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속 민주화 인사에서 평민당 부총재까지…단기필마 정치역정
“나도 후농도 DJ에게 숙청당한 것”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병묵 기자 박근홍 기자)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도 높은 민주화 정도를 자랑하는 한국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2012년 한국의 민주주의 척도를 세계 20위로 올려놨다. 23위의 일본보다 높다. 그러나 민주화 이전의 한국 정치는 사실상 암흑기였다. 다만 캄캄한 암흑에서는 끊임없이 불을 밝히려는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존재했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앞장서서 싸웠던 이들을 민주 투사(鬪士)라고도 부른다.
그러한 투사라는 명칭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노정객(老政客)이 있다. 평화민주당 부총재를 맡았던 손주항 전 의원이다. 손 전 의원의 정치역정에는 ‘민주화 투사’, ‘무소속의 맹장(猛將)’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손 전 의원은 젊은 시절부터 거침없는 웅변과 강경한 투쟁으로 유명했다. 전 세계적으로도 사례가 많지 않은 옥중당선(獄中當選)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젠 종심(從心)도 넘긴 정계의 원로지만 아직도 그 목소리엔 힘이 담겨 있다. 그의 민주화 투쟁사와 정치역정을 들어보기 위해 8월 29일 <시사오늘>은 종로에 있는 손 전 의원의 자택을 방문했다.
손 전 의원은 대학 졸업 후 해공 신익희 선생의 선거대책 본부 유세원을 하며 정계와 연을 맺었다. 이후 26세에 전라북도 도의회 의원에 당선되며 정치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결국 9대 국회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임실 순창 남원에서 당선된다.
선거 일주일 전 연행…0.79평 독방에서 옥중당선
1978년 10대 국회의원 선거는 12월 12일이었다. 선거일을 일주일도 남기지 않은 12월 6일 손 전 의원은 합동유세장에서 연행된다. 죄목은 선거법위반, 허위사실 유포, 긴급조치 위반 등이었다.
“전주교도소의 감옥 독방이 0.79평에 불과했다. 어지간한 방 문짝보다도 좁다. 그 안에 변소도 있지만 거기서 밥도 다 먹고 해야 한다. 내 키가 6척에 약간 못 미치는 장신이다. 똑바로 누울 수가 없기 때문에 대각선으로 잠을 잤다. 상황은 아주 열악했지만 간수들이 내게 못되게 굴진 않았다. 내 죄수번호가 123번이다. 번호는 간수들 맘대로 정하는 건데 정말 못된 놈이 들어오거나 마음에 안 들면 빨리 죽으라고 죽을 사(死)자가 연상되는 440번 같은 걸 준다. 내겐 외우기 편한 123번을 줬다.”
손 전 의원의 아내는 하얀 소복을 입고 남편의 사진을 들고 다니며 유세를 나섰다. 남은 선거기간동안 ‘손주항을 살려 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유명한 ‘옥중당선’은 이 선거에서 벌어졌다.
“9대 국회는 길었다. 임기가 6년이었다. 임기 내내 나는 공화당의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10대 선거 때도 나를 낙선시키려 다양한 공작을 펼쳤다. 그래서 연설에서 ‘이 선거는 손주항이와 중앙정보부와 싸움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최종적으로는 선거를 코앞에 두고 나를 가뒀지만 결국은 당선됐다.”
당선을 통해 10대 국회의원이 됐음에도 손 전 의원은 풀려나지 못한다. 이에 옥중에서 가족들과 정치인들에게 서신을 보내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다음은 1979년 1월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YS)전 대통령에게 손 전 의원이 보낸 옥중서신의 일부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제 구속은 처음부터 소석(素石 : 이철승 전 의원의 호)과 중앙정보부의 합작품이요, 보복도 곁들인 음모론입니다. 작일 공소장에는 기록도 아니 되었던 긴급조치 9호가 추가되어, 삼척동자도 보석되리라던 여망을 깨버렸습니다.…(중략)…면회는 물론 엄중제한하고 제 처는 종일 미행·감시받고 있습니다.…(중략)…김 총재님 이민우 선생님과 같이 면접 와 주신다면 추가로 더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어려운 틈새에 난필로 김 총재님께 처지를 호소합니다.”
민주 투사의 시련기, 삼성과의 인연
1979년 10·26사건이 일어나며 박정희 정권은 무너졌고, 손 전 의원은 수감된 지 363일 만에 의원직을 유지한 채 풀려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며 다시 구속됐다. 1981년 3월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석방되나, 복권(復權)이 되지 않아 피선거권을 박탈당했다. 이때부터 88년 13대 총선까지 손 전 의원은 정치적 휴지기를 갖는다. 이 시절 손 전 의원은 삼성그룹과 인연을 맺게 되는데 그 사연이 흥미롭다.
