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메이커②] '家臣'에서 '同志'로…킹메이커의 '모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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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메이커②] '家臣'에서 '同志'로…킹메이커의 '모던화'
  • 오지혜 기자
  • 승인 2016.02.26 1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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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좌희정 우광재'…"노무현式 민주주의에 전적 동감"
이명박의 남자 '이재오'…대운하 구상에 "형님, 대통령 하라"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오지혜 기자)

왕은 만들어진다.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국가의 통수권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손끝에서 결정된다. 고금을 막론하고 그 과정에선 치열한 정치적 전투가 벌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마지막 승리자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그들을 왕으로 만들어낸 핵심 인물, 바로 ‘킹 메이커’의 존재다. 격동의 한국 현대정치사 속 ‘킹메이커’들을 <시사오늘>이 정리했다.

킹메이커 2세대, '권위주의' 저물고 '동반자'의 길 열리다

三金 시대가 막을 내렸다. 21세기로 들어서며 국내 정치문화도 변했다.

킹메이커의 '모던화'가 대표적이다. 기존의 권위주의적 '가신' 역할에서 수평적 '동반자'로 바뀐 것이다.

킹메이커 1세대는 기존 왕정무대에 진출해 있던 노련한 가신(家臣)들로, 여러 세자들 중 왕위에 올릴 후보를 뽑는 방식을 취했다.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한 허주 김윤환은 이미 전두환, 노태우 시절 정계에 진출해 권·언(權·言) 양 쪽에 거대한 영향력을 미친 사람이다. 노태우와 YS 모두 허주가 차례로 손을 들어주면서 왕위에 오를 발판을 마련했다.

JP와 후농 김상현 역시 개인적인 정치력을 바탕으로 왕 만들기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반면, 노무현·이명박 정권을 창출한 2세대는 재야에서 이름은 날렸지만, 정계에서는 신인에 불과했던 시절에 잠재적 대권후보를 만났다.  

'좌희정' 안희정 - 'MB의 남자' 이재오, 킹메이킹 계기는 '아이디어(Idea)'

▲ 올초 노무현재단 행사에 참석한 안희정 충남지사 ⓒ 뉴시스

'노무현의 왼팔' 안희정 충남지사는 고교 시절부터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참여, 제적당한 뒤 결국 자퇴했다. 검정고시로 대학에 들어간 그는 반미청년회 사건에 연루, 국가안전기획부에 체포됐다.  

안 지사는 이때의 경험으로 1989년 'YS의 오른팔'인 DR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은 '5공비리 청문회'로 일약 스타가 돼 있었다. 안 지사는 이듬해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꼬마 민주당'으로 이적했다. 

안 지사가 노 전 대통령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3년 오랜 친구인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의 제안이 계기였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13대 총선에 당선된 이래 줄곧 핵심참모로 활동한 인물이다.

이 전 지사는 안 지사에게 지방자치실무연구소 합류를 제안했다. 지방자치연구소는 노 전 대통령이 설립한 것으로,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의 일환이었다. 두 사람은 이때부터 킹메이커 '좌희정 우광재'로 거듭났다.

'이명박의 남자'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 역시 대학 시절부터 학생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당시 중앙대 구국투쟁위원장이었던 이 의원은 지난 1964년 6·3 항쟁에서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이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과 처음 만났다.

이 의원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중고교 국어교사 등으로 재직하면서 재야운동을 지속했다. 그는 1990년 진보 성향의 민중당을 창당했지만 선거에 참패,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이때 YS의 영입으로 이 의원은 신한국당 간판을 달고 15대 국회에 입성, 6·3 동지회 일원인 이 전 대통령과 재회했다. 

그가 당시 동료의원이던 이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하게 된 것은 '대운하' 구상이 계기가 됐다. 그는 당시 경험을 지난 2012년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5대 국회에서 다시 만난 이 전 대통령이 운하에 대해 죽 설명했다. 그때 이거다 싶더라. 나라를 다시 한 번 바꾸는 길은 운하 건설이라고. 그래서 내가 '형님, 대통령 하라'고 했다. 국회의원으로는 평생 그 일 못하니까, 내가 뒤 받쳐 줄테니 대통령 하라고."

▲ 지난해 송년회에 함께 참여한 MB-새누리당 이재오 의원 ⓒ 뉴시스

대운하 구상이 뜻밖의 영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이 의원의 이력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강원도 '산골소년'이었던 이 의원은 초등학교 때부터 농촌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유년시절 읽었던 농촌계몽소설 <상록수>는 그의 인생 행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농촌사회개발학과 진학도 농촌운동가가 되고 싶던 꿈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한반도 대운하 건설'은 매년 홍수와 가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는 농촌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 의원은 2007년 대선 당시에도 "국토를 전체적으로 손봐야 할 시점"이라면서 대운하 건설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이 의원이 킹메이커가 된 계기는 이 전 대통령의 '조건'이 아닌 '아이디어'에 있던 셈이다. 

안희정 지사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나선 것은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이념'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2010년 도지사 유세현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절대권력은 부패한다. 사람과 권력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한 제도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노무현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또 '노무현식' 수평적 리더십이 좋았다. 그는 당시 유일하게 정치활동에 관해 자신의 스태프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사람이었다. 모든 스태프들은 그의 동반자적 위치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내가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한 이유는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말하던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꿨기 때문이다. 이는 힘없고 빽없는 이 땅의 보통사람에 대한 존경과 같은 것이다."

배 태울 사람 찾는 1세대, 동반자 외길 걷는 2세대

'아이디어'와 '이념'을 공유한 킹메이커 2세대는 '동반자'의 외길을 고집했다. 이는 '프로' 킹메이커로 나선 1세대와 다른 점이기도 하다.

허주와 JP 등 1세대는 자신이 뽑은 세자를 왕좌에 올린 경험을 통해 다시금 '배에 태울' 사람을 물색했다.

허주는 노태우, YS 대통령 만들기에 연이어 성공하자, 2000년에는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의 킹메이커로도 나섰다. 박정희 정권 창출의 주요 조력자였던 JP 역시 YS, DJ를 차례로 지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반면, 2세대는 본인의 정치행보는 이어가고 있지만 또 다른 '킹'을 찾지는 않았다. '이명박의 남자'는 영원히 친이계 좌장으로, '노무현의 남자' 역시 친노계 적자로 남았다.

이에 대해 이재오 의원은 지난해 11월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공은 MB에게 돌아가고 과(過)는 이재오한테 돌아왔다. 숙명이다. MB가 대통령이 돼야 하기 때문에 도왔다. 정치인이 남을 돕기로 하면 자기를 버릴 생각을 해야 한다."

담당업무 : 국회 및 야당 출입합니다.
좌우명 : 本立道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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