면서 최준 선생을 친일파로 몰아가는 일부 과격파들이 생겨났다. 백산무역이 파산되고 조선식산은행 관리를 받게 되면서 이런 오해가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최준 선생에 대한 친일 논란은 얼마 안 가 불식되게 된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이자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던 백범 김구 선생이 최준 선생에 대한 일각의 오해를 말끔히 씻어주는 계기 때문이다.
이때 김구 선생은 해방을 맞아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본관 자리에 있던 경교장이라는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최창학이라는 사람이 광산을 해서 돈을 벌어서 만든 별장인데, 그곳을 김구 선생의 거처로 쓴 것이다. 그때는 김구 선생을 만나려고 많은 국민이 줄을 서던 때였다.
"어느 날인가, 김구 선생이 사람을 시켜 저희 할아버지를 모셔오라고 하신 게 기억납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최준 선생을 초청한 김구 선생은 "최 선생이 보내준 돈 때문에 굉장한 도움을 받았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러면서 김구 선생이 낡은 장부 하나를 보여주신 거예요."
액수별로 빼곡하게 기록된 장부는 최준 선생의 동지였던 백산 선생이 기록한 거였다. 최준 선생으로부터 받은 물건값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직하게 적혀 있는 것이었다. 한장 한장 넘기던 최준 선생은 그만 자신이 전달해준 돈이 십 원 한 장 빠짐없이 임시정부에 들어갔음을 알고는 그만 울음을 쏟아냈다고 한다.
"할아버지 생각에는 당시 일본군 눈을 피하고자 여러 변장을 했던 백산이 개인 돈으로 조금은 쓰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대요. 그런데 장부에 기록된 걸 보니 그게 아니었던 거예요."
이미 백산은 일본 강점기 때 구속된 후 석방되기는 했지만, 해방이 오는 걸 못 본 채 생을 마감한 뒤였다.
최준 선생은 백산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 이런저런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눈물을 참지 못했다.
"모든 걸 알게 된 할아버지는 경교장 문을 열고 대성통곡을 하셨어요. '내가 백산을 오해했다', '내가 당신을 오해한 것이 정말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면서요…. 그렇게 김구 선생하고 한참을 같이 붙들고 울었다고 해요."
이 일화는 임시정부 36호에 나와 있다. 어찌 됐던 최준 선생은 김구 선생을 만나면서 친일 누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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