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와 대적한 이회창, 보수 분열 서막…윤석열·한동훈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유경민 기자]

YS 변화와 개혁 위해 이회창 발탁했지만…끝없는 대립 이어져
“신정부는 부정부패의 척결을 위해 감사원의 역할에 많은 비중을 두겠다.”
1993년 1월, YS(김영삼)는 당선인 시절부터 ‘변화와 개혁’을 예고했습니다. 그의 의지는 그해 2월 취임 후 ‘대쪽’으로 불리던 이회창 전 대법관을 감사원장에 등용하면서 여실히 드러났는데요. 당시 감사원이라는 기구는 설립 목적과 달리 정치적 거수기 역할을 하던 기관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존과 달리 변화와 개혁의 시대에 맞게 권력기관에 대한 감사를 시작한 건데요.
군사정권으로 권력을 독점했던 청와대 비서실·국방부·국군기무사령부·국가안전기획부 뿐만 아니라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도 서면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이렇게 YS정부와 이 원장(이회창)은 성역 없는 감사를 강행하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1993년 12월 문민정부 출범한 지 10개월, YS는 대통령 취임 후 첫 전면 개각에 착수하면서 대쪽 법관 출신 이회창을 국무총리에 임명했습니다. 이회창 총리는 취임식 직후 “국무위원 임명제청권을 법 규정에 따라 행사하겠다”고 밝히면서 YS와의 충돌을 예고하는 듯했습니다.
총리 취임 직후부터 YS와 이회창의 갈등은 필연적이었습니다. 당시 안기부장의 정세 보고는 대통령이 단독으로 받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YS가 외국을 방문하는 동안 이 전 총리가 안기부장에게 업무보고를 요구했습니다. 또한 YS와 독대한 장관들과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보고할 것을 요구했는데요. YS 입장에서는 개혁 정치를 위해 임명한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을 건드리기 시작한 겁니다.
1994년 3월 9일, 갈등의 전초전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전 총리가 YS와 사전 협의 없이 ‘관변단체에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발표를 했는데요. 여권 후보의 수족인 관변단체와의 결별을 발표한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YS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이후 이들은 1994년 4월, 정면으로 충돌하게 됩니다. 이 전 총리는 4월 21일 총리실 간부 회의를 통해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에 회부된 안건이라도 총리의 사전 승인을 받아 시행해야 한다”며 “‘총리 승인’을 받지 않은 회의는 무효”라고 주장했는데요. YS는 이를 대통령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습니다.
이에 이 전 총리는 “법적 권한도 행사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총리는 안 한다”는 말을 남기면서 4개월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났습니다.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하자 김대중이 정계 복귀를 선언하며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습니다. 당시 정계는 김영삼·김대중·김종필. 이른바 ‘3김 시대’ 구도가 형성됐는데요. YS는 지방선거에 참패 후 민자당 간판을 내리고 1996년 2월 ‘신한국당’을 창당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4월로 예정된 국회의원 총선을 대비해 이른바 ‘물갈이 공천’을 감행했습니다.
이재오 김문수 홍준표 손학규 등 당시 개혁적 성향으로 분류된 재야·운동권 출신 인사들이나 국가보안법 위반 대상이었던 이들에 대해 대대적 인사 영입을 시도했는데요. 이는 보수계는 물론 진보 진영까지 놀라게 했습니다.
또한 YS는 이 전 총리를 신한국당 대표로 임명하면서 4월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YS의 뛰어난 정치 감각을 볼 수 엿볼 수 있었는데요. 특히 서울 지역에서 27석을 차지해 전통적으로 야세가 강했던 서울 지역에서 여당이 압승한 이변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갈등은 YS 차남 김현철 전 동국대 석좌교수의 ‘한보사태’ 의혹이 나오면서 건널 수 없는 골이 깊게 패이게 됐는데요. 이 전 총리가 ‘엄정 대응’이라는 방침을 세워 김 전 교수가 1997년 5월 구속기소 됐기 때문입니다. 훗날 이 사건은 무혐의로 판명 나 김 전 교수로서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당시는 야당의 집중적 표적 공세까지 더해져 헤어나오기가 어려웠다는 분석입니다. 그러는 사이 임기 말이었던 YS는 지지율이 점점 하락했고, IMF와 맞물려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7월, 이회창 전 총리는 전당대회에서 경쟁자이던 이인제를 2300표 차로 꺾고 대선 후보로 선출됐습니다. 하지만 이 전 총리의 두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이 불거지면서 ‘대쪽’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그의 이미지에 금이 가기 시작했는데요. 이 또한 상대 진영의 대표적 마타도어 피해를 받은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분위기 반전을 위해 이 전 총리는 대권 경쟁자였던 김대중 후보가 670억 원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을 폭로했습니다.
