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유경민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윤 대통령의 이번 계엄 선포는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이후 45년 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13번째 비상계엄이었는데요. 역대 주요 계엄령 선포 순간들을 정리해 봤습니다.
계엄은 경비계엄과 비상계엄으로 구분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 시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되어 행정 및 사법 기능의 수행이 현저히 곤란한 경우에 선포하고, 경비계엄은 사회질서가 교란돼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는 경우 선포합니다.
헌정사 첫 계엄령은 정부 수립 두 달여 뒤인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사건 발생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습니다. 조선국방경비대 14연대가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 충돌이 생겼는데 이를 막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여수·순천 일대에서 반란의 진압 과정 속에서 반란군과 진압군에 의해 민간인들이 무차별적 학살을 당했습니다.
이후 1948년 11월 17일 여·순 사건이 원인이기도 한 제주 4·3 사건과 관련해서 제주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됐습니다. 6·25 전쟁의 발발로 인해 2차례 비상계엄이 선포됐습니다. 1960년 학생들이 중심이 돼 부정선거를 무효로 하자며 일으킨 4·19 혁명을 막을 때도 계엄령이 악용되기도 했습니다.
1960년 3월 15일, 대통령 부정선거 시위에서 실종된 김주열 열사가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에 눈을 관통당한 채 발견됐습니다. 김주열 열사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습니다. 4월 19일 고려대학교 학생들과 여러 대학교 학생 수천 명이 시위에 참여하고 정오가 되자 순식간에 10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후 경무대 앞 경찰의 발포가 시작되고 전역에서 1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오후 3시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계엄군은 중립을 지켰습니다. 결국 4월 26일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발표했습니다.
이후 박정희 소장을 필두로 한 세력이 제2공화국을 무너뜨린 61년 5월 1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5·16 군사 정변으로 권력을 잡고 12일 동안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습니다. 이후 경비계엄으로 이어져 1962년 12월 5일 해제하면서 역사상 최장기간의 계엄으로 기록됐습니다. 1964년에는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대응하기 위해 오후 8시 서울에 계엄령과 휴교령을 내리고 4개 사단병력을 투입해 시위를 진압했습니다.
1972년 10월 17일, 겨울공화국의 시작. 박정희 정권은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박 전 대통령은 통일 주체 국민 회의를 통해 대통령을 뽑는 간선제를 채택해 박정희 유신 정부가 탄생했습니다.
1979년 10월, 부마 민주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습니다. 당시 부산과 마산에서 대학생과 시민들이 공화당의 유신독재를 반대해 시위를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은 1979년 8월 YH무역 사건이 도화선입니다.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 들어가 부당 폐업을 하며 농성을 벌이다 경찰이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22세 여성 노동자가 사망합니다. 당시 김영삼 총재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박정희의 독재적 유신 체제를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그 결과 김영삼 총재직 정지, 의원직 박탈을 당합니다. 또한 소속 국회의원 66명 전원 사퇴 제출 등의 사건이 발생하고 10월 15일 민주 선언문이 배포되고 반정부 시위가 전개됐습니다.
다음 비상계엄은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직후 이뤄졌습니다. 이 계엄은 1980년 5월 17일 전두환·노태우 등 이른바 신군부 세력에 의해 전국적으로 확대됐습니다. 이후 전국 곳곳에서 신군부를 규탄하는 집회와 시위가 벌어졌고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번졌습니다. 이 비상계엄은 1981년 1월 24일까지 유지됐습니다.
이후 박근혜 정부 당시, 기무사와는 별개로 청와대가 자체적으로 작성한 계엄령 문건이 공개됐지만 실제로는 선포되지 않았습니다. 이번 계엄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 13번째이자 6시간 만에 막을 내린 초유의 비상계엄으로 기록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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