“내가 당시에 제일기획에 고문으로 있었다. 내가 선전에 일가견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한 장짜리 인사 달력을 제작해 인사 대신에 선물로 돌리기도 했다. 나중에는 내 이름이 인쇄된 부채를 만든 적도 있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홍보수단 아닌가.”
손 전 의원이 80년 구속됐을 당시 건강이 악화된 적이 있었다. 국사범이라 의사들도 잘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손 전 의원의 아내가 삼성의료재단 소속인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 원장에게 가서 도움을 청했다. 당시 고려병원이 이 사정을 삼성 고위층에 보고했더니 도와주라는 승낙을 받고 의사들이 여섯 차례나 도와주게 됐다. 출감 이후 손 전 의원이 고맙다는 말을 전하자 삼성 고위층에서는 ‘어려울 때 도와야 한다’며 자리를 제안해 잠시 회사 생활을 하게 된다. 손 전 의원은 자신의 저서에서 ‘천하가 나를 외면했을 때 (삼성이)도와준 것에 대해선 누가 뭐라 해도 고맙게 생각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일각에선 손 전 의원이 삼성으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았다는 의혹이 있으나, 그러나 손 전 의원은 당시에도 삼성 연수도 받지 않았다. 삼성 직원이라기보다는 고문 대우만 받는 외부 인사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故 이병철 전 삼성 명예회장에 대해 언급했다.
“이(병철) 회장은 그릇이 큰 사람이다. 자신은 상인(商)이니, 돈을 벌었으면 정치를 하는 선비(士)를 돕는 것도 하나의 이치라고 믿었다. 겸손한 사람 아닌가. 예술에도 관심이 많았고. 삼성이 지금 저렇게 클 수 있었던 것은 기반을 알뜰하게 닦은 이 회장의 힘이라고 본다. 그런데 지금 이건희 회장이나, 그 후손들은 그만큼의 도량이 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정치의 절정기에 DJ와 결별
1987년 복권된 손 전 의원은 1988년 13대 총선을 준비했다. 무소속으로 전북에서 두 번이나 당선됐던 손 전 의원은 지역에 당을 넘어 자신의 정치적인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손 전 의원은 자신의 지분을 평민당에 더하며 김대중(DJ)전 대통령과 손을 잡는다.
13대 총선에서 DJ가 이끄는 평민당은 14개 선거구를 휩쓸었다. 정적(政敵)이라고도 볼 수 있었던 7선의 이철승 전 의원에게 6만 표 이상의 차이로 압승을 거둔다. 이 전 의원은 이 일로 정계를 은퇴한다.
“민주화 이후 첫 선거 아닌가. 상징적인 의미에서도, 정치 재기를 위해서도 질 수 없었다. 물론 이철승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전주와 전북에선 내 이름도 많이 알려져 있었다. 무소속으로 나와서도 당선되지 않았나.”
13대 국회에서 정치인으로서 절정기에 달한 손 전 의원이지만 DJ와 결별하며 급격히 세가 위축된다. 14대 총선, 지역구였던 전주 완산구에서 출마했지만 이미 호남 민심은 사실상 DJ에게 쏠려있는 상태였다. 손 전 의원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호남에서 DJ에게 맞섰다고 강골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 생각하면 분위기상 그렇게 해서는 (당선이)안 되는 거였다. 게다가 DJ는 자신을 위협하는 인재들을 절대 키우지 않는 습관이 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부총재였던 내가 더 치고 올라오는 걸 막는 것은 당연했다. 후계자를 키우지 않았다. 후농(後農 : 김상현 전 의원의 호)도 유능한 사람이지 않나. 그 사람이 얼마나 충성을 다했는데…결국은 그도 DJ에게 사실상 숙청당한 거다.”
손 전 의원은 이후 반 DJ노선을 위해 한나라당에 입당한다. 그러면서 일각에선 보수로 돌아선 민주화 투사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민주화에서 최전선에서 용맹하게 싸우던 인물도 결국 세월이 흐르며 보수화됐다는 평이다. 이에 대해 손 전 의원은 단호한 대답을 내놨다.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 보수화 된 것이 아니다. 각 시대에는 시대가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 나는 인생의 황금기 내내 독재와 싸우고 부당함과 싸우면서 보냈다. 지금은 민주화가 상당히 이뤄졌기 때문에 싸울 만한 것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DJ가 역사적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지금의 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은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내가 함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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