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한동훈 전 대표님께.
먼저 이 말씀부터 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힘든 시기에 여당 대표로 당선돼, 백전노장 정치인들도 극복하기 어려운 시련을 겪으셨습니다. 역대 이렇게 불운했던 당대표가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한 대표님. 한편으로는 대표님의 실패가 꼭 불운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당대표직을 수행하신 146일 동안 단 한 번도 대표님이 정치인으로서 ‘유능하다’거나 ‘믿음직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정치인에게 필요한 덕목을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라는 문장으로 축약하셨습니다. 정치인이라면 명확한 비전을 가져야함은 물론이고, 그 비전을 현실화할 수 있는 방법론도 갖춰야 한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까지도 대표님이 내세우고자 했던 비전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총선을 진두지휘하던 시절에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를, 당대표가 되신 이후에는 윤석열 대통령을 비판하던 모습만 떠오릅니다.
끝없는 내수 침체, ‘뉴 노멀’이 돼버린 듯한 실업 문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물가 등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청사진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러니 총선을 이길 수도, 정부여당 지지율을 끌어올릴 수도 없었던 거지요.
현실감각이 좋았던 것 같지도 않습니다. 꼭 비전이 없더라도, 지지율을 올릴 수 있는 미시적 전략이라도 있었다면 지금 같은 상황까지 오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대표님은 그런 정치적 감각조차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대통령과의 갈등이 대표적입니다. 당대표가 되셨을 때, 윤 대통령 임기는 아직 반환점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대표님은 윤 대통령과 각을 세웠습니다. 물론 대통령과 거리를 두면서 ‘마이 웨이’를 가는 것도 대표님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긴 합니다.
문제는 대표님이 그 길을 선택했을 때 불어 닥칠 당의 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그 위기를 극복할 방안이 전혀 마련돼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당대표라면, 대표님이 대통령과 거리를 뒀을 때 정부와 당의 관계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를 고려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꼭 각을 세워야한다는 결론이 나왔다면, 헝클어진 당정 관계 속에서 국정을 원활하게 운영할 수 있는 방안, 친윤 세력의 반발을 누르고 당을 움직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둬야 했습니다.
그러나 대표님은 대통령을 비판만 했지, 그로 인해 발생할 문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대표님이 마련한 대안이 현실의 물결을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수준이었던 거겠지요. 어떤 쪽이든, 당대표로서는 낙제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탄핵도 마찬가지입니다. 윤 대통령 탄핵이 불가피했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일 겁니다. 그렇다면 대표님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을 현실화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탄핵 이후 당을 수습할 방안까지 고민하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대표님은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켜달라고 호소하셨을 뿐, 그 이후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었습니다. 이미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의 트라우마가 있는 국민의힘이 탄핵에 찬성하기 어려울 거라는 것, 그렇게 당론이 양분되면 극심한 갈등이 찾아올 거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음에도, 대표님은 그 분열을 막기 위한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대표님. 정치가 어려운 건 ‘옳은 말’과 ‘옳은 일’이 반드시 해답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옳은 일을 하기 위해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이해관계를 고려하고, 적절한 타이밍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군이 생기고, 세력이 생기고, 힘이 생겨 궁극적으로 대표님이 옳다고 믿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정치력입니다.
부디 대표님이 다시 돌아오실 땐 뒤를 생각지 않고 ‘옳은 말’만 하는 검사의 옷을 벗어 던지고, ‘옳은 일’을 끝끝내 해내기 위해 잠시 굽힐 줄도 아는 정치인으로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대표님에게도 미래가 생기고, 그래야 우리 정치도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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