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탄핵소추안 기각…“법 위반 했지만 파면할 정도 아냐”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유경민 기자]
탄핵소추안을 의결한 국회는 오후 3시 탄핵소추 결의서 정본을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 그러나 여론은 야권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면서 탄핵안 가결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거세졌다. 전국 각지에서는 ‘탄핵 반대’를 외치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500개 시민·민중·통일운동 단체는 ‘탄핵무효·부패정치 척결을 위한 범국민행동’을 결성했다.
이런 가운데 제17대 총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열린우리당은 탄핵 정국의 후폭풍을 등에 업고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과반을 획득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하지만 정동영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은 2004년 3월 26일,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아요. 그분들이 미래를 결정할 필요는 없단 말이에요. 어쩌면 곧 무대에서 퇴장하실 분들이니까 그분들은 집에서 쉬셔도 되고”라는 ‘노인폄하’ 발언으로 민심의 거센 역풍을 맞는다.
이와 함께 ‘박근혜 효과’로 영남권과 수도권의 한나라당 지지층이 재결집하면서 열린우리당은 위기에 직면했다. 결국 열린우리당은 변수를 뒤집기 위해 ‘노인 폄하 정국’을 ‘탄핵 정국’으로 되돌리려는 국면 전환 전략을 세웠다.
정동영 의장은 “실제 발표되지 않았지만 몇몇 언론사의 여론조사를 보면 제1당이 바뀔 수도 있는 오차범위에 들어와 있다”며 “자칫 쿠데타 세력이 다시 원내 1당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호소했다.
또 “탄핵이 국민에 대한 배신이고 역사에 대한 반란이라면 탄핵에 사과와 반성하지 않는 의원을 다시 의정 단상에 돌려보낼 수는 없다”며 ‘탄핵심판론’을 정면에 내세웠다. 열린우리당 역시 노인 폄하 발언에 대해서는 거듭 사과하면서도 “이로 인해 ‘탄핵심판’이라는 이번 총선의 본질이 흐려져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로써 제17대 총선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대한 민심의 흐름을 가늠하는 선거로 흘러가게 된다. 바꿔 말하면, 총선 결과가 탄핵 인용 여부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전문가들도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자’인 국민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헌법재판소의 결정도 달라질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
2004년 4월 15일. 탄핵 정국에서 치러진 제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152석을 획득하며 과반을 얻는 데 성공했다. 창당 5개월여 만에, 지방조직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열린 총선을 대승으로 이끈 것이다. 이로써 불과 47석이었던 열린우리당은 과반이 넘는 152석을 차지하며 원내 제1당이 됐다.
총선이 열린우리당의 대승으로 끝나자, 대통령 소송대리인단 측은 총선에서 확인된 민심을 등에 업고 재판부와 소추위원 측을 압박했다. 대리인단 간사인 문재인 변호사는 총선 이후 첫 기자브리핑에서 “총선 결과로 대통령이 재신임된 것으로 봐야 되지 않겠냐”며 “정치권 공히 주장하는 상생의 정치를 위해서라도 법정 공방을 끝까지 끌고 가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의 법 위반 행위가 헌법 수호의 관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없고 파면 결정을 정당화하는 사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주문, 이 사건 심판청구를 기각한다.”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기각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63일 만에 업무에 복귀했다.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수를 확보한 것은 탄핵소추의 부당성이 확인됐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헌법재판소가 국민의 뜻을 받아들인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5월 15일 업무에 복귀한 노무현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비록 탄핵에 이르는 사유가 아니었다 할지라도 정치적, 도의적 책임까지 모두 벗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임기를 마치는 그날까지 저의 이 허물을 결코 잊지 않고 항상 자신을 경계하는 회초리로 간직하고 가겠다. 더 열심히 노력해서 국민에게 진 빚을 갚아나가겠다”고 밝혔다. 이렇게 노무현 대통령은 ‘초미니 여당’에서 과반 의석을 지닌 ‘거대 여당’으로 배를 바꿔 타고 새로운 항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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