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정국’ 그때…이정현 vs 한동훈 [유경민의 정치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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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정국’ 그때…이정현 vs 한동훈 [유경민의 정치여행]
  • 유경민 기자
  • 승인 2025.01.12 11: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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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현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단합 가장 중요”
한동훈, ‘국민 눈높이’ 더 중시하다… 원팀 못 만들고 파국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유경민 기자]

새누리당 '이정현호(號)'의 출범으로 임기 1년 6개월여 남은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현 정부에서 청와대 수석을 두 번이나 역임해 박 대통령의 '복심'으로 꼽히는 이정현 대표체제로 집권여당이 재편되면서 박 대통령으로서는 든든한 '우군'을 확보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사진은 2013년 3월 정무수석 임명장 수여식에서 기념촬영하는 모습. ⓒ연합뉴스
새누리당 '이정현호(號)'의 출범으로 임기 1년 6개월여 남은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현 정부에서 청와대 수석을 두 번이나 역임해 박 대통령의 '복심'으로 꼽히는 이정현 대표체제로 집권여당이 재편되면서 박 대통령으로서는 든든한 '우군'을 확보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사진은 2013년 3월 정무수석 임명장 수여식에서 기념촬영하는 모습. ⓒ연합뉴스

 

결말이 뻔히 보이는 박근혜 탄핵에도 ‘사수’


박근혜 대통령(이하 박근혜)과 이정현 전 대표(이하 이정현)의 인연은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노무현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휘청거리며 천막당사에서 풍찬노숙을 할 때였다. 이정현은 호남 지역인 광주에 유일하게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했다. 광주에서 한나라당의 승리는 불가능이다. 홀로 외로이 싸우던 이정현에게 당시 당 대표인 박근혜가 직접 전화를 걸어 “어려운 곳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세요”라며 격려했다. 

이정현은 높은 지역의 벽을 넘지 못하고 총선에서 패배했다. 총선이 끝난 후 박근혜가 마련한 오찬 자리에서 “한나라당의 호남 포기 전략을 포기해달라”고 말하며 15분간의 긴 연설이 끝나자 박근혜는 “어쩜 그렇게 말을 잘하세요”라며 칭찬했다.

며칠 뒤 박근혜는 이정현을 당 수석 부대변인으로 발탁했다. 이때부터 ‘박근혜의 입’으로 불리면서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는 이명박에게 패하면서 이정현도 갈 곳을 잃었다. 이명박 측으로부터 홍보 부본부장 자리를 제안받았다. 그리고 김문수 경기지사 측으로부터 경기도 정무 부지사직을, 나경원으로부터는 선대위 부대변인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모두 고사했다.

며칠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박근혜는 “힘드신데 가시지 그랬어요?”라고 했지만 “대표님을 모시고 정치를 하면서부터는 한나라당이라고 써진 파란 점퍼를 입고 서울 시내를 활보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당당하고 이렇게 떳떳하고 이렇게 행복한 정치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표님이 저한테 다른 데로 가라고 하시면, 저 깨끗이 정치판을 떠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박근혜 추천으로 이정현은 2008년 총선에서 비례대표 22번을 받아 당선된다. 그 후 2012년 박근혜 대선 후보 캠프에서 공보단장을 맡아 대선 승리에 기여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정권인수위 비서실 정무팀장, 청와대 정무수석과 홍보수석 자리를 맡고 최측근으로 지내면서 ‘박근혜의 남자’로 불리기 시작했다.

