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세상을 바꿔서 모든 사람들이 자아실현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 나의 이런 꿈은 나만의 꿈이 아니다. 모든 국민이 이루고자 하는 꿈이기 때문에 나는 이 꿈을 이루지 아니하고는 죽을 수 없다. 이 꿈을 이루기 전에는 늙지도 죽지도 않을 것이다.”
영원한 재야의 대부 故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의 생전 육성 어록이다. <장기표의 길> 동영상 중에서 나오는 대목이다.
그랬던 모습을 기억하기라도 하듯 오랜 세월 민주화운동을 함께 했던 김정남 전 청와대 사회교육문화수석은 “장기표가 가다니, 죽지 않는다더니…” 애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25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층에서는 장기표 원장을 추모하는 영결식이 사회장을 맡은 민주화운동기념사회 주최로 열렸다.
“장기표가 가다니, 죽지 않는다더니…”
김정남 전 수석은 “지난 8월 초저녁 만났을 때 당신은(장기표) 하고 싶은 대로 살아왔으니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두렵지 않노라 의연했다. 그렇지만 열심히 살아보겠다, 웃으며 헤어진 것이 당신의 마지막이었다”며 조사를 읊어나가는 중 슬퍼 목이 잠겼다. 그는 애써 추스르며 “기적까지는 아니더라도 장기표가, 장기표가 그렇게 쉽게 갈 사람은 아니라도 나는 믿었다. 도저히 믿기 어렵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당신만큼 이 나라 민족을 뜨겁게 애타게 사랑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이종률 전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사랑의 정치를 전면에 내세우며 첫 총선에 데뷔했을 때 장기표를 몰라주는 민중을 원망하며 삭발을 했던 나를 바라보던 선생의 애달픈 눈빛.…“을 떠올리며 추모시를 낭송해갔다.
“교도소에 걸린 노을 진 마을을 그린 목가적 풍경이 피카소보다 훨씬 좋다던 선생의 순수, 신화철 화백이 활동비에 보태라고 준 백범 김구 그림을 족히 1000만 원 하는 그 그림을 누가 마음에 들어 달란다고 달랑 30만 원에 줘버린 선생의 순진, 그 순수와 순진으로 빚어낸 민주시장주의정치 화두, 여전히 성성하십니까…다섯 번 징역, 9년을 넘게 살고 그보다 많은 세월 수배자로 살았던 이 나라 최장기 수배자, 민주화운동을 훈장처럼 살고도 보상금을 신청하지 않았던 마지막 재야…”
임현재 전태일재단 이사장 권한대행은 몇 해 전 정치 노선이 달라졌다고 느껴 장 원장을 만났을 때 쌀쌀맞게 대했을 때만 생각하면 착잡해진다며 후회했다. 그러면서 추도사를 통해 “장기표 형님은 전태일 동지의 1호 대학생 친구였다. 분신했을 때 가장 먼저 달려온 대학생이었다. 지금은 그 뒤를 따르는 수많은 대학생들이 생겨났다”며 “살아서는 만나지 못했던 노동자 친구 전태일 곁으로, 전태일이 못다 이룬 꿈을 함께 이뤄갔던 동지 이소선 어머니 곁으로 가신 장기표 형님, 그곳에서는 부디 편히 쉬시길 빌겠다”고 추모했다.
묵묵히 사회장을 지켜온 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회 이사장은 추모객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했고, 장 원장의 부인인 조무하 여사도 유족을 대표해 “비록 어려웠지만 이분(남편)이 뭔가를 하면 그것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이 있는데 세상 많은 분들이 도와줬다”며 고마워했다. 그 외 장 원장의 서울대 민주화운동 후배인 정태윤 전 민중당 간부가 약력 소개를, 가수 손현숙 씨가 추모곡을 불렀다. 조용한 가운데 분화와 헌화 행렬이 이어졌다.
민주당 인사 중에는 김부겸 전 총리가 참석해 야권의 면을 세웠다. 굵직한 노동운동사를 함께 써내려갔던 김문수 노동부 장관은 영결식이 끝난 뒤에도 오래 자리를 지켰다. 민주화운동 후배인 박계동 김성식 김용태 전 의원을 비롯해 박성민 정치평론가의 모습도 보였다.
“장기표 꿈 계승…”
김용태 전 의원 경우 그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 장 선생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 전 의원은 “선생님은 가시는 모습도 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자세가 뭔지에 대해 화두를 던져주셨다. 인간적으로 너무 존경했고, 너무너무 그립다”고 말했다. 잠시 질문할 기회가 주어졌다.
- 처음 어떻게 인연이 된 건지?
“장 선생님이 민중당 후보로 출마하셨을 때 대학생 자원봉사자로 인연을 맺었다.(서울대 선후배 사이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장 선생님의 수양딸이었던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결혼식 때 주례도 서주셨다. 장 선생님 가족들과도 각별하게 지냈다.”
- 어떤 점을 가장 존경했나.
“장 선생님이 가장 위대한 것은 본인의 과오를 솔직하게 인정하신다는 거다. 과거 재야에서 민주화운동을 했던 분들은 근본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꿈꿨던 사람들이다. 근데 시대가 변화면서 동부권 공산주의 국가들이 무너졌고 그것이 헛된 꿈이라는 게 드러났다. 그때 장 선생님은 그것에 대해 과감하게 인정을 하셨다. 사회 변혁 운동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근데 그 와중에 잘못된 게 있으면 인정을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릇된 사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솔직하게 성찰했다. 나는 그런 분을 처음 봤다. 근본적으로 그릇의 차이가 다른 분이다.“
- 훗날 어떤 인물로 기억되길 바라나.
“가장 중요한 게 일단은 인격자라는 점이다. 사람에 대한 예를 잃지 않았던 분이다. 세상에 대한 충만한 낙관을 가진 분, 사람들을 배려하는 분, 그런 훌륭한 인격자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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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의원은 양천을 지역구일 당시 민원인의 날을 정해 주민 고충을 직접 듣고 해결하는 것으로 유명해 3선까지 된 바 있다. 하지만 당 사무총장을 맡을 당시 헌신을 위해 불출마를 하게 된 이후부터 연거푸 험지, 또 험지에 출마해 고배를 마시고 있다.
아쉽지 않느냐는 질문에 “재도약을 위한 담금질 중이라고 생각한다”며 “선생님이 꿈꿨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저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장 원장은 마지막 운동으로 특권 없는 세상을 위해 달려갔다. 그를 돕고자 모금운동에 나섰다고 알려진 홍철기TV의 홍철기 대표는 늦게까지 조문객을 맞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대장동 의혹 관련해 몸통이라며 공개 비판에 나섰다 함께 재판에 넘겨지기도 했던 깨시연TV의 이민구 대표는 장 원장 말년 동지다. 고인을 배웅하는 동안 남은 투쟁을 앞두고 심기일전하듯 못내 무거운 표정을 풀지 못했다.
신문명정책연구원의 안상조 실장은 오랜 세월 한날 빠짐없이 장 원장을 보필했다. 김용태 전 의원이 ‘장기표 선생님은 참으로 인격적인 분’이라고 한 말이 인상에 남았는데 안 실장 또한 그 스승의 그 제자 같다는 평가다. 고인에 대해 묻자 그는 “선생님” 하고 부르는 순간부터 목이 멨다.
“지난 35년간 선생님과 함께 보람되고 자랑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선생님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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