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정세운 기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상향식 공천인 ‘오픈프라이머리’에 집착한다. 지금은 국정교과서 문제로 논란이 멈췄지만, 이는 언제라도 터질 것 같은 활화산이다.
김무성 대표가 그토록 공천권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친박계 의원들은 한목소리로 차기대권과 연결 짓는다. 김 대표가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명분이지만 실제로는 내년 총선을 주도한 후, 차기 지도부를 비박계 의원들로 채울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후 이들을 중심으로 차기 대선후보 경쟁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겠다는 게 김 대표의 생각이라는 것.
하지만 다른 의견도 나온다. 김 대표가 18, 19대 총선서 친이계와 친박계에 의해 공천학살을 당한 경험을 든다. 그러면서 ‘더 이상 권력자에 의한 공천은 안 된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틈만 나면 “국회의원들이 제 목소리를 못내는 가장 큰 이유는 공천권이다. 이를 가진 권력자의 눈치를 보느라 소신껏 일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정치공학적으로 보면 두 의견 모두 설득력이 있다. 물론 어떤 얘기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40년 가까운 김 대표의 정치이력을 더듬어 보면 이에 접근 할 수 있을 듯싶다. <시사오늘>은 잘 알려지지 않은 김무성 공천과 관련된 두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13대 총선서 DR 구로에서 서초로 옮기자, 김무성 공천 좌절
#1. 대부분의 언론들은 김무성의 정치시작을 1985년으로 본다. 민추협을 통해 정치를 시작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김무성의 정치시작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인 1978년 10대 총선을 앞두고다. 당시 정치의 꿈을 꾸어오던 김무성은 포항에서 둘째 형이 경영하던 동해제강 공장장으로 있었다.
그해 신민당 포항 영일 지구당 개편대회가 벌어졌는데, 이때 김무성은 경선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전임 위원장은 이철승계 조규창이었다. 김무성은 혼자 힘으로 당선이 어렵다고 판단해 상도동계의 지원을 요구했고, 김영삼(YS)이 직접 ‘장래를 같이 도모하자’는 친서까지 보냈다.
YS가 친서를 보낸 이유는 김무성의 부친 김용주 때문이었다. 김용주는 1960년 제2공화국 때 민주당 원내총무를 맡았는데, 원내부총무가 김영삼이었다. 이때 둘은 친분을 쌓았고, 이 같은 인연으로 YS는 친서까지 써가며 김무성 지지를 약속했다.
YS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김무성의 승리가 눈앞에 와 있었다. 그러나 YS는 박정희의 눈엣가시였다. 정보부는 경선준비과정에서 김무성이 당원에게 정종 1병을 돌린 것을 트집 잡아 압력을 가했다. 김무성은 중도에 포기했고 정계진출의 꿈이 좌절됐다.
#2.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김무성은 YS가 이끌던 통일민주당 간판을 들고 서울 A지역구 출마를 서둘렀다. 당시 서울 구로구에는 YS 복심으로 불리는 김덕룡(DR)이 출마를 선언한 상태. 서울 서초구에는 동교동에서 넘어온 박종률이 출마를 기정사실화하며 표밭갈이에 나섰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DR이 출마지역을 구로구에서 서초구로 옮기겠다고 나섰다. 아무리 YS 복심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지역이 정해진 상태여서 YS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나선 인물이 홍인길이다. 홍인길은 직접 박종률을 찾아가 지역구를 DR에게 양보할 것을 요구했다. 박종률은 출마준비를 위해 들어간 돈이 5천만 원이 넘는다며 난색을 표했다.
김무성이 출마를 준비 중이던 A지역에는 통일민주당 공천을 바라는 B라는 인사가 있었다. B는 홍인길과 만나 박종률에게 5천만 원을 주겠다며 A지역 공천을 요구했다. 결국 김무성은 10대 총선에 이어 13대 총선에서도 출마가 좌절됐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