2016년 8월9일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 체제가 공식 출범했다. 그가 당 대표직을 맡은 지 불과 한 달을 조금 넘었을 때 ‘최순실 게이트’가 열리면서 국정농단으로 정국이 혼란해졌다. 이정현 대표는 야당이 국회 본회의에서 김재수 장관 해임건의안을 처리한 것에 반발하면서 9월 26일 단식에 돌입했지만 단식 시작 7일 만인 10월 2일 단식을 포기했다. 그러나 국감 파행과 최순실에 쏠리던 시선을 잠시나마 분산시키는 명분이 됐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박근혜의 탄핵이 다뤄지기 시작하면서 이정현도 비난 여론에 직격탄을 맞기 시작했다. JTBC에서 최순실의 태블릿 PC를 공개해 태블릿 안에 들어있던 파일 44개의 연설문을 미리 받아봤다는 보도에 대해 이정현은 “나도 친구의 조언을 듣는다. 그럴만한 연유가 있지 않겠냐”며 옹호했다. 

또한 11월 7일 이정현은 최고위원회의에서 비박계를 포함한 당내 다수의 사퇴 요구에 대해 “가장 힘들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대통령을 도울 수 있도록 조금만 위기관리의 시간을 허락해 달라”며 “재창당 수준으로 변화·혁신하겠다는 허풍을 떨지 않겠으며 국정 공백을 최소화하고, 국정을 최대한 빨리 정상화해 정치를 복원하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해 사퇴 불가 입장을 밝혔다. 

아울러 “고립무원의 대통령은 이 난국의 무게에 짓눌려 힘들어하고 괴로워한다”며 “나 혼자 마음 편하자고 유유히 곁을 떠나는 의리 없는 사람이 되기는 싫다”고 했다.

‘최순실 게이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이정현 지도부 사퇴’가 거부되면서 새누리당 내 분열이 생겼다. 이정현을 비롯한 친박은 ‘즉각 사퇴’ 요구를 거부하면서 거국중립을 내세우며 ‘무시 전략’으로 나섰고, 비박은 당내당(黨內黨)을 자처했다.

이정현은 “이럴 때일수록 애국심과 애당심으로 동요하지 말고 국민과 당 구성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정말 사죄하는 자세로 새롭게 신뢰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호랑이에 12번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교훈이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김무성 전 대표는 “당원 다수의 불신을 받고 있는 현 지도부가 예상치 못한 제안을 한 것은 또 이 위기를 모면하려는 꼼수라고 본다”고 비판했다.

이정현은 야권이 박근혜 탄핵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탄핵 사유를 제시하고 끝까지 탄핵을 추진하라”고 주장했다. 박근혜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에 보고되자 이정현은 “지금이라도 탄핵안을 중지시키고 4월 사임, 6월 대선을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한다”고 끝까지 호소했다. 

결국 박근혜의 탄핵을 막지 못했고 그는 책임지고 대표직을 사퇴 후 탈당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10월 2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파인그라스 앞에서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실내 면담에 앞서 함께 산책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이 10월 2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파인그라스 앞에서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실내 면담에 앞서 함께 산책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尹·韓 갈등 점입가경…20년 인연의 결말은?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와(이하 한동훈) 윤석열 대통령(이하 윤석열)은 2003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의 한나라당 불법 대선자금 전달 사건을 수사하면서 ‘윤석열 사단’에 투입돼 첫 인연이 시작됐다. 13살 띠동갑이 넘는 나이 차이지만 사석에서는 ‘형’이라 부를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다. 

이후 현대자동차그룹 비리 수사 등 윤석열 대통령과 많은 수사에 함께 참여했다. 2016년 최순실 국정농단사건을 수사했던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합류해 윤 대통령이 ‘수사팀장’을 맡았고 한동훈이 파견됐다. 

2017년 박근혜가 탄핵된 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윤석열과 한동훈은 스타 검사 반열에 올랐다. 그해 윤석열은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 한동훈은 서울중앙지검에서 특수수사를 총괄하는 3차장검사로 발탁됐다.

2018년 7월에는 윤석열은 검찰총장으로 승진하고, 한동훈은 최연소 검사장으로 대검찰청 반부패강력부장으로 임명되면서 파격적인 인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각종 의혹들을 수사하면서 문재인 정권과 갈등의 골이 깊어져 결국 파국으로 치달았다. 