그러나 YS는 2007년 “대선 직전 대혼란을 우려해 검찰총장을 불러 직접 수사 유보를 지시했다”고 밝혔는데요. 이에 모욕감을 느낀 이 전 총리는 YS에게 직접적으로 탈당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이 전 총리의 ‘강성 팬덤’ 지지자들은 YS에 분노해 경북 포항에서 열린 대선 필승 결의대회에서 ‘03 마스코트’를 막대기로 두들겨 패면서 ‘김영삼 인형 화형식’을 강행했습니다.
1997년 11월7일, YS는 당을 떠났는데요. 이는 보수세력의 분열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면서 이인제 후보까지 따로 독립해 출마한 마당에 이 전 총리가 DJP(김대중·김종필) 상대로 이기기는 어려웠습니다. 결국 이 전 총리는 제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39만여 표 차이로 패하면서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는 분석입니다.

현재의 권력과 미래의 권력 싸움의 앞날은?
28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번 이들의 관계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전 대표의 관계와 비교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계에 입문한 과정부터 닮은 점이 많습니다. 한동훈 전 대표 또한 윤석열 대통령의 후광으로 스타 반열에 올랐습니다. 이후 정치 신인이었던 한 전 대표는 여당의 원톱 자리까지 올라갔는데요. 하지만 이들의 둘 사이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면서 결국 파국으로 치달았습니다.
이들의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한 시점으로 잠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2023년 12월, 한동훈 전 대표가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시점에서 JTBC의 보도로 ‘윤한 갈등’이 수면위로 드러나기 시작한 건데요.
한동훈 전 대표가 위원장 취임 직전 특검 조건부 수용을 시사하는 발언을 하면서 김건희 특검 문제에 대해서도 “단일대오로 가야한다”고 말해왔습니다. 이후 대통령실의 사퇴 요구를 받습니다. 당시 윤석열 대통령은 한 전 대표를 지칭한 거친 발언을 했다고 전해졌는데요. 한 전 대표는 이후 ‘김건희 논란’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한 전 대표는 ‘김건희 리스크’와 ‘명태균 게이트’로 논란이 커지자 대통령실에 공개적으로 ‘김건희 라인 인적 쇄신’을 요구했습니다. 지난 11월에는 그의 가족이 국민의힘 당원게시판에 윤석열 대통령 부부 비방 글을 썼다는 ‘당원 게시판 논란’으로 여당 내홍이 깊어지기도 했는데요.
12월 3일. 국정이 혼란에 빠지고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든 사건이 생겼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탄핵정국에 들어선 겁니다. 한 전 대표는 비상계엄 선포 다음 날인 4일 국민의힘은 윤석열 탄핵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당론으로 정했습니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대통령과 독대 후 “윤 대통령을 만났지만 제 판단을 뒤집을만한 말은 듣지 못했다”며 “지금의 탄핵으로 대통령 직무집행 정지를 시키는 것이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이라며 탄핵에 찬성하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12월 14일,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서 가결되자 장동혁·김민전·인요한·진종오가 줄줄이 사퇴하면서 ‘한동훈 지도부’가 붕괴됐습니다. 이에 한동훈 전 대표는 “최고위원들의 사퇴로 최고위원회가 붕괴돼 더 이상 당 대표로서 임무 수행이 불가능해졌는데요.
결국 그는 “최고위원들의 사퇴로 최고위원회가 붕괴돼 더 이상 당 대표로서 임무 수행이 불가능해졌다. 국민의힘 당대표직을 내려놓겠다”고 말하며 결국 146일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결과적으로 대통령과의 기싸움만 벌이면서 이후 대안은 마련하지 못한 채 본인 스스로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과거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 이회창 총재가 화형식을 했다. 차별화를 시도했지만, 김대중 대통령에게 정권을 넘겨 우리가 10년 동안 야당을 했다.”
원희룡 전 장관이 전당대회 당시 당원들 앞에서 한동훈 전 대표를 ‘이회창’에게 빗대어 말한 건데요. 한 전 대표를 겨냥해 보수 분열의 소지가 클 수 있음을 우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실제 분열 양상이 초래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 경우 역사적으로 보면 이회창 전 총리처럼 연거푸 대권 도전의 와중에도 결국 정치적 재기가 어려웠음이 가늠되고 있습니다. 최근 한 전 대표도 책을 통해 본인의 입장을 소명하며 정치적 등판을 예고하고 있는데요. 탄핵 찬성 이후 내려간 차기 대권 지지율을 보듯 보수 진영 내 다수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예전같지 않음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을 거로 보입니다.
한때 그는 ‘현재의 권력’과 치열히 대립한 것처럼 보였던 ‘미래의 권력’으로 분류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처지가 달라진 지금, 미래의 권력이라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됐는데요. 과연 기사회생할 수 있을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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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명 :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