윤석열은 2021년 3월, 임기를 4개월 앞두고 검찰총장직에서 사퇴했다. 그 후 넉 달 뒤인 7월에 국민의힘에 입당했다. 윤석열이 2022년 제20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윤 정부 초대 법무부장관으로 지명돼 ‘윤석열 정부의 황태자’로 떠올랐다. 2023년 12월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JTBC 보도로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취임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시점에서 김건희 특검 문제로 이미 불편한 관계였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한동훈이 비대위원장을 맡으면서 윤한 갈등이 수면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통령실의 사퇴 요구를 받은 것이다. 

“법 앞에 예외는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이 보시고 느끼기에도 그래야 합니다.”

위원장 취임 직전 특검 조건부 수용을 시사했던 발언이다. 이후 대통령실의 비서관급 인사가 한 비대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이 뜻’이라면서 사퇴하라고 압박했다. 당시 윤석열 대통령은 한동훈을 지칭한 거친 발언을 했고, 한동훈은 이후 ‘김건희 논란’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갈등은 잠잠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논란으로 윤석열과 한동훈의 갈등은 재차 수면위로 드러났다. 

한동훈은 국민의힘이 4·10 총선에 참패하자 비상대책위원장직에서 사퇴하고 7·23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당선되며 ‘한동훈 대표 체제’를 출범했다.

지난 8월 29일, 한동훈 대표 체제 출범 이후 처음 열리는 연찬회에서 윤석열이 불참하고 한동훈 또한 중간에 자리를 뜨면서 ‘윤·한 갈등설”을 재점화했다. 이후 9월 8일 윤석이 한동훈과 친한계 최고위원을 제외한 일부 당최고위원 및 중진 의원들과 관저에서 비공개 만찬을 가지면서 한동훈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낸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김건희 리스크’와 ‘명태균 게이트’로 논란이 커지자 한동훈은 대통령실에 ‘김건희 라인 인적 쇄신’을 공개 요구했다. 그러면서 “공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분의 라인이 존재한다고 국민들께서 오해하시고 언론에서 기정사실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저는 이 국정의 신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며 “그런 라인은 존재하면 안 됩니다”고 직격했다. 

지난 11월, 한동훈 가족이 국민의힘 당원게시판에 윤석열 대통령 부부 비방 글을 썼다는 ‘당원 게시판 논란’으로 여당 내홍이 깊어지기도 했다. 

지난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호의 해제 결의로 6시간 만에 끝이 났지만 국정은 혼란에 빠졌고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날 한동훈은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국민과 함께 막겠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잘못된 계엄 선포를 반드시 막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밝혔다.

비상계엄 선포 다음 날인 4일 국민의힘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당론으로 정했다. 하지만 한동훈은 대통령과 독대 후 “윤 대통령을 만났지만 제 판단을 뒤집을만한 말은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7일 윤석열 대통령 대국민 담화 후 “윤 대통령 조기 퇴진은 불가피하다”며 “지금의 탄핵으로 대통령 직무집행 정지를 시키는 것이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이라며 탄핵에 찬성하는 뜻을 내비쳤다.

12일 한동훈은 의총에서 “당론으로서 탄핵을 찬성하자는 제안을 드린다”라고 말하자 국민의힘 의원들은 “책임지고 사퇴하라”고 격분했다. 이에 한동훈은 “제가 계엄했습니까? 제가 투표했습니까?”며 반문했다. 

14일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서 가결되면서 장동혁·김민전·인요한·진종오가 줄줄이 사퇴하면서 ‘한동훈 지도부’가 붕괴됐다. 

이를 두고 한동훈은 “최고위원들의 사퇴로 최고위원회가 붕괴돼 더 이상 당 대표로서 임무수행이 불가능해졌다.국민의힘 당대표직을 내려놓겠다”고 말하며 결국 146일 만에 사퇴했다. 대통령과의 기싸움만 벌이면서 ‘탄핵 사태’로 자신마저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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